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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1장 : 납치되다. 2장 : 운명의 천사와 만나다. 3장 : 스펙타클 다이어리. 4장 : 그대는 나의 올리비아 핫세. 5장 : 서른한 가지 맛의 키스. 에필로그. 외전: 박봉천, 운명의 마녀와 만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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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 그러니까 이제 그만 나 욕실로 가도 되지? 옷은 입어야 되잖아. 당신 정말 연약한 여자한테 해도 해도 너무하는 거 아냐?”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지만 사내는 이렇다 저렇다 대꾸도 없이 무시무시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만 보고 있다. 그녀는 그 앞에서 잠든 사람 앞에서 하듯이 손바닥을 살살 흔들어보다가 다시 욕실 쪽으로 가기 위해 살며시 발 한쪽을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그때, 그가 번개처럼 달려들어 지원을 다시 어깨에 거꾸로 들쳐 맸다. “꺅! 악! 이거 못 내려놔! 내려! 내려어어엇!” 그녀는 손을 돌려 훤히 드러나 있을 엉덩이를 필사적으로 가렸다. 너무 분하고 화가 나자 눈물이 다 찔끔거리며 나오려고 했다. “뭐 이딴 게 다 있어! 빨리 못 내려놔? 너 죽을래? 이 나쁜 놈. 변태새끼. 엄마야! 아악! 내 엉덩이에 얼굴 대지 마!” 그는 지원이 발버둥을 치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욕을 내뱉건 여전히 말없이 그녀를 들쳐 매고 성큼성큼 걸었다. 대낮에도 블라인드가 모두 내려져 있어 어둑하기만 한 침실 문이 열리고 그녀는 다시 침대 위로 내던져졌다. “엄마야!” 보기 흉하게 나동그라졌던 그녀는 이불을 있는 대로 끌어 모아 몸을 가리며 침대의 맨 끝까지 물러섰다. 덜컥 겁이 난다. “뭐…… 당신 뭐야. 어, 이거 왜 이래. 지금 뭐 하려고 그러는 거야? 어? 왜 이래 정신 차려. 나 의뢰인이거든? 돈 주는 사람. 알아들은 거지?” 뿌드득. ‘이갈았다. 저 자식 진짜 이갈았어!’ 지원은 자신의 앞에 저승사자처럼 버티고 서 있는 남자를 무서워 올려다보지도 못하고, 이불이 자신을 지켜주는 뭐라도 되는 듯 몸에 칭칭 감고는 고개를 팍 숙여버렸다. 아무래도 사람을 단단히 잘못 고른 것 같았다. ‘나이트 가서 술 처먹고 만난 처음 본 놈을 믿은 내가 미친년이지.’ 그날, 얼굴이라고는 딱 두 번밖에 못 본 늙다리에게 시집가야 된다는 청천병력 같은 말을 할아버지로 전해부터 듣고 우울하던 참에 술이 들어가자 감정이 격해져서는 낮선 남자 앞에서 자기 얘기를 늘어놓은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두 번 다시 볼일 없을 남자에게 그냥 술 먹고 푸념을 늘어놓았을 뿐인데, 도와줄 수 있겠다는 남자의 말에 귀가 솔깃하고 정신이 번쩍 났다. 그의 말에 머릿속으로 끝내주는 계획들이 홱홱 지나갔다. 자유, 외국으로 도피. 상상 속에서는 완벽했다. 그러니까 그 멍청한 보디가드가 할아버지한테 보고만 하도록 대충 흉내만 내주면 되는 거였는데, 그런데 이건 정말 아니다 싶다. 잘못 건들었다 싶었다. 이 남자는……. ‘너무 지나치게 프로잖아!’ 지원은 속으로 쓴 눈물을 삼켰다. “뭐야.” 그가 불쑥 말을 뱉었다. 그의 물음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지원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긴 뭐가 뭐야! 너 바보야? 뭘 물어 보려면 제대로 물어봐야지! when where who what how why 이런 거 몰라?” J의 눈썹이 위로 휙 치켜졌다. 그리고는 안 그래도 곱지 않은 얼굴이 더 구겨지며 입 꼬리만 올려 씨익 웃었다. 