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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내며 _ 이택광
1부 임박한 파국, 어떻게 맞설 것인가 _ 홍세화와의 인터뷰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는 이혼단계이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쌍둥이 형제 이야기 모든 것은 노스탤지어다 기회를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희망이란 모든 가능성들에 열려있는 순간 2부 지금, 여기, 무엇을 할 것인가 _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 강연 함축적인 거짓말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미신의 이념적 구조 이데올로기의 새로운 침투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는가 해결책보다는 문제의 발견을 3부 청중과의 대화 _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 원하는 것과 욕망하는 것 오래된 미래 스타벅스 철학자란 비판에 대하여 4부 일하는 사람들의 공동선을 위한 소명 _ 건국대학교 새천년기념관 강연 신이 있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언어는 존재의 고문실 자연의 종말 우리가 안다는 것을 모르는 것들 철학이 답할 때 5부 청중과의 대화 _ 건국대학교 새천년기념관 욕망하는 것을 원하는 순간 존재하는 모든 폭력을 보라 역사의 광기에 대하여 의심하고 사유하라 6부 지젝 서울 드로잉 _임민욱 7부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_ 임민욱과의 인터뷰 당신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 좋은 이기주의를 실천한다는 것 선택은 할 수 없을 때 비로소 선택하는 것 에필로그 _ 이택광의 지젝견문록 |
Slavoj Zizek
Hong Se-hwa,ホンセファ,洪世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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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특유의 방대한 지식 앞에서 난해함으로 쩔쩔 매며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던, 풍문에 가려져 올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던, 지젝의 진면목과 그의 철학이 담고 있는 내용의 실체를 만날 수 있는 전례 없이 소중한 텍스트! 슬라보예 지젝이 한국을 찾아왔다. 그가 머무는 일주일 동안 트위터를 비롯한 인터넷과 언론 매체는그와 그의 방한에 대한 이야기로 후끈 달아올랐다. ‘지젝이 뭔데?’ ‘니가 지젝을 알아?’ ‘지젝이 별 거냐?’ …… 등등. 그에 대한 촌평과 직설들은 찬사와 악담 사이를 뛰어다니며 끝도 없이 이어졌다. 이숱한 설왕설래들이 아침 안개처럼 걷히고 난 지금, 이제는 제대로 물어야 할 때가 되었다. 아무런 의미 있는 내용을 갖지 못하는 인상비평을 넘어, 그가 우리와 어떻게 만나려 했고 어떤 대화를 나누고싶어 했는지, 어떤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려 했고 스스로의 생각을 어떻게 제시했는지 그 내용적인 실체를 분명히 할 때가 된 것이다. 그는 우리와 사도-마조히즘sado-masochism을 즐기고 싶었던 것일까? 오늘날 교양인을 자처하는 사람치고 자본주의의 위기니 생태계 위기니 하는 것들에 대해 심각한 표정을 짓거나 한마디씩 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위기의 본질이 우리가 예상치 못한 곳에 존재한다면? 우리가 선택한 ‘정치적 올바름’이 심각히 뒤틀린 것이라면? 그것이 바로 자본이 요청하는 딱 그만큼의 민주 시민적 교양이라면? 그래서 우리가 고상하다고 여겨 실천하려는 생태친화적이고 윤리적 삶이 체제를 유지시키고 재생산하는 데 기여하는 우스꽝스런 결과를 낳는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자본주의적 향락과 이기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이야기하는 공동선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산다는 의식이 얼마나 허구로 가득 찬 것인지, 지젝의 입에선 기대를 배반하는 말들이거침없이 튀어나온다. 