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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진지충의 탄생
1장 블랙리스트와 저항 2장 [나꼼수]와 무학의 통찰 3장 메갈리아: 침묵당하기에서 교란시키기로 나오며: 생각하는 인간에 대하여 |
진지함은 속 좁음, 과감하지 못함, 이해력 부족, 유머 없음, 사회성 부족, 옹졸함, 찌질함, 과격한 도덕주의자의 성질로 받아들여진다. 심지어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이 인간의 본성을 억압하는 파시즘이라는 주장까지 나올 정도로 ‘불편한’ 문제 제기를 불편해하는 정서가 만연하다. ‘프로 불편러’라는 조어는 불편해하는 사람을 낙인찍는 언어로 활용된다.
‘느낌적 느낌’이라는 조어처럼 느낌의 느낌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를 ‘합리적인 의심’이라 주장한다. ‘사이다’ 언어가 각광받고 촉을 향한 신뢰가 성장했다. 진지함이 조롱받을수록 생각하는 인간은 우스꽝스러워진다. 표현의 자유와 취향을 방패삼아 ‘생각하지 않음’을 정당화하는 태도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다. --- p.18 [나꼼수]는 자극적이고 검증되지 않은 정보를 풀어놓았다. 던져진 미끼를 중심으로 추리가 확산되면서 사실과 음모론 사이의 경계는 점점 불투명해졌다. 음모론을 털어내고 사실만 골라내는 작업에 착수하다보면 재미는 진지함으로 퇴색할 수밖에 없기에 재미를 유지하기 위한 과장과 왜곡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 p.70 사실 여부가 아니라 ‘믿느냐, 믿지 않느냐’의 영역으로 들어간다. 믿지 않는 사람은 적이다. (중략) 여성혐오와 성희롱은 이 당파성에 숨어서 정당화된다. --- p.76 적폐와 우리 편의 시대, ‘꼼수’와 ‘빠’의 시대, 음모론과 팬덤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열광의 시대는 주적chief enemy과의 싸움을 내세워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의제를 꾸준히 ‘나중에’로 미루고 있다. 시민의 힘으로 탄핵이라는 역사적 순간을 끌어내 새로운 정권을 만들어낸 시점에서 민주주의와 성정치의 문제는 더이상 ‘나중’이 될 수 없다. 팬덤 정치가 극심해지면서 ‘이명박근혜’에 대항할 수 있는 정치인을 지지하는 것만으로도 유권자들은 과잉된 정의감을 느낀다. 정치인 지지가 곧 자신의 정의감을 가득 채워주기에 수많은 혐오(동성애, 여성, 장애인, 특정 지역, 이주노동자, 결혼이주 여성, 운동권, ‘고상한’ 지식인 등에 대한)는 모두 ‘정당한’ 혐오로 여긴다. 차별금지법 입법을 나중으로 미뤄도, 여성 비하를 일삼았던 사무관의 경질을 요구하는 여성들을 정권에 방해되는 목소리로 치부해도, 더불어민주당 대표인 이해찬처럼 베트남 여성 비하 발언이나 장애인 비하 발언 등 ‘구설수’에 오를 만한 망언을 해도, 난민에 정부가 소극적으로 대처해도, 정권 수호를 위해 이에 대한 비판을 적극적으로 방어하는 ‘팬’들이 많다. --- pp.76~77 ‘메갈리아’가 왜 만들어졌고,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증발한 채 ‘메갈리아를 옹호하는가’라는 검증만 난무했다. 메갈리아라는 이름은 그렇게 새로운 형태의 ‘종북 빨갱이’가 된다. ‘메갈리아’라는 가상의 적은 ‘한국 남자’를 피해자로 만들고, ‘한국 남자’들의 일상화된 혐오가 마치 ‘메갈리아’ 때문에 새롭게 탄생한 양, 그들의 혐오를 이해하는 도구로 활용되었다. ‘이해’는 언제나 약자의 몫으로 남는다. 성소수자는 이성애 사회를 이해해야 하며, 여성은 가부장제를 이해해야 하며, 장애인은 비장애인을 이해해야 한다. 반면 이해받는 이들은 조심할 필요 없는 권력을 휘두른다. --- pp.149~150 지금까지 보수 우파가 ‘안보 장사’로 사회의 지성을 마비시켜왔다면, 이제는 여성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자칭 진보도 스스로 지성을 퇴보시킨다. 페미니즘이 축적한 지적 역사를 끊임없이 부정한다.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기 위해 ‘나를 설득해봐라’라는 태도를 고집한다. 여성학은 학문이며 여성운동은 저항과 투쟁의 역사가 있고 여성주의는 하나의 인식론이다. 그런데도 비판적 지식인, 그중에서도 남성 지식인은 여성주의에 관한 지적 태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젠더 문제를 두고는 ‘본능’을 옹호하며, 자연법칙을 내세울 때가 많다. 