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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단동행丹東行 단동丹東 안개 동행 춘정 악연 야간열차 평산식당 통과의례 콩쥐 김소군 오호령 터널 고수촌古樹村의 그믐밤 눈길 함박눈 돈화 터미널 경박호 부근 유민 영안寧安 지나며 목단강의 저녁 목단강 편지 목단강 목단강 골짜기 조각보 용정 겨울 두만강 학서촌鶴棲村 삼합의 눈 새총 오랑캐령 윤동주 생가 차창 밖 풍경 청산리 백두산 평원 이도백하二道白河 작은 버스 장백 가는 길 국경선 공안차 겨울밤 탈북 여인 무리리 빈둥빈둥 객지 단동丹東의 밤 겨울 만주 ?박명호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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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단강.
세상에 이처럼 고운 이름의 강이 또 있을까. 이 3음절의 명칭 안엔 먼 북쪽 평원으로 흘러드는 푸른 강물이 출렁이고 물고기 떼가 헤엄친다. 근처 경박호에 살던 옛 전설 속의 버들처녀가 등장하고 목단화가 만개한다. 가만히 목·단·강이라고 끊어서 발음해 보면 석류알 같은 단단한 울림 안에 심미적 깊이까지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목단강에서 유래한 도시 이름도 목단강이다. 목단강으로 가는 겨울여행은 상상 이상으로 좋았다. 거기 대륙의 고토古土에는 우리의 멸망한 왕조가 눈에 묻혔고 오래된 설화說話들이 널려 있었다. 민족의 시원始原을 열어준 강줄기가 얼음으로 반짝이고 삶의 터전을 받쳐온 대지가 설원으로 눈부셨다. 눈 덮인 구릉지의 촌락을 찾아들어 토담집에서 들쭉술 마시며 주인과 밤새 나누었던 정담. 느닷없이 퍼붓는 폭설도 아랑곳 않고 식민지 시대의 고난과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이야기 실꾸리로 길게 풀어낼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섣달 그믐밤에 안도의 고수촌에서 연변의 시인과 동숙했고, 설날엔 눈 덮인 만주 들판을 함께 거닐며 맑고 평화로운 내면을 교류했다. 돈화로부터 동경성 가는 노정에서는 얼음호수로 바뀐 경박호를 바라보며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듯 즐거워했다. 이어서 영안까지, 가도 가도 끝없는 설국을 만끽하며 백색의 신성함 속에서 광야의 푸른 독립군가를 들었다. 애초에 내가 꿈꾸었던 겨울여행의 절정이 이런 것이었구나 싶었다. 마침내 목단강. 너무 추워 운신하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밤하늘 별자리 위에 연인의 이름을 새기며 하룻밤을 묵었다. 그리고 다음날 얼음과 눈에 덮인 목단강으로 나가 가슴에 품었던 그리움을 조심스레 꺼내 들었다. 하지만 얼음제국으로 변한 현장에서 목가적 낭만은 펼치기도 전에 냉동되고 말았다. 아쉬운 대로 목단강의 그 차고 맑은 이미지만 담아올 수밖에 없었다. 추위에 쫓겨 용정으로 내려온 뒤에는 개산툰과 삼합의 두만강 일대를 답사했다. 얼어붙은 국경 건너편을 바라보며 분단의 아픔을 되새김질했다. 또한 이도백하에서 장백까지, 백두산 둘레의 긴 눈길도 왕복했다. 오지의 눈길 위에서 겪은 일들은 사소해도 그 눈부심이 강렬해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다. 이렇듯 인상 깊었던 겨울 만주기행의 결과물이 이번 시집이다. 두만강 여울목 이후 몇 년간의 창작활동이 누적된 것이지만, 목단강 여정을 바탕에 깔고 그 밖의 것은 대폭 손질하여 줄였다. 현장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기 위해 중간중간에 사진을 싣고 박명호 소설가의 맞춤형 기행문도 끝에 수록했다. 이 시집을 위해 베풀어준 그의 호의에 감사한다. 눈 내리는 북국의 정취를 많은 사람들과 공유했으면 좋겠다. 대표시 겨울 안개 속 압록강이 얼어 있다 강가에 서서 건너편 바라보는 추운 사내들의 낡은 생애 몇 안개에 반쯤 잘리고 없다 그 사내들 곁에 줄지어 선 실버들 실버들의 설화 얹은 머리칼도 태반은 안개에 먹히고 없다 그리운 것들은 반쪽만 이편에 남아 강 건너편을 하염없이 바라보나? 