그의 입술 사이로 뾰족해 보이는 송곳니가 슬며시 드러나자 지원은 자신도 모르게 파르르 떨었다. “나 지금 무지 참고 있거든 아가씨. 여기 나랑 아가씨 둘뿐인 걸 잊은 건 아니지? 그러니까 괜히 승질 건들었다가 후회는 하지 말고 내가 물으면 그냥 이쁘게 대답해. 그러면 돼 알았지? 자, 그럼 얘기해봐. 권하고 한 얘기 한마디도 빼놓지 말고.” 꿀꺽. 톤을 완전히 낮춘 그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지원의 목으로 마른침이 간신히 넘어갔다. ‘아 젠장, 진짜 더럽게 무섭다.’ 지원은 무서운 표정으로 서 있는 그의 눈치를 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전부 조사했다면서. 그럼 우리 집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아? 월드리조트의 이상근이 우리 할아버지야. 그 지독한 노인네가 돈에 환장을 해가지고 나를 자꾸 대머리 늙은이한테 제물로 바치려고 그런단 말이야. 완전히 산제물이라니까. 소름끼쳐 죽겠어. 요새 같은 세상에도 아름답고 순결한 처녀를 괴물한테 바치는 풍습이 존재한다는 거. 혹시 알아? 그래서 그 사람한테 부탁했어. 우연히 만났는데…… 도와 줄 수 있다고 하기에.” 말이야 바른 말이지, 세상에 이런 법은 없다. 고용주를 이렇게 막 대하다니. 화를 내고 싶은 심정은 굴뚝같았지만 이곳은 외딴곳 같았고 그의 말대로 여긴 둘뿐이니까 원하는 대로 고분고분하게 굴어주는 수밖에 없다. 지원은 이 살벌한 남자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최대한 성질을 죽이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냥 납치하는 시늉만 했으면 되는 거라고.” “시늉만 낸 다음엔?” “강간당하고 비디오 찍혔다고 그럴 거야. 돈 안 가져오면 월드리조트 외동딸이라고 제목도 달아서 인터넷에 풀어버린다고 그렇게 말할 거라고. 우리 할아버지가 얼마나 소문을 무서워하는지 알아? 양반입네, 하고 아직도 고리타분하게 가문이나 따지면서 큰소리 치고 사는 노인네니까…… 그러니까 당신은 할아버지가 돈을 주면 감사합니다. 그러고 받아서 나하고 계산만 깨끗하게 해주면 되는 거지. 동업자.” 동업자, 하고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이 너무 말개서 J의 입술 사이로 절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생긴 것이며 가느다란 목소리는 더 할 수 없이 상냥하며 처연하게 아름다워서 그 이질감이 더했다. ‘강간비디오? 자알 한다. 스물한 살밖에 안 먹은 게 아주 발랑 까졌구만.’ J는 보면 볼수록 여자가 탐탁치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씁쓸한 얼굴을 하고 있든지 말든지 간에, 지원은 딴엔 제법 심각한 얼굴을 하며 계속해서 중얼거렸다. “비디오가 있다고 하면 절대로 경찰에 신고할 리도 없어. 내가 죽으면 죽었지 평판이 더 중요한 노인네니까.” “부잣집 아가씨가 돈이 왜 그렇게 필요하지? 단지 그 결혼이 하기가 싫은 것뿐이라면 방법은 많을 텐데 이런 극적인 자작극까지 할 필요 있었어? 그 돈 받아서 뭐하게. 마약이라도 하나?” 그의 눈이 지원의 팔 안쪽과 안색을 살핀다. 그런 분위기는 없지만 요새 애들은 영 모르니까 말이었다. “흥. 웃겨.” 그의 눈초리에 마음대로 생각하라는 듯 그녀가 콧방귀를 끼었다. “도망갈 거야. 멀리 아무도 나 못 잡는 데로.” “애들 장난에 휘말리고 싶은 생각은 없어. 이쪽은 그렇게 한가한 몸이 아니라서 말이야. 날 가지고 놀았던 걸 생각하면 절대로 그냥 두고 싶지는 않지만 한번정도는 철없는 애의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참아줄 수도 있어. 게다가 지금이라면 납치니 뭐니 눈치 채지 못하게 곱게 돌아갈 수 있지.” “이게 애들 장난으로 보여?” “그럼? 심심했던 거라면 인터넷을 뒤져서 수준에 맞는 애들은 찾아. 그편이 확실히 돈은 덜 드니까.” “그러니까 이런 장난도 있냐구! 