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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가 달린다
베이비 파라다이스 블랙미러 사마귀의 눈물 바카디151 승강기 얼굴을 보다 해설 | 쾌락원칙 너머의 쾌 김형중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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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소설가 차노휘의 첫 소설집
쾌락원칙 너머의 쾌 병리적 인물로 병리적 사회 그려낸 빼어난 작품 신예소설가 차노휘의 첫 소설집이다. 날카롭고 재빠르고 숨 막히는 문체에 담긴 이야기는 아주 강렬하면서도 독특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죽어버린 시신과 사랑을 나누거나, 아이들을 죽여 박제화 하는 것으로 영원히 소유할 수 있다고 믿거나, 기차가 지날 때마다 어머니를 성폭행하는 아버지와 자신의 몸속에 그 기차가 들어와 있다고 말하는 등, 차노휘의 소설 속 인물들은 거개가 병리적 증상을 겪고 있다. '관음증', '시신 애호증'으로 나타나는 여러 가지 도착증, ‘전이 신경증’(불안, 공포, 히스테리, 강박증), ‘나르시시즘적 신경증’(정신분열증, 편집증, 우울증) 등 그 병리적 현상은 별개의 것이라기보다는 우리 사회의 병리적 징후에 다름 아니며, 그것이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는 점에서 차노휘 소설의 매력과 가치가 더욱 빛을 발한다고 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 김형중은 이번 소설집을 "정신분석적 비평, 그것도 가장 최근의 경향에 대한 참조를 요청하는, 아니 거의 '강제하는' 텍스트"라고 명명하면서, 소설 속 인물들의 병리적 증상 이면에 은폐되거나 억압되어 있는 '근친상간적 욕망'이 단순히 프로이트적 주제를 되풀이하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라깡적 도약'을 감행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차노휘를 통해 우리는 지금 프로이트의 드라마가 아닌, 라깡의 드라마가 2000년대 한국 소설이라는 무대에서, 그러나 흔히 훌륭한 문학 작품에서 그렇듯이 계획되지는 않은 채로, 정확하게 실연되는 흔치 않은 장면을 목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오해한 것 중의 하나는, 죽음 충동(Thanatos)과 에로스(Eros)가 구별 가능하다고 생각했다는 점이다. 그는 저 두 가지 충동을 하나는 성에, 하나는 죽음에 봉사하는 별개의 두 충동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경험적으로도 증명되듯이 성과 죽음은 그리 멀리 있지 않다. 현명하게도 바타유는 ‘성’을 ‘작은 죽음’이라고 부르면서 그 둘이 주로 에너지의 축적보다는 소모와 탕진을 통해 격렬한 쾌락을 추구하는 ‘에로티즘’의 영역에 속한다고 말했다. 우리가 나날이 경험하는 것도 그와 같은데, 인류에 속한 개체가 격렬한 쾌감을 느낄 때란 그것이 신체적 에너지가 되었건 경제적인 재화가 되었건 축적할 때가 아니라 항상 소모할 때이지 않던가. 물론 프로이트 또한 ‘강박’을 통해 ‘쾌락원칙’을 넘어서는 어떤 영역이 존재할 수도 있음을 의식했지만, 그러나 그는 ‘반복’을 특징으로 하는 강박 역시 종국에는 벌어진 사태를 바로잡으려는 주체의 무의식적인 소망의 소산이라는 결론으로 선회한다. 그러나 라깡에 이르면 사정이 달라지는데, 그가 말하는 ‘쥬이상스’는 흔히 ‘쾌를 넘어서는 쾌’, ‘죽음과도 같은 향유’로 정의되곤 한다. 그런 이유로 ‘쥬이상스’는 항상 ‘외설적’이다. 외설적이란 말은 그러므로 라깡에 있어 단순히 추잡하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쾌락원칙을 넘어선 쾌를 실현(하려고)한다는 말에 가깝다. '외설적 쥬이상스', 곧 '쾌락원칙 너머의 쾌'를 허용하는 시대는 히치코크와 지젝이 우리 시대의 알레고리로 전유한 '모성적 초자아'의 시대를 가리킨다. 산업자본주의 단계의 리얼리즘적 영웅들의 시대('자율적 주체'의 단계)와 모더니즘적 반영웅들의 시대('은퇴한 아버지'의 단계)를 지나 '모성적 초자아'들에 지배당하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쾌락주의 시대('병적 나르시시스트'의 단계)는 다름 아닌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이며, 외설적 쥬이상스가 실제로 실현되어 주체의 상징적 질서를 완전히 무너뜨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공포, 그리고 그것이 유발하는 정신병적 상태를 차노휘의 소설은 극화하고 있다. 차노휘 소설은 표면적으로는 한국 사회의 현단계에 대해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고립된 병리적 주체들의 이야기처럼 읽힐지라도, 깊은 차원에서는 현재 한국 사회와 문화의 변화를 깊은 차원에서 반영하고 있다고 말해야 한다. 혹은 이 작가의 소설들 자체가 우리 사회의 징후라고 말해야 한다. 항상 훌륭한 문학작품은 한 사회를 반영하는 데 성공한 것이 아니라, 한 사회의 병리를 (때로는 작가도 작품도 알지 못하는 채로) 앓았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이 말은 더욱 신빙성이 있다. 히치코크와 지젝이 그 얘기를 주로 모성적 초자아에 의해 징벌당하는 아들의 관점에서 했다면, 차노휘는 주로 모성적 초자아의 관점에서 하고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우리는 차노휘의 소설을 통해 병적인 나르시시즘적 문화의 여성 판본을 만나고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인용 문구는 김형중의 「해설」 일부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