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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해
양세봉 장군 아버지와 김원봉 반민특위와 아버지 1967년 여름 우이동 불행한 인연들 초등학교 입학 문제아 언니들 개미와 베짱이 닮은 사람들 슬픈 노래 아버지의 눈물 만주군 마적단 부인 가마솥의 눈물 운명 타인들 한빛교회 전두환과 군사반란 서울의 봄 도피와 기만 현지처 접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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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유일하게 잘한 일은 내 아이들의 엄마가 된 일이다. 여기까지 나를 끌고 온 것은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내 삶의 반경 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엄마의 불행을 보고 자랐다. 그런 면에서 나의 아이들은 불운했다. 표현은 안했지만 항상 가슴에 무거운 돌을 얹어놓은 듯 답답하고 깊은 죄의식에 시달리며 살았다.
그럴수록 아이들이 맞닥뜨릴 세상에서 상처가 덜 나도록 강하고 엄격하게 키웠다. 그것이 내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 난 그들에게 닥칠 상처만 생각하느라 사랑할 시간들을 놓쳐버렸다. --- p.15 며칠 후, 김구 선생은 아버지를 다시 찾았다. 김구 선생은 ‘양세봉 장군이 전사한 마당에 조선혁명군으로 돌아가는 것은 의미가 없으니 중국 군관학교에 입학하는 것이 어떠냐’며 아버지의 의견을 물었다. 아버지도 군관학교에서 정식으로 교육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기쁘고 고맙게 받아들였다. 그렇게 아버지는 장개석 휘하의 중국 군관학교에 들어갔다. 1937년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장개석 부대의 중국 국민군 소위로 입대했다. 아버지는 해방이 될 때까지 중국군의 일원으로 수많은 항일전에 참가했다. 1945년 광복이 됐을 때, 아버지는 중국 국민군 구국군 독립 제1사단 사단장인 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아버지 나이 31세였다. 혈기 왕성한 젊은 장군이었다. --- p.47 봄과 가을에는 소풍이 있었지만 난 소풍을 간 적이 없었다. 소풍을 가려면 배낭을 메고 김밥을 싸야 했다. 엄마에게는 김밥을 싸줄 정신도, 배낭을 사줄 여유는 더더욱 없었다. 책가방을 들고 소풍을 갈 수는 없었다. 수업시간과 달리 소풍을 가는 날에는 결석을 해도 선생님이 야단치지 않았다. 소풍 가는 날은 나에게 공식적으로 노는 날이었다. 엄마는 삼립 팥빵을 사주며 나를 달랬다. 난 삼립 크림빵이 먹고 싶었지만 엄마는 언제나 엄마가 좋아하는 팥빵만 사왔다. 지금은 나도 엄마와 같이 팥빵을 좋아한다. --- p.186 시댁의 집은 결국 경매에 넘어갔다. 집을 산 사람은 시어머니와 큰아들에게 월세 단칸방을 얻을 돈을 주어 이사시켰다. 나는 그 뒤에도 일정 기간 시어머니와 오빠의 생활비를 댔다. 그건 오빠와 모두를 기만한 내 마음이었다. 그나마 기생집다운 기생집을 찾아가려고 집을 나선 순간부터 나는 오빠와도, 내 자신과도 헤어질 결심을 했다. 이듬해 1월 5일, 나는 아이들 아빠를 만나면서 국어선생님이 말한 그나마 기생집다운 기생집의 생활을 그만두게 됐다. 그리고 내 인생도 빗장을 걸었다. 더 이상 나는 없었다. --- p.381 20년 동안 가슴에 현지처란 주홍글씨를 가슴에 못질하고 살았다. 아이들 아빠와는 45살 차이다. 그는 하루에 한 번씩 매일 일본에서 전화를 했다. 언제 전화가 올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처럼 무선전화나 핸드폰이 있던 시대가 아니었다. 전화를 기다리느라 화장실에도 제대로 갈 수 없었다. 아이들 아빠가 얻어준 월세 집은 그대로 감옥이었다. 샤워를 하다가도 전화벨 소리를 듣고 받으려고 뛰쳐나오곤 했다. 그러다가 미끄러져 손목에 골절이 온 적도 있었다. 어쩌다 전화를 받지 못한 날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혹시 ‘날 의심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걱정에 하루종일 아무 것도 먹지 못했다. 