운동과 지성의 흐름을 거부한 채 ‘남성의 본능’에 갇혀 알기를 거부한다. --- p.145 치밀한 합의와 논쟁을 무시하고 위선과 자유라는 단편적인 대립항을 만드는 사회는 필연적으로 약자와 소수자를 향한 차별에 둔해진다. 불편한 진실을 외면해 얻은 ‘자유’에 힘을 싣는다. --- p.174 혐오와 차별은 때로 ‘취향’이라는 고급스러운 외피를 두른다. 백인을 좋아하는 취향, 뚱뚱한 여자에 비위 상하는 취향, 가부장제가 잘 맞는 취향, 동성애자를 싫어하는 취향 등 별별 형태의 차별이 취향으로 포장된다. ‘취향’이라는 말 속에는 비정치적이며 판단이 중지될 수 있는 중립적인 개념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말할 자유’, ‘그냥 내 의견’, ‘다양성’, ‘다른 것은 있어도 틀린 것은 없다’ 등의 말들로 자신의 올바르지 않은 말을 방어한다. 취향이라는 소음기를 장착한 총으로 혐오 발언을 마구 쏠 자유가 ‘표현의 자유’로 자리잡게 된다. --- p.175 |
1. 반지성주의의 풍토
올해 초, 한 코미디언이 제작한 동영상 하나가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이른바 ‘PC’, 즉 ‘정치적 올바름’을 ‘놀리는’ 동영상이었다. ‘엄마 아빠는 PC충’이라는 제목으로 올라간 이 영상에는 한 한국인 여성이 남자친구인 백인남성을 부모에게 소개하는 상황이 그려지는데, ‘PC충’으로 그려지는 그 부모는 딸의 남자친구가 ‘백인’이라는 것에 대해 ‘소수민족’이나 ‘흑인’ 남자친구에는 관심이 없느냐고 딸에게 묻고, 딸의 남자친구가 쓴 ‘병자호란’을 주제로 한 책을 읽고서는 왜 책에 주체적으로 행동하는 흑인이 한 명도 없느냐며 비판한다. 맥락에 맞지 않게 무조건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는 부모를 황당하게 그리며 ‘PC충’, ‘진지충’을 ‘깐다’. 최근에는 ‘쓸모는 없고 쓸데없이 진지한’ 인문학 전공자들을 멸시하는 ‘문과충’이라는 말까지 유통되고 있다.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고, 고민하고 성찰하는 태도, 그것을 배우는 학문은 이제 ‘충’이라는 이름이 붙어 놀림감이 된다. “생각하고 의문을 제기하는 태도 자체가 조롱의 대상이다. ‘진지충’을 조금 순화해 ‘진지병’이라 부르기도 한다. 다른 표현으로 ‘선비질’, 더 상스럽게 말하면 ‘씹선비’라고 한다.” 엘리트나 식자층의 권위주의나 엘리트주의에 대한 반발이라고만 보기 어렵다. 이는 소수자와 약자를 볼모로 삼은 창작이나 저항 방식에 대한 비판마저 엄숙주의자, 도덕주의자, 나아가 위선자 등으로 낙인찍는 상황으로 번져나간다. 소수자성에 대한 민감함과 예민함으로 사회를 감지하며 우리 사회에 ‘불편한 목소리’를 발화해온 저자 이라영은 『타락한 저항』을 통해 한국사회의 반(反)지성주의, 그리고 반지성주의의 풍토에서 자라난 혐오와 차별을 날카롭게 짚어낸다. 이 책에서 말하는 반지성주의란 지식이 없는 무지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알기를 거부하는’ 태도를 말한다. 가령, 혐오 발화자들을 보면 그들은 혐오하는 대상을 모르기 위해 애쓴다. 혐오 발화를 하는 이들도 나름 지식으로 무장한다. 다만 알고 싶지 않은 문제를 적극적으로 모르려고 할 뿐이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말들을 보자. ‘남성이 역차별을 받는다’, ‘‘종북’과 ‘귀족노조’가 나라를 망친다’, ‘동성애 때문에 에이즈가 창궐한다’. 기득권 유지를 위해 자신이 알고 싶지 않은 문제를 적극적으로 ‘모르려고’ 하며, 시대에 맞는 새로운 ‘마녀’인 ‘충’을 계속 만들어내 인간사회에서 몰아낸다. 나아가 정치적 올바름과 진지한 성찰은 폭로, 재미 앞에서 쉽게 솔직하지 못한 ‘위선’이 되고, 불편한 진실은 외면한 채 마치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것 같은 ‘취향’이라는 단어와 ‘표현의 자유’라는 외피를 두른 ‘혐오의 자유’라는 차별이 횡행한다. “사회의 야만은 약자 멸시에 담겨 있다. 지성은 사회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향해 치밀한 관심을 동반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고립되기를 두려워하지 않되, 현실에 참여하기를 게을리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 참여하되 구속받지 않아야 한다.” _196쪽 2. 