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인 사건. 요시오 형의 그 한마디로 사람들은 다시 얼어붙었다. 살인 사건. 살인 사건이라니. 설마. 설마, 말도 안 돼, 어떻게 그런 일이. 어떻게 그런 비현실적인 일이 우리한테 일어날 수 있어. 모두의 겁먹은 눈동자가 그렇게 항의하고 있었다.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어. 그런 일이 선량한 시민인 우리에게 절대로 일어날 리 없는데.
살인 사건. 그러나 내게 그 한마디는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의미와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 일어나서는 안 된단 말이야. 다른 사람들이 한 말과 다를 게 뭐냐고 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내가 말하는,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다는 말은 단순히 수사적 표현이 아니라 말 그대로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오늘 이날, 1월 2일. 오늘 여기 할아버지 댁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일어날 리가 없다는 것을 나는 기성사실로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제’, 정확하게 표현하면 1주 차인 1월 2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평온하고 무사한 하루가 끝났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즉 2주 차인 1월 2일에 할아버지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날 리가 없지 않는가. --- pp. 10
내 ‘체질’을 알아차린 첫 계기는 식사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식탐이 대단했다고 한다. 매일 같은 메뉴가 이어지는 게 아무래도 이상하다고, 어린 마음에도 의아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또 계란말이랑 감자샐러드야?” 무심결에 이렇게 중얼거렸다가 어머니께 혼이 났다. 무슨 소리야. 어제는 햄버그스테이크였잖니.
그때 내 기억으로 햄버그스테이크를 먹은 건 며칠 전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배는 고파서 전부 먹어치운 다음 날, 또 계란말이와 감자샐러드가 나왔다. 또 이거냐고 불평하고 싶어질 만도 하지 않은가. 그러자 어머니는 또 눈을 부라렸다. 무슨 소리야. 어제는 햄버그스테이크였잖니.
가진 건 오로지 식탐뿐이고 딴 일에는 관심도 없는 초등학생이었지만, 이상한 것은 비단 테이블 위에 놓인 메뉴만은 아니라는 것을 서서히 깨닫게 된 것이다. 식탁에서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 보니, 부모님과 형들이 전날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여튼 서양 코쟁이 놈들은 남이 먹는 것에 참견이 심해서 못쓰겠다니까, 남이야 고래를 먹건 참치를 먹건 무슨 상관이야” 등등. 아무래도 먹을 것 이야기였기 때문에 내 귀에 들어온 것 같은 기분이 안 드는 것도 아니지만, 그건 어쨌든 아버지와 형들은 그 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같은 이야기를 했다. “하여튼 서양 코쟁이 놈들은 다른 사람이 먹는 것에 참견이 심해서 못쓰겠다니까, 남이야 고래를 먹건 참치를 먹건 무슨 상관이야” 등등. 그것도 그 전날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깨닫고 보니 가족뿐만이 아니었다. 학교 선생님과 친구들도 다들 전날과 같은 말을 하고,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 pp. 14~15
밤중에 두 번 잠에서 깬 것을 기억한다. 몇 시경이었을까. 아무튼 깜깜했다. 목이 심하게 말라서 견딜 수가 없었다. 물을 마시러 가기 위해 일단 이불에서 일어난 것도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결국 졸음이 이겼다. 결국 그대로 다시 이불 속으로, 꿈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그리고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작은 창으로 허무한 햇살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알람시계를 보자 아침 8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나는 할아버지 댁의 안채 다락방에 있었다. 그 사실에 대해 처음에는 아무런 위화감도 느끼지 못했다.
화장실에 가기 위해 계단을 내려가는 도중에서야 겨우, 어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이 며칠이더라. 분명히 1월 3일이어야 할 터이다. 그 말은 어제는 1월 2일이고. 어제저녁, 나는 어머니, 형들과 함께 우리 집으로 돌아가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래. 생각났다. 어제 분명히 요시오 형이 나를 차에 밀어서 태웠다. 그 후 잠들어 버리는 바람에 집에 도착한 장면은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1월 2일이라는 날짜는 지났을 터이다.