현실 사회주의만이 아니라 오늘의 자본주의가 ‘착한 이기주의’를 억누르고 왜곡시킨 결과라는 답변 앞에서 우리의 예상은 다시 한 번 빗나간다. 지젝이 ‘위험한 철학자’라고? 다가온 파국을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는 우리야말로 지금, 위험하다! 이제 이 텍스트와 우리의 인식이 만나 대결을 해야 할 차례. 체제의 이데올로기를 넘어 우리는 이 세계와 인간의 미래를 처음부터 다시 고민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지식의 최전선을 이끄는 지젝, 오늘의 세계가 안고 있는 첨예한 주제들로 사람들을 단숨에 끌어당기는 그의 열정적 수다가 지배했던 서울의 강연장, 이제 그곳으로 여러분을 다시 초대한다! 지젝의 방한은 여느 지식계의 슈퍼스타나 베스트셀러 저자와 확연히 달랐다. 자신의 책 내용을 소개하거나 그에 부합하는 배경이 될 만한 부수적 퍼포먼스에 그는 도무지 관심이 없었다. 지난해(2011)월가 점령 시위 현장인 주코티 공원을 찾아가 “카니발은 싸게 먹힌다”며 “구질서를 대체하는 신질서를 위한 확실한 계획 없이 주인에 대한 히스테리성 도발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한, 그 시위는 새로운주인을 요구하는 차원에서 효과적으로 기능할 것이다”는 말로 그곳에 모인 시위군중의 통념을 흔들어대던 지젝을 다시 떠올려볼 필요가 있다. 그는 내심 처음부터 한국의 우리가 지니고 있을지 모르는 통념(그가 이데올로기라고 명명한)을 여지없이 뒤흔들 도발을 기획한 듯 끊임없는 질문으로 청중을 몰아세웠다. 그것은 우리가 ‘안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나 ‘모른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의 차원을 넘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 그리고 ‘모른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것’을 곧장 겨냥한 것이었다. 먼저, 첫 번째 대담에 대해서 ‘위험한 철학자’ 지젝과 실천적 지식인 홍세화가 만났다. 슬로베니아와 한국이라는 변방 출신의 두 사람은 1980년대의 파리라는 같은 공간 속에 있었다. 한 사람은 정신분석학을 연구했고, 한 사람은 택시운전을 했다. 그러다가 주류에서 박사논문 출판을 거절당한 지젝은 좌절하여 고향인 슬로베니아로,홍세화는 20여년이 넘는 망명생활 끝에 한국으로 돌아간다. 과연 이 둘을 대화 속에서 연결하며 공동의 인식으로 이끄는 무엇이었을까? 둘은 우선 전 세계를 동요시키는 금융자본주의 체제의 위기상황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미국과 유럽,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는 연결되고 있고 파국의 연쇄 고리로 얽혀 있다. 이 위기에서 벗어날 대안은 있는가? 자본과 주류권력은 물론이고, 이미 형해화된 자유민주주의적 정치체제에 매달리는 자유주의 정치 세력들은 이 파국의 공모자가 되어 있다. 그러면 좌파는? 기존의 좌파는 과거 좋았던 시절에 대한 노스탤지어 속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일 뿐이다. 이들은 자본주의체제를 유지시키는 본질적 모순으로서의 배제와 적대의 장벽들 앞에서 철저히 침묵할 뿐 아니라 스스로 ‘포함된 자들’의 경계 안에 숨어 자본이 ‘배제된 자들’에게 가하는 항시적인 폭력으로부터 눈을 돌린다. 신자유주의 질서의 동맹자가 되어버린 유럽의 68혁명의 주체들과 ‘민주화 이후’ 퇴행을 거듭하는 1987년 6월 항쟁의 주역들이 똑같이실패해온 까닭이다. 그렇다면 더 나은 세계를 향한 정치적 실천은 불가능의 영역으로 사라진 것일까? 그리스 총선에서의시리자당의 약진, 이집트 민중의 반란에 이르기까지 희망의 징후들이 속출하는 현장에서 진정한 좌파가 어떤 질문을 던지고 어떤 태도로 개입할 것인가? 기존의 이데올로기가 제공하는 손쉬운 해결책이 아닌, 문제의 근원을 드러내는 질문과 실천의 가능성이 대화의 과정 속에서 모색되고 있다. 