지배하는 피해자, 타락한 저항의 탄생과 진화 지성이 약자를 향해야 한다는 것에 비추면 지성에 대한 적극적 거부는 약자를 조롱하고 혐오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폭력이며 결국 누가 권력을 갖고 발화하는지를 보여주는 잣대이기도 하다. 이 책은 한국사회에서 벌어진 세 가지 사건(박근혜 정권하에서 벌어진 문화예술계의 ‘블랙리스트’ 사건과 이에 대한 저항의 방식, 이명박 정권하에서 탄생해 박근혜 정권, 문재인 정권 집권까지 이어진 [나꼼수] 현상, ‘메갈리아’라는 저항의 방식을 둘러싼 현상)을 중심으로 진지함과 생각에 대한 혐오, 반지성주의가 어떻게 소수자와 약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과 결합하는지, 표현의 ‘자유’와 저항할 ‘권리’의 관계를 살핀다. 특히 이러한 흐름이 보수와 진보, 거대악과 그에 대응하는 저항이라는 이분법과 결합하며 저항과 피해자라는 보편의 위치를 누가 점하고 누구의 목소리가 지워지는지 치밀하게 짚어낸다. 문화예술계를 뒤흔든 박근혜 정권하에서의 ‘블랙리스트 사건’에서는 문화예술과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보수 정권의 제도적 검열과 이 검열에 맞서 혐오 발화를 동반한 저항이 짝패를 이루어온 과정을 살피고, ‘나꼼수 현상’을 통해서는 노무현의 죽음 이후 이어진 10여 년간의 보수 집권 시기에 이기는 정치를 향한 욕망이 반지성주의를 어떻게 더 강화했는지, ‘적폐’와 ‘우리 편’의 이분법적 구도와 팬덤 정치 속에서 지워진 다양한 목소리와 정당화된 혐오, 검증 없는 진실의 선동 등을 밀도 있게 파고든다. ‘메갈리아’를 살펴보면서는 이 시대 새로운 ‘종북 빨갱이’가 된 ‘메갈리아’를 둘러싼 마녀사냥과 좌우 진영을 넘어서 ‘진짜’ 페미니스트를 감별하려는 흐름 속에 나타나는 여성혐오, ‘남혐’과 ‘여혐’이라는 구도를 짜면서 ‘혐오에 혐오로 대항하는 것은 안 된다’는 논리로 여성의 분노를 혐오로 번역하는 방식, 여성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스스로 지성을 퇴보시키는 자칭 ‘진보’의 모습,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르기 위해 ‘나를 설득해봐라’라는 반지성적 태도 등의 주제를 비판적으로 다룬다. 이 세 사건은 200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여러 사건 중 일부다. 하지만 이 사건들을 관통하는 반지성주의와 혐오의 결합은 지금도 반복되는 어떤 패턴이다. 보수 정권은 시민 개인의 자유를 제도적으로 억압하고, 이에 저항하는 ‘진보’ 진영은 그 과정에서 약자를 향한 혐오를 정당화하는 패턴, 보수와 진보라는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 대의를 위해 약자와 소수자의 목소리(가령 노동자와 여성을 비롯한 소수자)는 지워지거나 ‘나중에’ 처리되어야 하는 부차적인 것이 되는 패턴, 내지는 적폐로 상징되는 거대악의 피해자이자 저항의 주체는 남성의 얼굴을 한 채 보편의 위치를 점하고는 페미니즘을 억압하는 패턴. ‘지배하는 피해자’, ‘타락한 저항’의 모습이다. 혐오와 차별이 ‘저항’으로 둔갑하는 모습은 익숙하다. 여기에 ‘취향’과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혐오의 자유’까지 횡행한다. 이 ‘타락한 저항’ 뒤에는 생각하는 인간, 지성, 진지함을 조롱하는 반지성주의의 흐름이 존재한다. 소재가 무엇이든 웃기면 그만이고, 그 웃음이 적절치 않다고 정색하는 건 쿨하지 못하고 솔직하지 못한 ‘프로 불편러’다. 차별은 솔직한 것이고, 차별을 지적하는 건 위선이 된다. 강성노조 때문에 재벌이 해외로 나간다는 발언, 성차별적 언행, 여성정책 토론회에서 졸다가 젠더 폭력이 뭐냐고 물으면서도 그 모름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전 자유한국당 대표 홍준표를 두고 ‘웃기는 시골 영감’ 같은 재미와 솔직함을 찾고 인간적이라고 평가하는 것, 이민자, 여성, 장애인 비하 발언을 쏟아내는 미국 대통령 트럼프를 두고 ‘솔직하다’라고 평가하는 것과 국정농단의 주범인 박근혜 전 대통령을 조롱하며 2016년을 ‘병신년’이라고 언급하며 낄낄거리는 태도, 맥락 없는 누드와 출산이라는 소재로 박근혜에 ‘저항’하는 ‘작품’ 사이에 얼마나 큰 거리가 있을까? ‘가짜 뉴스’와 사실의 검증은 나중이고 폭로와 음모론이 난무하는 ‘진보적’ 대안 언론, 소영웅주의에 빠져 타인의 고통보다 발화자인 자신을 앞세워 진실을 선동하는 ‘진보적’ 무비저널리즘과의 거리는 얼마나 멀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