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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01년 12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311쪽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82810770
ISBN10 8982810773

중고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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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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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휴일이란 빨간 날이 아니라 노래를 부르는 날이다, 춤을 추는 날이다, 아무 걱정도 없이 태양을 바라보는 날이다, 사랑하는 여자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잠드는 날이다, 취하지 않을 정도로 술을 마셔도 되는 날이다, 그리하여 술맛을 느끼며 술을 마실 수 있는 날이다, 사람들이 그의 말을 귀기울여 들어주는 날이다, 그런 나날들이다. (137쪽)

하지만 엄마, 너무 늦었어요. 세상일이란 언제나 너무 늦거나 너무 빨라요. 엄마는 너무 빨리 집을 나갔고 너무 늦게 찾아왔어요. 아버지는 너무 늦게 죽었고 너무 빨리 절 버렸어요. 그때의 그 오토바이는 너무 빨랐는데 전 그걸 너무 늦게 알았구요. 그때의 그 염소는 너무 느렸는데 총알은 너무 빨랐어요. 세상일이란 다 그래요. 그러니 그만 가세요. (141쪽)

기껏 지옥에서 받는 벌이라는 게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거라면서요? 그런 건 여기서도 얼마든지 하는 일이지 않아요? 그건 이 땅의 여자들이 낮이나 밤이나 하는 일이에요. 그리고 전 어릴 때부터 이왕 죽을 거면 멋지게 죽고 싶었어요. 차를 운전하다가도 젋벽이 있는 커브길이면 늘 핸들을 거꾸로 돌려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어요.. (246쪽)
--- p.137,141,246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마지막 순간에 돌아선 모양이다. 만약 그녀에게 정말로 삐삐를 주었더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어쨌든 일상은 지루하지만 상상은 멋지다.
--- p. 44
비둘기를 끔찍이도 무서워하는 여자를 당신은 알고 있다. 비둘기말고는 그 어느 것도 무서워하지 않는 여자. 당신이 그 여자에게 매혹될 무렵,한강변과 남산에서 비둘기들이 떼죽음을 당했다는 기사가 여러 신문에 깔렸다.
--- p.53 -'도드리'중에서
나는 남자들이 어떻게 자위를 하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가 너무도 자신있게 말하고 있기 때문에 수긍하기로 한다. 이 남자는 언제나 이렇다. 어떤 말이든 주저함이 없다. 모든 언어가 그에겐 이미 준비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머뭇거림이나 에둘러 말하기 따위는 없다. 그래서 그의 이야기를 듣는건 마치 영화를 보거나 소설을 읽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고 보니 문득 그가 낯설게 느껴진다. 그가 언제부터 내 방에 들어서게 된걸까. 언제부터 저토록 자연스럽게 내 침대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누워 있게 된걸까? 그렇다. 도마뱀 때문이다. 나는 고개를 돌려 하얗게 칠해진 벽을 바라본다. 아무것도 없는 벽에 도마뱀 한 마리가 덩그러니 걸려 있다. 무슨 생각 해? 그가 고개를 돌린 나를 건드린다. 나는 도마뱀에게서 시선을 거둔다.
--- p.9
그때 가까이서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교각 사이로 널려 있는 철근을 밟으며 누군가 오고 있었다. 그녀와 나는 모든 동작을 멈추고 이들이 우리에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지나치기를 기다렸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자 그들은 반대편으로 사라져갔다. 다시 그녀의 입술을 탐하려 했을 때 그녀는 별안간 트렁크 안쪽의 고리를 잡아당겨 트렁크 덮개를 쾅하고 덮어버렸다. 안 돼! 내가 소리쳤지만 이미 늦었다. 트렁크는 닫히고 절대의 어둠이 우리 사이에 끼여들었다. 병신 같으니! 팔을 뻗어봤지만 헛수고였다. 어둠 속에서 그녀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해요. 난 단지. 단지 뭐? 내 다그침에 그녀는 중얼거렸다. 사람들이 또 올까봐.

우리 둘은 희극적이면서 비극적이었으며, 가장 가까워졌고 가장 멀어졌으며, 구멍을 채웠으되 구멍 밖으로 나갈 수 없게 되었다. 좀 더 따뜻하고 안전하고 자극적으로 섹스를 해보겠다는 유치한 담합이 빚어낸 이 결과에 대해 누가 누구를 책망할 것인지부터가 막막했다. 우리는 갇혔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건 점점 더 확실한 사실로 변해갔다. 발과 손, 몸으로 밀어보았지만 한때 고급차였을 이 승용차의 트렁크 덮개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우린 더 이상의 노력을 포기하고 웅크린 상태로 침잠해 있었다.

그렇게 약 10분쯤 지났을까. 그녀가 문득 손을 뻗어 내 성기를 다시 만지기 시작했다. 뭐 하는 거야?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내가 자위할 때 하는 동작으로 내 성기를 위아래로 마찰시키기 시작했다. 그만해. 내가 차갑게 내뱉자 그녀가 수줍은 소녀처럼 말했다. 미안해서요.
--- p.255-256
거문고는 수묵화야. 선배가 말한다. 수묵화 중에서도 남종화에 가깝지. 소리보다 침묵이 더 아름다운 악기이기도 하고. 여백의 미를 감추고 있다고 할까. 한 음 뜯고 난 후 그 다음 음미 나올 때까지의 침묵을 즐길 줄 알면 거문고는 다한 거라지. 반면에 가야금은 지나치게 음이 많고 자잘해. 대금이나 해금 같은 관악기는 음이 끊이질 않고. 그래서 거문고를 선비의 악기라고 하는 거겠지.
그때의 당신은 알지 못했다. 음과 음 사이의 간극이 얼마나 깊고 넓은 것인지, 그 간극을 감당하는 자만이 인생의 여백에 시라도 한 수 적어넣을 수 있다는 것을, 당신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인생 자체가 하나의 간극임을, 그때는 정녕 알지 못했다.
--- p. 58~59, <도드리> 중에서
4.19 세대가 자신들의 젊은 시절에 대하여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것과는 달리, 80년대 후반 학번들에게 있어서 그들의 젊은 시절이란 자괴감의 시대가 아닐까. 그곳에는 저항의 낭만성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대목들이 있다.

이러한 자의식이 '90년대'라는 말로 대변되는 시대의 문턱을 넘어서면서 또는 넘어서기 위해 근본적으로 아이로니컬한 면모로 나타나게 된 것도 사실이다. 두 가지 점에서 그러하다. 하나는, 자본주의 논리를 알고 있는 상태에서 스스로를 자본주의 사회에 편입시킨다는 것이 가장 문제였던 것. 다른 하나는, 80년대적인 체험과 자본주의에 대한 자의식이 삶의 알리바이가 되어 자본주의를 보다 효율적으로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생활감각과 도덕감정이 교차하는 지점, 이를 두고 문턱의 세대감각이라고 할 수 있다면, 문학에서의 문제는 그 세대들이 시대의 문턱을 넘어서는 방식과, 문턱의 감각을 숨기고 드러내는 방식에 대한 물음으로 요약될 것이다. (pp. 277-278 작품 해설 '김영하, 또는 배신의 수사학')
---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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