두 번의 특별한 강의에 대해서 서울에서 이루어진 지젝의 두 번의 강의에 ‘특별한’ 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수천에 이르는 청중 때문도 시종일관 청중을 몰입시키는 그의 유쾌하고도 독특한 화술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이 두 번의 강연으로 그는 자신이 축적해온 철학적 사유의 정수를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이 사유와 현실과 어떻게 만나는지를 보여주는 놀라운 합치의 경험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지젝의 글과 말은 사람들을 결코 지루하게 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가 끌어다대는 ‘농담’에서 기인하는 탓이기도 한데, 그럼에도 농담으로 시작하여 농담으로 끝을 맺은 이번 두 차례의 강의를 접한 누구도 그를 단지 농담을 잘하는 철학자로 기억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농담은 주의환기용이 아니라 세계의 모순과 본질을 드러내는 무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농담은 자본주의체제가 가리고 싶어 하는 치명적 급소를 겨냥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때로는 유머스런 외양을 띠고 또 때로는 향락을 부추기기도 하지만, 실은 기율과 억압의 체제를 본질로 한다. 그것은 착취당하고 배제당하는 자가 결코 웃을 수 없는 현실적 고통의 실재 때문이기도 하지만 반드시 그 때문만은 아니다. 오로지 자유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의 이면에도 체제를 닮은 기율이 작동하는 예를 지젝은 우리 앞에 무수히 나열해놓는다. 자본주의체제에서 웃거나 자유로울 수 있는 자는 자본을 독점한 자이다. 그는 ‘보여지지 않고도 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타자와 세계를 향해 웃을 수 있다. 그러나 ‘볼 수는 없고 보여지기만 하는’ 존재들은 웃을 수 없다. 불안을 감추기 위한 공허한 웃음을 짓거나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장된 엄숙함에 빠진다. 지젝의 농담은 이 체제의 감춰진 장막을 순식간에 드러내고 역전시킨다. 순식간에 자신의 벌거벗은 실체가 드러난 자본은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전락하고, 가려져있던 세계의 본질을 발견한 ‘보여지기만 하던’ 존재들은 비로소 웃음을 터뜨릴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여기서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의 내면이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는 한 우리는 체제의 본질을 볼 수도, 이 모순된 세계를 변화시킬 수도없다. 다시 말해 우리는 무엇이 진정한 문제 상황인지, 무엇이 문제를 드러내고 해결하는 올바른 방법인지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 계속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며 자신이 굶주리는 아프리카 어린이를 돕는다고 착각하는 우리의 자화상은 그것의 단편적인 한 예에 불과하다. 또 하나의 대담에 대하여 이 책 『임박한 파국』의 마지막에 자리 잡은 지젝-임민욱 대담은 편집자가 독자에게 권하는 책 중의 백미이다. 세계적 철학자 지젝과 사십대 설치미술가 사이에 이루어진 뜨거운 긴장과 생동감 있는 대화도 그렇거니와 ‘서울의 지젝’을 그려내는 임민욱의 「지젝 서울 드로잉」은 가히 지젝의 실체를 찔러보고 만져볼 수 있게 하는 탁월한 문학적 성취가 아닐 수 없다. 그녀와 지젝의 대담이 이루어진 곳은 바로 대한문 그 쌍용자동차 분향소에서였다. 이곳에서, “당신이 아프면 나도 아프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들의 대화는 놀랍게도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정치적’이다. 진정한 자기애와 자살은 결코 만날 수 없는 대척점에 있는 것인가? 오로지 자본만이 이 거리를 순식간에 무너뜨려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권능을 지닌 것인가? 예술은, 정치는 이 현실 앞에 언제까지 무기력해야 하는가? 임민욱이라는 예술가가 던지는 질문은 지젝의 숱한 질문과 만나면서 이 책의 정점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마지막으로 지젝의 이번 서울 방문을 기획한 영문학자이자 문화비평가 이택광 교수의 여는 글과 「지젝견문록」의 가치야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책은 그가 기획하고, 우리는 단지 기록에 충실했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