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는 우리를 우주의 지극히 높은 곳으로 인도합니다. 이 세상 위에서, 이 세상 너머에 있는 곳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 세상을 새롭게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장엄한 계획을 바라보게 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시는” 계획 말입니다(1:10). 그리스도가 만유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세상은 결코 깨지거나 부서지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에베소서는 그리스도를 통해 온 인류를 하나 되게 하시려는 이 위대한 계획의 의미를 하나님의 백성이 실제로 살아내라는 강력한 호소를 담고 있습니다. 인종 간의 장벽이 무너지고, 계층 간의 이질감이 녹아지고, 한 주(主)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만유가 통일될 하나님의 새로운 사회를 꿈꾸라는 요청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회가 이미 지상 교회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믿으라고 요구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만유의 통일은 하나님의 선물인 동시에 인간의 사명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영들을 그리스도를 통해 무장해제하시고, 평화의 복음으로 천하를 통일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새로운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평화와 화해의 복음을 들고 먼저 그들끼리 하나 됨을 만방에 보여야 할 사명이 주어졌습니다.---서문: 통일의 복음
에베소의 교인들에게 그들이 당면한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와 권면 및 훈계와 가르침을 주기 전에, 바울은 먼저 영원에 잇대어 시작한 하나님의 장엄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는 송영으로 독자들을 인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먼저 듣고, 그 다음에 그 빛 아래서 우리의 이야기들을 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이야기들은 결국 하나님의 큰 이야기 안에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올바른 전망대입니다. 우주적 스케일의 하나님 이야기가 영원에서 시작하여 영원으로 흘러들어 가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이야기가 그 가운데에서 일어나는 우리의 이야기들을 올바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전망대 역할을 한다는 말입니다.---제1부 2장: 삼위일체 하나님께 드리는 송영
우리는 고단한 삶에 쉽게 지치고, 깨어지기 쉽고, 연약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 우리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삶을 지탱해나갈 ‘힘’(power)입니다. 사람들이 이런 힘을 얻기 위해 얼마나 힘쓰는지 모릅니다. 권력, 지력, 학력, 재력 등이 그런 것들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사람들은 능력(power) 있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러나 힘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power)만이 영원합니다. 그분의 힘만이 우리를 강건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강건해질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영의 임재와 능력을 의존할 때 강건해질 수 있습니다. 달리 말해, 그리스도가 우리의 마음으로 오셔서 사시도록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우리 마음으로 이사 오셔서 우리와 함께 거주하시도록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주시는 영적 에너지를 날마다 공급받고, 그분이 의도하시는 삶의 패턴으로 조형되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적 성숙입니다.
성장과 성숙은 단숨에 일어나지 않습니다. 평생에 걸쳐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끼니를 거르지 않고 식사를 하듯이, 영적 성숙은 매일같이 영적 음식을 먹어야 가능합니다. 이스라엘이 40년 광야 생활에서 ‘일용할 양식’(daily bread)을 먹었던 것처럼, 매일의 양식을 먹어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일용할 양식’은 ‘내일을 위한 오늘의 양식’입니다. 아직도 가야 할 머나먼 순례의 길이 남아 있기에 우리에게는 힘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일용할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참조. 신 8:3) 배워야 할 것입니다.---제1부 7장: 사도 바울의 기도와 송영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입니다(5:1). 예수님이 요단 강에서 세례를 받고 올라오실 때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막 1:11)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였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에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혼란스럽게 흔들어대도 우리의 정체성은 바뀔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입니다. 비록 때로는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탕자처럼 우리에게서 돼지 냄새가 나도, 또한 우리가 아버지의 자녀에게 마땅한 행동을 하지 못했어도, 우리의 정체성은 바뀔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확정하고 선언하신 “너는 내 사랑하는 자녀라”라는 것은 절대 철회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은 고아도 과부도 소외자도 국외자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가족을 이루는 구성원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늘 아버지가 계십니다. 육신의 자녀들이 그들의 아버지를 본받듯이, 신자들 역시 하늘의 아들과 딸로서 그들의 하늘 아버지를 닮고 본받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하늘 아버지를 본받는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종종 성경은 산다는 것을 걷는 행위로 비유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같이 우리도 사랑 안에서 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행(行)하다’는 ‘걷다’를 의미합니다. 즉 사랑 안에서 걸어가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사랑에 진보(進步)가 있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물론 늘 하나님을 완전히 닮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죄도 짓고 실수도 많고 삐뚤빼뚤 걸어가기도 할 것입니다. 그래도 방향만은 잃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해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우리도 그런 사랑을 하는 가치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커다란 방향 말입니다.---제1부 10장: 그리스도인의 정체성
선택은 이야기입니다. 부정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매우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이야기입니다. 선택 이야기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의도적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은 버리시고(유기) 매우 적은 수의 사람들만 택하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한 사람들이 그들만의 리그를 결성한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선택은 하나님이 어떻게 어떤 특정한 사람들을 선택하여 저주 아래 살고 있는 사람들을 축복하게 하시는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분이 선택하신 사람들을 통해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을 향해 자신의 넉넉한 손과 팔을 펼치고 계신지를 들려주는 이야기입니다.
---제2부 2장: [선택] 저주인가 축복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