당신이 그런 시시껄렁한 애들이 아닌 건 확실히 알겠어. 하지만 당신 눈에는 내가 철없는 장난을 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나한테는 내 인생이 걸린 심각한 문제야. 그런 식으로 비웃지는 말아줬으면 좋겠어. 술김에 부탁했다고 해도 나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살지 않아.” 고개를 든 그녀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가 뺨을 타고 아래로 툭 떨어지며 얇은 시트 위에 얼룩을 만들며 번졌다. “그 늙은이가 내 얼굴을 쓰다듬는 상상을 하면…….” 지원은 누군가 정말 자신을 쓰다듬기라도 한 것처럼 소름이 한꺼번에 돋아 오르는 어깨를 움츠리고 팔을 들어 스스로를 감싸 안았다. “구역질 나. 그런 결혼 따위. 내가 왜? 어째서 그래야 해? 난 할아버지 사업 같은 거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그깟 거. 엄마는 돌아가셨지만 아빠는 살아 있는데도 얼굴 한번 볼 수 없게 만드는 할아버지 사업 같은 거. 돈이 많아도 다시 그 돈 때문에 내가 어디론가 원치 않는 곳으로 팔려가야 한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이 있는 거지? 난 이번 일 꼭 성공해야 해. 그래서 멀리 떠나서 평생하고 싶은 공부하면서 독신으로 살 거야. 징그러운 눈으로 내 몸이나 훑어보고 침 흘리는 남자 따위 지긋지긋해. 정말 싫어! 지금 내가 하는 말이 당신에게는 부잣집 아가씨의 철없는 푸념으로 들리겠지. 하지만 난 절실해. 누구나 다 자기 어깨 위에 놓인 십자가가 무거운 거 아냐? 만약…… 결국 억지로 끌려가서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차라리 그냥 죽어 버리는 게 낫겠어.” 파리하기까지 한 투명한 피부 위로 반지르르한 검은 머리카락이 흘러내리며 한없이 가냘픈 어깨를 더 작아 보이게 했다. 그녀는 가지런한 하얀 이로 입술을 살짝 물어뜯으며 애절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원이 눈물을 글썽거리는 맑은 눈을 한 번이라도 들여다 본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할 것 없이 안쓰러워 어쩔 줄을 모르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니 다시 그녀의 웃음을 볼 수만 있다면 사람들이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행동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지원조차도 자신의 재능에 깜짝 놀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연기를 하고 있었다. 완전히 몰입을 하다 보니 눈가가 시큰거리고 가슴이 짜르르 한 것이 스스로도 정말로 믿어버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앞에 떡 버티고 선 J의 표정에는 눈곱만큼도 변화가 없었다. ‘아니, 이런…… 뭐. 젠장, 뭐 이래. 눈이라도 쑤셔서 눈물을 더 짜내야 되나.’ 아니 오히려 뭔가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는 것처럼 입매가 더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 푸념 말고 정말 하고 싶은 말은?” “흐흑.” 그녀의 어깨가 들썩여지며 흐느낌이 더욱 짙어졌다. “적어도 내 인생의 선택은 내가 하고 싶어. 공부…… 공부도 하고 싶고 감시 없이 여행도 하고 싶어. 이제 겨우 스물한 살, 채 피어보지도 못하고 꺾여버리고 싶지 않다고. 그러니까…… 도와줘. 부탁이야. 꼭 도와줘.”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어.”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에는 여전히 아무런 변화가 없었지만 분명히 목소리는 아까보다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그럼 그렇지.’ 