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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100년 권력 소가씨 4대 이야기
제1장 이나메와 긴메이 천황 제2장 우마코와 스이코 천황, 쇼토쿠 태자 제3장 에미시·이루카와 조메이·고교쿠 천황 맺음말·현재 천황까지 이어지는 ‘소가씨의 핏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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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이 검토 대상으로 삼은 역사의 주인공은 645년에 발생한 다이카개신(大化改新: 이른바 을사의 변)까지의 일본 고대사의 전반부를 화려하게 장식한 소가씨 집안의 사람들이다. 특히 소가씨 본종가(본가)를 형성한 소가노 이나메(稻目)-우마코(馬子)-에미시(蝦夷)-이루카(入鹿)로 이어지는 소가씨 4대다. --- p.7
‘소가’라는 씨족명에 대해서는 거주지 주변에 서식하는 식물 ‘스가’(골풀)에서 유래한다는 설도 있다. 좀 더 주목되는 점은 소가씨의 거주지인 소가 지역에 ‘구다라가와(百濟川)’, 즉 ‘백제천’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소가씨와 백제의 관련성을 시사한다. 한편 소가씨 가문의 계보 중 마지(滿智)·가라코(韓子)·고마(高麗) 등 한반도와 관련된 이름이 보이고 있다는 점, 소가씨가 그 아래에 아야(漢)씨·후네(船)씨 등과 같은 백제계 도래씨족을 다수 거느리고 있는 점, 소가씨 가문이 주도적으로 추진한 대외정책에 있어서 친백제 정책을 견지하고 있는 점, 목만치와 마지가 동일인물로 추정되며 백제 목(木)씨의 후예로 볼 수 있다는 점 등에서 소가씨 집안을 한반도 백제에서 건너간 도래계 씨족으로 보아도 큰 잘못은 없을 것이다. --- p.29 오늘날에도 이 게이타이 천황의 혈통이 이어지고 있다. 즉, 지금의 일본 천황은 계통적으로 따지고 올라가면 바로 이 게이타이 천황의 자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하면 6세기 초에 성립한 게이타이 천황의 왕조는 이후 무너지는 일 없이 일본열도 전체의 최고 지배자 가문으로 발전하였음을 의미한다. 물론 내부적으로는 왕위계승분쟁도 있었고 분란이 끊이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 대왕가의 왕통은 게이타이 천황의 등장 이후 안정적으로 확보되었으며, 다른 가문으로 대체되는 일은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다. 메이지시대 이후의 근대에 들어 일본천황가의 만세일계를 표방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 p.50 이나메와 도래인(각종 박사·승·기능인 등)의 관계를 살펴보면, 한반도 특히 백제에서 왜국으로 건너온 도래인들은 전문 관료·테크노크라트 및 외교사절로서 활약하고 율령 및 각종 사서편찬에도 직접 관여한 사실들이 주목된다. --- p.60 이처럼 한반도에서 건너온 승려와 박사·학자·시학사(학사) 등은 기본적으로 왜 왕권 내의 차기 왕위계승 후보자를 포함한 유력 왕가나 유력 귀족의 자제를 대상으로 제왕학이나 유교·불교 등 학문이나 사상을 교수하였다. 나아가서는 왜국의 대외적 혹은 대내적인 정책입안이나 시행에도 일정한 관여나 지도를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 p.68 결국, 소가씨는 국가 재정을 담당하고 도왜인(도래인) 출신들을 활용·중용하면서 세력을 확대해나갔고, 이를 배경으로 왕실과 혼인관계를 맺음으로써 신흥호족 중에서 가장 유력한 호족으로서의 입지를 굳힐 수 있었다. --- pp.74~75 하지만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설사 형식상으로는 섭정 쇼토쿠 태자와 오오미(大臣) 소가노 우마코가 공치(共治)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권력의 실체는 어디까지나 소가씨, 즉 우마코의 손에 있었다고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고 현실적인 이해일 것이다. --- p.80 따라서 그 결과로 소가씨의 피를 받은 왕족은 나라(奈良) 시대의 중반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소가씨의 피는 황실에 면면히 이어졌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소가씨의 피가 후지와라노 후히토(藤原不比等)와의 결합에 의해 그 정치적 후계자로 등장한 신흥 귀족 후지와라씨에게로 수혈되면서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 p.14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