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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치유하는 부엌

나를 치유하는 부엌

: 삶의 허기를 채우는 평범한 식탁 위 따뜻한 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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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06월 14일
쪽수, 무게, 크기 256쪽 | 422g | 148*210*20mm
ISBN13 9791189797096
ISBN10 11897970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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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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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이 흐른 어느 날, 나는 상복을 입은 상주가 되어 있었다. 내 나이 서른. 스물다섯에 처음 장례식장에 발을 들인 후 불과 다섯 해 만에 입장이 뒤바뀌어 아버지를 추억하러 발걸음한 이들에게 육개장을 대접하게 되었다. 준비한 적 없는 아버지와의 이별, 상주라는 역할이 가져온 갑작스러운 혼란과 충격적인 상실감 앞에 나와 엄마는 식욕이라는 것을 잃은 상태였다. 외삼촌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망연자실한 우리를 식당으로 데려가 억지로 육개장을 내밀었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라며. ‘산 사람은 살아야지.’ 이 말에 적잖은 반감을 느꼈다.
---「양가감정_ 장례식장 육개장 한 그릇」중에서

이런 날들이 계속되면서 자존감은 바닥을 향해 달려갔다. 다른 사람들은 주어진 일도 빠릿빠릿하게 해내는데 나는 왜 이리 일머리가 없는 걸까. 동기는 컴퓨터 프로그램도 능숙하게 다루는데 나는 왜 고작 복사기 하나도 작동을 못해 종이들이 자꾸 구겨져 나오는 걸까. 똑똑한 사람들 사이에서 나 혼자 바보가 된 것 같아 외로웠다. 스스로에게 실망할 때마다 신입사원에게 가장 필요한 ‘열정’과 ‘패기’가 바닥으로 떨어진 자존감에 눌려 좀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주눅의 날들이었다. 정작 제대로 한 일은 없는데 몸과 마음은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면 나는 때때로 부엌으로 향했다. 모든 게 내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어설픈 사회인의 삶에서 요리는 내 마음을 달래주고 위안을 주는 도피처였다.
---「자존감_ 콩자반으로 치유한 미생의 하루」중에서

과연 엄마가 마련해준 완벽한 환경에서 철저한 교육을 받으며 자란 아이는 행복하고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해 독립할 수 있을까? 영국의 소아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였던 도널드 위니코트는 좋은 엄마란 ‘완벽한 엄마’가 아닌 ‘이만하면 좋은 엄마good-enough mother’라고 말한다. 완전무결한 엄마보다 오히려 조금 부족해도 그리 나쁘지 않은 엄마가 아이에게는 훨씬 더 인간적이고 좋은 엄마로서의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위니코트는 아이가 필요로 하는 것을 미리 마련해주는 것은 좋은 엄마의 역할이 아니라고 말한다. 아이가 스스로 노력해 성취욕을 느끼고 독립적인 개체로 자랄 기회를 박탈하기 때문이다.
- ‘내려놓기_ 완벽한 엄마에서 이만하면 좋은 엄마로」중에서

우리는 나의 선택이 스스로의 이성과 의지의 결과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의 무의식에 이끌려 자신도 모르게 한 행위다. 어떻게든 그때의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선택을 아쉬워하는 후회는 감정 소모에 지나지 않는다. 스피노자는 “후회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두 배로 불행하고 두 배로 무능하다”라고 말했다. 이상하게도 후회와 자책은 우리를 너무 잘 따라다닌다. 후회의 기억은 만족의 기억보다 훨씬 선명해 우리를 더욱 아프게 만든다. 그럴수록 후회를 곱씹으며 스스로를 학대하는 시간도 늘어난다. 선택을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그때 다른 선택을 했다면 지금보다 나아졌을까?’라는 의문을 되풀이하는 것이다. 이 고통스럽고 불편한 의문은 마음의 허기만 더할 뿐이다.
---「후회_ 전쟁과 삼계탕」중에서

고소하고, 달콤하고, 부드러운 빵 냄새도 좋지만 내가 베이킹을 동경한 것은 정확한 계량으로 오차 없이 만들어내는 음식이기 때문이었다. 집밥이나 여러 음식에도 계량화된 요리법이 있지만 만드는 사람의 입맛과 취향에 따라 짠맛, 신맛, 매운맛, 단맛 등을 조절해 얼마든지 변주할 수 있다. 하지만 제과제빵의 생명은 계량이다. 정확한 양과 시간, 온도 등을 따르지 않으면 뻣뻣한 과자, 떡처럼 찐득하게 가라앉은 빵을 먹어야 한다. 이 말은 요리법만 확실하게 따라 하면 실패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사실 신혼 시절의 나는 불안함에 휩싸여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공간에서 함께할 수 있는 설렘도 잠시, 이제부터는 스스로 모든 것을 꾸려가야 한다는 불안감이 마음 한구석에 자리를 차지했다. 남편과의 장밋빛 미래를 꿈꾸면서도 왜인지 원인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끼곤 했다.
---「불안_ 인생에도 베이킹처럼 공식이 있다면」중에서

러셀은 이러한 악순환은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권태에 의한 것이며, 그러한 형태의 권태는 활기찬 행동이 없는 곳에서 자라난다고 말한다. 우리는 인생에서 권태감을 느끼는 시절을 이야기할 때면 대부분 권태의 부정적인 부분을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버트런드 러셀은 동전의 양면처럼 부정적이지만은 않은 권태의 긍정적인 측면을 보다 부각시켰다. ‘행복한 인생이란 대부분 조용한 인생’이라는 그의 말처럼, 삶에서 권태감이 찾아왔다는 것은 자극 없이 지루하기만 한 일상이 이어진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어쩌면 아무런 사고 없이 행복한 삶이 지속됨을 반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권태_ 삶을 충만케 하는 권태, 밥과 김치」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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