숙인 고개 아래에서 지원의 입술 끝이 가증스럽고 사악한 라인을 그리며 살며시 치켜 올라갔다. ‘공부? 뭔 놈의 공부. 내가 공부라면 얼마나 지긋지긋해하는데.’ 사실 그랬다. 최고 학벌을 자랑한다는 가정교사를 몇 차례나 갈아 치워도 그녀의 성적은 도통 오를 생각을 안했었다. 머리가 썩 좋지도 않았지만 사실은 공부하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탓이었다. 대학이 무엇이냐. 그녀의 생각으로는 단지 돈벌이를 하기 위해 준비를 시켜주는 교육 기관일 뿐, 이미 돈이라면 다 못쓰고 죽을 정도로 많이 있는데 굳이 대학에 가야만 하는 이유를 몰랐던 그녀였다. 대학을 나온다고 취직할 생각도 없고 실제로 그렇게 될 것도 아니기에 더욱 그런 생각은 굳건했다. 엄하기로 소문난 사립여자 고등학교에 다니고 여대에 가게 된 것은 순전히 할아버지의 생각이었다. 주변의 친구들은 일단 좋은 대학에만 가면 멋진 남자를 사귈 수 있을 거라는 목표에 코피가 나게 공부를 했지만 지원은 속으로 웃기고 있네, 했다. -여자는 오직 얼굴- 그것이 지원의 가훈이며 급훈이고 좌우명이었다. 3년 동안 엉덩이나 팍 퍼지게 의자에 하루 종일 앉아 죽어라고 공부해서 좋은 대학 들어가 봐라, 괜찮은 남자들이 쳐다나 보나. 남자 얼굴에다 대고 미분적분을 읊을 것도 아니고 메일에 화학공식을 적어 보낼 것도 아니다. 그런 것보다는 하늘하늘한 하얀 원피스를 입고 긴 생머리를 손가락으로 넘기며 수줍게 웃어주는 그 한방이 더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을 그녀는 매우 어린 나이부터 깨우치고 있었다. 그런 것은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에서 막 깨어난 악어가 물을 찾아가듯이 태고 적부터 내려온 자연의 본능이다. 자동 습득되는 것이다. ‘아, 어쩜 좋아. 난 정말 타고났나 봐.’ 지원은 J를 힐끔거리고 몰래 훔쳐보면서 내면연기에 더더욱 집중했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빠져 있던 그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야. 너 왜 반말이야. 나 너보다 나이 한참 많아.” 그가 이런 말을 한다는 자체가 그의 화가 누그러졌다는 것일 터였다. “죄송해요. 너무 긴장해서 그만…… 이왕 시작하신 거 저 구해주시는 셈 치고 일은 끝내주세요. 당신은 의뢰인이 누구든 상관없잖아요? 아니, 아니죠. 오히려 제가 도망갈 염려가 없으니 더 잘된 거 아닌가요?” ‘나이 많은 게 무슨 자랑이라고 유세하기는.’ 긴장하면 말을 놓나. 지원은 자기가 생각해도 웃기는 핑계를 대놓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살포시 깜빡거리며 J를 향해 쳐들었다. 그 순간 눈썹에 매달린 눈물방울이 시간도 절묘하게 그녀의 손등으로 톡 떨어지며 애처로운 장면을 연출해냈다. 하여간 남자라는 것들은 젊으나 늙으나 대우받기는 무지하게 좋아한다. ‘까짓 거 그래. 그깟 존댓말 듣고 싶다면 해주지 뭐. 존댓말 좀 했다고 혀가 부러지는 것도 아니고.’ J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잠시 움찔 뒤로 한발 물러나며 등을 돌았다. “조용히 쉬고 있어.” ‘내가 그동안 여자를 너무 멀리 했나.’ 문을 닫고 나온 J는 눈물이 그렁그렁하게 매달린 지원의 커다란 눈을 떠올리다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뜨끔해 고개를 홱 저었다. 정말 남자 홀리게 예쁜 거 하나는 알아줘야겠다. 물론, 그녀의 말을 전적으로 믿는 건 아니었다. 아니 그 입에서 흘러나오는 거칠 것 없는 욕설을 떠올린다면 뭔들 믿을 수 있으랴. ‘그러나 뭐가 됐던 임권 이놈은…….’ J는 아까 서랍에 넣었던 휴대전화를 집어 들고 집 밖으로 걸어 나왔다. 알아볼 것이 생겼다. ---본문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