당연히 나는 할아버지 댁이 아닌 우리 집에서 눈을 떴어야만 한다.
그럼에도 실제로 이곳은 할아버지 댁 안채다. 게다가 분명히 내 옷으로 갈아입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느 틈엔가 다시 빨간 추리닝 차림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이것은 혹시…….
“그러니까 빨간 색종이가 없었다니까.” 아래층으로 내려오자 예상했던 대로 주방에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게 된 거야. 제대로 준비해두었을 텐데, 빨간 색종이만 안 보여.”
“그럼, 어떻게 하셨어요?” 그렇게 대답한 사람은 물론 고토노 이모였다. 볼에 손을 대고 고개를 갸웃하는 포즈까지 어제, 아니 ‘오리지널 주’와 똑같다. --- pp. 90~91
느닷없이 마이 누나가 테이블을 세게 내리치며 일어나서, 우리는 모두 뻣뻣하게 굳어버렸다. 루나 누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만지작거리던 귀걸이를 테이블 위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싫어, 싫어, 싫어, 싫어. 그게 뭐야. 너무해.” 소리치는가 싶더니 마이 누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신경질 부리는 어린애처럼 밥그릇과 접시를 집어서 바닥에 내던졌다. 떨어지는 도자기 파편 소리에 그녀의 절규가 겹쳤다. “그런 거 너무해, 너무해, 너무해! 너무한다고!”
“왜, 왜 그래? 왜 그러는 건데, 언니.” 루나 누나는 겁먹은 것처럼 몸을 일으켰다. 신변에 위험을 느끼고 뒤로 물러나고 싶지만, 언니를 달래기 위해서는 자신이 앞으로 나서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언니도 참. 왜 그러는 거야. 아, 접시가 엉망이 됐잖아.”
“그까짓 접시 좀 깨진 게 무슨 큰일이라고.” 마이 누나가 테이블을 뛰어넘어 루나 누나에게 덤벼들었다. 마이 누나의 체중에 테이블이 삐걱삐걱 흔들리더니 식기가 떨어지며 쨍 하고 고막을 찢는 소리를 냈다.
“이, 이, 이, 이!” “그, 그만, 그만해, 언니.” 머리채를 잡히자 이번에는 루나 누나가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렸다. 유리가 깨질 듯 날카로운 소리가 목에서 튀어나왔다. “그만하라니까. 그만해. 아파. 아야야야, 아파, 아파.”
“너 같은 건, 너 같은 거!” 절규하면서 마이 누나는 동생의 따귀를 후려치고 눈알을 파내기라도 하려는 듯이 손톱을 세웠다. 그 무시무시한 기세로 말할 것 같으면 차마 이 세상의 광경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죽어버려. 너 같은 건 그냥 콱 죽어버리라고오오. 아아, 아아아악!”
“아파, 아프다니까. 언니, 그만. 제발 그만, 그만해. 아파, 아, 아프다고.” --- pp. 130~131
연결복도를 지나 안채로 들어갔다. 주방을 지나 계단을 올라가려 한 내 발이 움찔 멈추었다. 바닥에서 누군가가 내 얼굴을 노려보고 있었다.
할아버지였다. 두 다리를 계단에 걸치고 엎드린 자세로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 후두부만은 주방 쪽으로 삐져나와 있었다. 양팔을 만세 하는 자세로 펼치고, 백발은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노려보는 안구가 뿌옇게 흐려져 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엉덩방아를 찧었다. 누군가가 그때 내 얼굴을 보고 있었다면 미쳤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말 그대로 악몽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었다. 망연자실하면서도 할아버지의 팔을 잡아 맥을 짚어보는 것을 잊지 않는 스스로가 어쩐지 무척 우습게 여겨졌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다. 틀림없이.
--- p. 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