그런 날은 날밤을 새웠다. --- p.389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내 이름과 아이들 이름이 올라간 호적을 들고 일본 공항에서 출국 수속을 끝냈다. 내 손에 들린 호적은 20년동안 낙인 찍힌 현지처란 부끄러운 옷을 벗어버릴 수 있는 허가장이었다. 내겐 독립문서였다. 공항 로비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무심히 창밖을 쳐다보았다. 내가 탈 비행기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비행기에 선명하게 그려진 태극기를 본 순간, 내 의지와 상관없이 후두둑 눈물이 떨어졌다. 당황했다. 난 전혀 울 생각도 마음도 없었다. 태극기를 보고 울만큼 나라가 나에게 살뜰했던가. --- p.39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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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독립군 장군의 딸이 일본인의 현지처로 살아온 삶을 담담하게 고백하는 자전소설이다. 감당하기 어려운 운명에 굴하지 않고 치열하게 살아온 작가의 삶과 그 배경으로 드러나는 한국현대사는 우리들의 지난날을 뒤돌아보게 한다.
조선혁명군 총사령관을 지낸 양세봉 장군과 김원봉 선생, 김구 선생 등을 도와 독립운동을 한 작가의 아버지는 해방 직전에는 중국 국민군 소장으로 사단장을 지냈다. 해방 후에는 친일파들을 조사하는 반민특위 탐정위원장으로 활동하였지만 반민특위의 졸속 해체 등 대통령 이승만의 노선에 크게 실망하여 야인의 삶을 살았다. 아버지는 이승만에 대한 분노를 술로 달래며 고단한 삶을 살았지만 갈 곳을 찾지 못한 분노는 때때로 가족들에게 퍼부어졌고 그 화를 마주해야 하는 가족들의 삶 역시 각자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찼다. 작가는 아버지의 거친 분노와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기만을 꿈꾸었다. 지친 심신을 누일 수 있는 방이 필요했던 작가는 이른 나이에 결혼을 선택하였지만 남편은 유신독재정권의 고문으로 정신분열의 병을 앓고 있음을 결혼 후에야 알았다. 그리고 끼니를 이을 쌀 한 톨, 연탄 한 장 살 돈도 없는 신혼생활이 기다리고 있음도 미처 알지 못하였다. 심신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는 남편과 자신만 바라보는 시댁 식구들을 위하여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어야 했던 작가는 스스로 고급요정을 찾아가 취업을 하였다. 그리고 몇 달 뒤, 그곳에서 만난 아버지 또래의 일본인 기업가의 현지처가 되어 그와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이를 키우며 살았다. 이후 오랜 기간의 노력을 통하여 법적 부부의 자격을 찾기까지의 과정을 통하여 우리는 다양한 인연과 관계 맺으며 살아가는 삶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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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펴낸 책은 독립투사의 딸로 태어나 일본인 현지처와 미혼모의 운명을 살았던 운명과 치열하게 맞선 한 여인의 자전적 소설이다. 아픈 삶의 기록에 독립투사의 딸이라는 정체성과 올곧은 역사의식까지 담았다. 산업화와 유신독재시대에 유년과 젊음을 살았기에 한 시대를 증언하는 한 폭의 사실적 풍경화 같기도 하다. 이 책은 운명적인 삶의 고통에 굴하지 않고 온몸으로 싸안으려는 처절한 투쟁의 기록이다. 글쓰기를 통하여 자신의 과거와 맞선 것은 해원의 살풀이에 값한다. 이 해원의 힘든 투쟁이 독자들을 만나 상생의 과정으로 거듭나기를 고대한다. - 김성렬 (대진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명예교수. 문학평론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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