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동안 수많은 애독자들로부터 끊임없이 받았던 질문을 열 가지로 나누어 대답하는 형식으로 이 완결판의 서문을 대신하고자 한다.
질문 1, '팡세'나 '아포리즘'이라는 말에 대해 설명해 달라.
'팡세(pensee)'나 '아포리즘(aphorism)'은 공식적인 문학 용어는 아니로되 문학인들이 즐겨 쓴다. '팡세'는 '명상', '명상록'의 의미지만 대문자로 표기될 때는 저 유명한 파스칼의 '팡세'를 지칭하는 고유명사다. '아포리즘'도 일반적으로 '격언', '금언'과 같은 뜻의 어휘인데, 문학에서는 특히 경구적인 수사 문맥을 일컫기도 한다.
나는 아포리즘을 '천재들의 화법(話法)'이라 명명한 바 있고, 이 '사랑의 팡세'가 한국 문단에 아포리즘 문학의 개척자적 효율성을 제공했다는 자부심을 갖고 있다.
질문 2, 얼마나 많은 사랑의 경험이 있기에 이처럼 다채로운 내용을 썼는가?
'사랑의 팡세' 독자가 던지는 첫 번째 공통 질문이다. 바꿔 말하면, 너는 '플레이보이'가 아니겠느냐는 것이겠다. 그러나 대답은 너무 실망스럽다. 물론 내게도 첫사랑으로부터 시작되는 러브스토리가 있다. 하지만 창작은 체험이 아니라 상상의 산물이라는 예술의 진리를 잊지 말아야 한다.
질문 3, 그렇다면 이 많은 분량의 아포리즘을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나?
시를 쓴답시고 껍적대던 사춘기 때 나는 첫 연정의 열병을 앓고 있었다. 그때 작은누이가 소월의 시집 '진달래꽃'을 사주었는데, 나는 밤을 세워 읽고 또 읽었다. 그 감동이라니! 그 이후의 어떤 독서도 그때의 감동에는 이르지 못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진달래꽃'에는 내가 하소연하고 싶은 감정들이 빼곡이 들어차 있었다. 그것은 한 마디로 사랑의 슬픔이었다. 나는 시집 내면지에 독후감을 한 문장으로 남겼다.
"나는 가을하늘과 같은 슬픈 사랑을 생각한다." ― September 9, 1957.
이것이 나의 최초의 사랑의 아포리즘이다. 45년 전 소년처럼 나는 지금도 '슬픈 사랑'을 생각하고 있다.
질문 4, '사랑의 팡세'에는 남녀에 관한 부분이 가장 많다. 그리고 특히 심리 묘사에 뛰어난데, 이에는 어떤 배경이 있는가?
사랑은 이성간의 정서이니까, 남자와 여자에 관한 이야기가 많은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심리 묘사에 대해서는 인간에 대한 관심의 결과라고 생각하며, 대학 시절부터 줄곧 탐독해 온 프로이드 중심의 정신분석 분야의 책이나 신화류의 독서의 열풍이 컸다고 생각한다.
질문 5, 때로는 남녀 문제에서 가부장적 선입견이 발견되곤 한다. 신세대 여성들에게 어떻게 말하겠는가?
나는 스스로 정서의 보수주의자임을 자처하곤 한다. 세태가 아무리 변해도 사물의 본질은 불변이라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남녀 문제에 있어서도 그 인간적 동등성은 재론할 필요조차 없지만, 생태적·정서적 차이점은 중요하다고 본다. 그 특성을 부각시키다 보니 남성 중심적인 문맥들이 드러나는지는 몰라도, 어떤 목적 의식에 의해 의도적으로 여성을 폄하한 일은 절대로 없다.
질문 6, '사랑'을 주제로 집요하게 써낸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가?
물론 있다. '사랑'이 인간의 모든 행위, 즉 종교, 예술, 철학, 인생 등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라는 사실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남녀간의 애정은 감정의 꽃으로서 인간의 삶을 주도한다. 이렇듯 중요한 테마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데까지 깊이 파고 들어가 보고 싶은 충동이 있었다. 사랑은 누구의 전유물이 될 수는 없지만 나는 세계시인 중에서 가장 많은 사랑의 아포리즘을 써낸 시인이 되고 싶었다.
질문 7, '사랑의 팡세'는 번역서와 같은 느낌을 준다. 그 까닭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정감 어린 한국어의 구어체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이지적이고 간결한 아포리즘의 문체가 이질감을 느끼게 했을 가능성도 있다. 사실 평소에도 나의 시는 번역시 같다는 말을 듣기도 한다. 영미 문학에 심취했던 영향일 수도 있겠다. 결과적으로는 아포리즘 문체의 특성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질문 8, '사랑의 팡세'에 얽힌 에피소드는 없는가?
가장 인상에 남는 일은 중국의 조선족 대학생들이 팬클럽을 만들고, '사랑의 팡세'를 성서처럼 암송해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 중 몇몇 독자들과는 만나서 대화의 시간도 가졌었다. 그리고 사회주의 국가에서 '사랑'이라는 주제가 더 흡인력이 있음을 확인했다. 사실인지 알 길은 없지만, 김정일 위원장도 애독자라는 전언을 듣기도 했다. 또한 사랑의 파국을 맞은 사람들로부터 진지한 애정 상담을 요청받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응했다.
질문 9, 독자들에게 특별히 기대하거나 당부할 말이 있는가?
나는 이 책을 소녀적인 감상으로 쓴 것이 아니다. 우리나라 문인들은 사랑이라고 하면 으레 통속적인 대중문학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데, 이는 아주 잘못된 문학 태도다. 사랑에는 삶과 죽음, 고뇌와 희열, 영혼과 육체, 현실과 이상, 고독과 열망, 철학과 심리학 등을 아우르는 신비의 마력이 있고, 인생에서 사랑을 빼놓으면 무의미한 정서의 공백만이 남게 되는 인간 정신의 핵인 것이다. 따라서 시인이 사랑을 노래하지 않는 것은 직무 유기라고 확신한다. '사랑의 팡세'는 제목 그대로 '명상'의 소산, 더 강조하자면 고뇌의 소산이지 유희적인 글 쓰기의 결과물이 아니다. 독자들도 그 고뇌에 동참하는 마음으로 읽어 주었으면 한다.
질문 10, 누구보다도 사랑에 대해서는 오래, 깊이 생각했으니 결론적인 표현으로 사랑을 정리할 수 있는가?
이렇게 많은 아포리즘이 가능했다는 사실 자체가 사랑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겠는가. 사랑은 연령, 성별, 시대, 환경, 개인의 체험에 따라 다면적인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사랑은 관념이 아니라 체험이라는 사실, 결과보다는 과정이라는 상황성, 그리고 정신적 교감의 상대성에서 의미의 깊이가 더해진다고 생각한다.
---<저자 서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