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두 아줌마의 여행 수다이다. 멕시코 여행 이야기를 흥미진진하게 들어주던 친구들의 응원에 힘입어 엮여진 책이니, 그런 재미로 읽어주었으면 싶다. 여행정보야 인터넷에 더 자세히 나와 있으니 우린 우리가 몸으로 겪은 이야기만 담았다. 멕시코를 알려주기보단 독자들과 함께 다시 한번 멕시코를 느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직까지도 귓가에는 낯익은 멕시코 친구들의 정겨운 목소리가 맴돌고, 눈가에는 캐리비안 해변의 옥색 물빛이 넘실거릴 정도로 여행의 행복한 여운이 남아 있는데, 읽는 이들에게 그 마음이 전해지려나 모르겠다. 부디 이 책이 독자들을 멕시코의 멋진 캐리비안 해변으로, 또 떼오띠우아깐과 치첸이트사, 멕시코시티의 소깔로까지 데려다줄 수 있기를 감히 바래본다. 그리고 나와 같은 아줌마들이 이 책을 통해 혼자 떠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길. --- '책을 펴내며' 중에서
이번 여행은 여러모로 의미가 남다르다. 오래 전부터 다시 가고 싶었던 멕시코 여행인데다가 무엇보다 결혼 10주년을 맞이해서 '혼자' 떠나는 여행이기 때문이다. 무슨 결혼기념여행을 혼자 떠나느냐고 주위에선 말이 많았지만, 실은 이번 여행은 남편이 내게 주는 결혼 10주년 선물이다. 좀 우겨서 얻어낸 선물이지만, 결혼 10년차 주부에게 이보다 근사한 선물이 있을까?
처음 롤리가 여행을 제안했을 때 나는 인생에서 특별한 한 지점을 지나고 있었다. 나로 인해 누군가가 크게 상처 받았으며 나 역시 상처를 받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였다. 근 1년을 집에서만 지냈다. 모든 것을 잊고 싶었지만 달려도, 돌아누워도, 웃어도, 밥을 먹어도 잊고 싶은 것은 더욱 내게 달라붙어 있었다. 그로 인해 나는 정신과 몸이 반쯤 나간 상태로 비가 오는 것과 저녁볕이 길게 드는 것을, 다시 새벽이 와 세상이 붉어지는 것을 오래오래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럴 때 롤리의 제안은 반갑기도 했지만 ‘될 대로 되라’ 식의 마음을 내게 가져다주기도 했다.
해와 달 피라미드를 잇는 곧고 넓은 ‘죽음의 길’에 비가 내리고 있었고 우리 외에 다른 사람은 드물었다. 사위가 조용했다. 물속에 혼자 잠겨 있는 듯,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아직도 이 길을 걷고 있는 듯 고요하고 두려웠다. 무엇인지 알 수 없어 두려운 것은 항상 나를 매료시켜왔다. 너무 많은 기억들이 비와 함께 나를 적셔와 길로 스며들듯 허정허정 걸었다.
그 때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까딸리나~ 까딸리나~“ 비 내리는 죽음의 길에 누군가의 이름이 안타깝게 불리워지고 있었다. 나를 부르는 것이 아닐 거라 생각하면서도 호르께의 목소리 같아 뒤돌아 보았다. 호르께는 나를 보며 ‘까딸리나’ 라고 부르고 있었다. 비가 와 덧입은 얇은 스웨터 등 쪽에 영어로 'catalina 276'이라고 써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까딸리나’라는 멕시칸 이름을 얻었다. 다들 내 이미지와 딱 맞는다며 좋아했다. 까딸리나, 나도 맘에 들었다. 어쩐지 매우 활발하고 여성스러운 매력을 함박 갖고 있는 사람을 연상케 하는 이름이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에게 새 이름을 얻었다. 어쩌지 못하는 것은 잊어버리라고, 지나간 길은 뒤 돌아보지 말고 새로 태어나라고 하는 것 같았다. 죽음의 길에서 나는 다시 태어나는 중이었다.
호르께 집은 세계에서 온 손님들로 바빴다. 호르께 어머니나 아버지는 그런 친구들을 반갑게 맞아 주셨다. 친구들이 오면 어머니는 얼른얼른 서둘러 먹을 것을 내오셨고, 밥 먹었는지 꼭 물으셨고, 자식들과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에 관심을 가지고 들으셨다.
그런 어머니에게서 나는 잊지 못할 말을 듣게 된다. “Mi casa, Tu casa(내 집은 너의 집이야).” 어머니의 그 말은 입을 빌리지 않고 어머니 가슴에서 바로 내 가슴으로 날아 온 말 같이 들렸다. 한 치의 거짓이 없는 진심이었다. 감동 받았다. 나는 한 번도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해 본적 없었다. 물론 놀러 오라든지, 자주 오라는 식의 말은 해봤지만 집을 통째로 주면서 마음까지 통째로 주는 그런 말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세상엔 내가 상상도 못 할 일들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멕시코에서 새 이름을 얻은 나는 살아가는 방법도 새로 배우고 있었다.
눈부시게 푸른 하늘빛과 고풍스러운 콜로니얼 양식의 건물들, 자연석 바닥이 깔린 소담한 골목. 그 이름처럼 아름다운 산 루이스 포토시는 그 모습 그대로 우릴 맞아주었다. 고풍스럽고, 단정하고, 깨끗하고 밤에는 온 도시가 반짝반짝 빛이 나는 루미나리에 도시. 공기도 맑고, 사람들도 친절하고, 소매치기 따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곳에서 자란 신띠아에겐 멕시코시티에 사는 것 자체가 고역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산 루이스 포토시에 홀딱 반해 한참 거리를 헤매고 다니던 까딸리나는 결국 이곳에 살고 싶다고 고백했다. 나 역시 같은 고백을 한 적이 있다.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이곳에서 먹고 살 수 있을까 고민하다 알렉스 엄마에게 방법을 물었다. “여기서 결혼을 하면 되지. 멕시칸이랑.”
“마마, 우린 유부녀잖아요.” “괜찮아. 여기선 아니잖아."(-..-) 에그머니. 마마는 농담도 잘하셔.
왜 어머니들이 해 주는 음식은 다 맛이 있는지 모르겠다. 롤리도 그런 맛을 갖게 될까? 아침을 먹는 내내 어머니는 다시 오라고, 다시 오라고 하셨다. 너무 짧게 있어서 얘기도 많이 못하고 맛있는 것도 많이 못 해줘서 서운하다고 우셨다.
롤리와 어머니는 둘만의 기억이 있었다. 처음 롤리가 어머니를 만났을 때 둘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알렉스는 롤리와 어머니를 남겨두고 학교에 갔다. 서로의 눈만을 바라보던 그녀들은 데낄라를 마시기 시작했다. 말은 안 통했으나 마음은 통하여 ‘건배’를 외치며 취해 갔다. 춤을 췄다. 또 술을 마시고 춤을 췄다. 학교에서 돌아온 알렉스는 취해 있는 두 여인을 보고 어리둥절해 했다. 그래서 롤리는 다시 멕시코에 오기 전 스페인어를 배웠다. 어머니와 얘기하고 싶어서.... 말이 통하든 안 통하든 롤리의 그 마음은 어머니에게 고스란히 전달됐으리라 믿는다.
--- 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