안개 저편에서 가끔 실루엣으로 두런거리는 소리 해독 안 되는 기호로 새어 나온다 겨울 안개 속 단동丹東의 아침 풍경이 얼어 있다 -「단동丹東 안개」 시린 별자리 아래 누워 막막한 어둠 속으로 흘러간다 심양에서 연길 가는 야간열차 침대칸 여행배낭과 함께 구석에 얹혀 식민지의 과거로 무작정 흘러간다 창밖을 스치는 매몰찬 눈바람 철커덩철커덩 몸을 흔드는 선로의 쇠바퀴소리 시간의 흑백필름이 내 몸을 뚫고 지나간다 총칼에 무찔려 총칼에 무찔려 내 형제들 무수히 피 흘린 변방 독립군 토벌대 마적단 밀정까지 열차 천장에 눈동자 박고 내 이마 들쑤신다 괘액- 내지르는 열차의 목쉰 울음 어둠에 덮인 눈밭을 먼 곳까지 흔든다 -「야간열차」 눈 덮인 연변의 겨울밤 유난히 빨리 찾아온다. 나무울타리 안에 가축이 많은 민가는 허름해도 구들이 따뜻하다. 비닐봉창에 물방울 맺힐 무렵, 동네 불빛만큼의 별들이 하늘에 돋고, 낡은 라디오에선 서울 가리봉동에 돈 벌러 가서 설에도 돌아오지 못하는, 애타는 조선족 여인이 아들과 전화하는 생방송 흘러나온다. 방문도 없이 윗방 아랫방 부엌이 하나로 터진 온돌방에서, 일행은 농부시인 김일량과 긴 밤을 이야기하며 들쭉술 마신다. 그는 대자연에서 언어의 이슬 받아 시를 쓴다고 자부한다. 자정 넘어 다시 눈은 내리고, 멀리 한족漢族마을에서 이따금 설맞이 폭죽 소리 들려온다. -「고수촌古樹村의 그믐밤」 산문 우리는 이름만 낯익고 모든 것이 낯선 목단강에 내리자마자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우선 우리를 맞아 준 것은 영하 이십 도가 넘는 살인적인 추위였다. 그것은 마치 부산 앞바다에서 팔딱거리던 정어리들이 목단강 얼음판 위로 내동댕이쳐진 형국이었다. 같은 온도라도 초저녁 무렵의 추위가 훨씬 춥게 느껴진다. 눈가의 물기마저 얼어붙는 바람에 눈을 잘 뜰 수가 없었고, 턱이 얼어붙어 말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춘절 기간이라 상점들마저 문을 닫아 도시는 가로등 불빛만 그 매서운 추위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갑작스런 소나기처럼 예상치 못한 혹한에 노출된 우리는 어디든 들어가 추위를 피해야 했다. 마스크에 입김마저 하얗게 얼어붙어 거의 동태가 되어버린 조성래, 서규정 두 시인은 몸을 잔뜩 웅크린 채 어떻게 해보라고 명색 가이드인 나만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은 시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런 가게라도 들어가서 몸을 좀 녹이면서 전화를 걸든지 길을 물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몇 블록을 돌고 돌아도 도무지 문을 연 가게가 보이지 않았다. 턱이 얼어 입을 열기도 힘이 드는지, 얼어 죽겠다는 두 사람의 우는소리마저도 점점 기어들어갔다. 그렇잖아도 당초 명절 기간에 움직인다는 것은 힘들다는 나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일정을 앞당기자고 보챈 것은 그들이었기에 노골적으로 투정을 부릴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언 목단강 거리를 추위와 허기에 허우적거리다가 거의 기진맥진해진 상태에서 사람들의 출입이 있는 상점을 발견했다. 그곳이 어떤 곳이건 기어들어갈 작정이었다. 그곳은 마침 백화점 식품 코너였다. 우선 얼었던 눈자위가 풀리면서 시야가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고, 마침내 턱이 녹으면서 말을 할 수가 있었다. 냉동된 물고기가 따스한 물에 녹아 다시 살아나듯이 우리의 표정들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야말로 우리는 한동안 냉동된 상태로 모든 의식이 정지되어 버린 죽음의 세계를 경험한 것 같았다. 잠시 정신을 가다듬은 우리는 그곳에서 빵과 음료수로 저녁을 해결했다. 그러나 전화 걸 곳이 없어 다시 난감해지기 시작했다. 목단강에는 우리를 안내해줄 시인이 있었다. 급하게 떠나오는 바람에 그에게 연락이 되지 않았고, 도착해서 어떻게 해 볼 요량이었는데 그것이 결국 어려움을 자초한 셈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결과적으로 만주의 추위를 확실하게 맛볼 수 있었다. - 박명호 소설가 「겨울 만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