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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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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 방금 물러가고 난 어설픈 자리에 아직 봄빛이 살오르지 못한 삼월 초생.
늦은 아침 산보객들의 그림자까지도 드물어진 계동 중앙학교 뒷산 송림의 베어낸 소나무 등걸에 우두커니 걸터앉아 있는 영호는 무엇인지 안타까이 기다리는 눈으로 헤어져 가는 산보객을 두루 여살펴보고 있다. 차차 분명해지는 햇발이 솔잎 사이로 비쳐 들어온다. 비치는 햇빛이 반갑다고 높다란 소나무 가지에서 솔새가 가느다랗게 재재거린다. 무거운 침묵에 잠긴 대궐 뒤꼍에서는 아침거리를 찾는 솔개미가 한 마리 삐 뾰로로 울면서 공중을 두루 날고 있다. 중앙학교에서는 학생이 점점 모여드는지 웅성거리는 소리가 차차 요란해간다. 마침내 땡땡땡 종소리가 울린다. 종소리에 정신이 드는 듯이 영호는 앉았던 소나무 등걸에서 벌떡 일어섰다. 일어서면서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엣, 무어 일거리가 좀 생겼으면 그저 시뻘건 피가 흐르는 사건. 콱 부딪쳐 눈에서 불이 번쩍 나는 큰 사건이라도 하나 생겼으면 엣, 괜히 쓸데없는 생각에 사람이 침울해져서!" 미상불 무얼로 보나 영호는 침울한 일이 없는 사람이다. 우선 천석거리나 되는 유산을 물려받아 그것을 착실한 사음(舍音)에게 맡겨두고 그 수입으로 생활을 하는 터요, 또 그의 인생관이나 관념이 낙천적이며 건실한지라 그 방면으로부터 갑자기 번뇌로운 변화와 타격이 생겼을 리는 없는 것이다. 나이도 스물일곱이니까 이십 안팎의 청소년에게서 보는 막연한 번민도 없을 것이다. 아직 결혼도 아니 했고 양친도 다 돌아갔으니 아무런 가정적 계루도 없다. 보통학교로부터 중학교 대학까지 정규로 마치었고, 스포츠에는 무엇에나 능하지만 그중에도 유도와 철봉과 권투에는 전문적 기능이 있다. 서적은 대개 과학서류를 보고 평소에 하는 일은 응용화학과 전기에 관하여(그의 집에는 그 방면의 전문가도 부러워할 만한 실험실이 완비되어 있다) 연구를 하고 있다. 사람이 생김새도 싱겁게 크다거나 잔망스럽게 작지 아니하여 좋은 체격이요, 타고난 천성이 쾌활하여 까스럽지 아니하여 누구에게나 호감을 받고 있다. 어느 외딸을 둔 과부·마나님이 있다면 사윗감으로 침을 삼킬 만한 좋은 청년이다. 이러한 그이니 무엇으로 보나 오뇌와 수심이 생길 리가 없을 터인데, 요새 며칠은 그가 혼자 있을 때면 아주 알아보게 우울하여진 것이다. 물론 그새 해내려오던 일상생활은 변화가 없다. --- “염마”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