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저의 옛 제자 가운데, 특별히 ‘출판평론가’라는 호칭을 얻을 정도로 책과 가까이 살아오고, 책을 누구보다 잘 아는 표정훈 선생과 나눈 대담집입니다. 표 선생은 제가 1986년부터 1989년까지 재직했던 계명대 철학과에서 서강대로 옮겨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제 강의를 들었던 첫 제자들 중 한 사람입니다. 졸업 후 오랫동안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2007년 2월, 서강대 철학과 출신으로 지금은 프랑스 리옹에서 유학 중인 박재은과 함께 표 선생이 당시 제가 집무하던 교양학부 학장실로 찾아왔습니다. … 이렇게 해서 이 책에 실린 대담이 시작되었습니다. …
철학계에 계신 분들에게 이 책은 너무 기독교적으로 보이고, 교회의 울타리 안에만 머물러 계셨던 분들에게는 너무 철학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이 책은 철학을 다룬 책이면서도 동시에 제가 공부하고 가르쳐 온 철학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철학을 이야기하지만 제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임을 숨기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숨기기는커녕 저의 삶의 매 순간이 제 믿음과 무관하지 않았음이 드러납니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을 설명하거나 옹호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대담자도 저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았습니다. 철학과 신앙 가운데 어느 한쪽을 배제하거나 절충하려 하지 않고, 제가 믿고 제가 생각하는 대로 이야기하려고 애썼습니다.
---「머리말」중에서
이것은 틀림없는 행운, 그것도 하나의 커다란 행운이다. 강의실에서 수십 명의 다른 학생들과 함께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던 때가 있었다. 이제 그로부터 2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 온전하게 나 혼자 열 시간 넘도록 그와 함께할 수 있다. 오직 나 혼자만을 위한 10여 시간의 철학 강의가 펼쳐질 참이다. 그는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강영안 선생님이고, 나는 선생님이 서강대학교에 처음 부임할 때부터 강의를 수강한 제자 표정훈이다.
돌이켜 보면, 선생님에게 들은 강의는 독일관념론, 대륙합리론 등 네댓 과목에 지나지 않았다. 대학원에서 본격적인 학문적 지도를 받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철마다 때마다 찾아뵙고 인사드리지도 못했다. 그래서 나를 선생님의 제자로, 선생님을 나의 스승으로 호명한다는 게 멋쩍기 그지없다. 그럼에도 내게 주어진 이 특별한 기회, 특별한 자리를 마다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염치불고다. 무엇이 내 염치를 잠들게 했을까? 거창하게 말하면 철학에 대한 욕심 또는 그리움 때문이다. 철학 텍스트와 씨름하지도 않고 그저 10여 시간 강의를 듣는다고 해서 철학의 문턱 가까이라도 갈 수 있는 건 분명 아니겠지만, 먼 곳의 고운 임을 그리듯 철학을 늘 그리워했다고 한다면 이 역시 염치없다 할까?
---「대담을 하기 전에」중에서
철학이란 무엇인가? 사실 그렇게 묻는 것 자체가 철학이지요. 우리 아이가 “아빠 하는 게 뭐야?”라고 묻기에 “철학” 이라고 했더니, “철학이 뭐야?” 이렇게 묻더군요. “그렇게 묻는 게 철학이야”라고 답했지요. 그래도 잘 이해가 안 되는지 다시 묻기에 철학은 곧 “지혜 사랑”이라고 했지요. 그리스어로 ‘필로소피아philosophia’, 곧 ‘지혜 사랑’이지요. ‘필로-’의 어근인 ‘필레인philein’에는 친구 사랑이란 뜻도 있으니, ‘지혜의 친구’라고 해도 되겠네요. 여기에서 질문을 더 심화시키면 지혜가 무엇이고, 사랑이 뭐냐고 물을 수 있겠습니다. 여하튼 철학이라는 말의 어원으로만 답하자면 철학은 ‘지혜 사랑’이라고 해야겠지요.
---「철학이란 무엇인가」중에서
스승 강영안 선생님의 특별한 철학 강의를 나 혼자만 누린 것이 10여 년 전이다. 다행히 책으로 펴내 많은 분들과 함께 선생님의 강의를 누릴 수 있었다. 그것이 특별했던 까닭은 선생님의 학문적·철학적 도정道程과 삶의 길, 모두에 바탕을 둔 강의였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철학 강의에서는 삶의 길이 생략되곤 한다. 이제 선생님도 나도 그 삶의 길이 10여 년 더 길어졌다. 아니 깊어졌다. 선생님은 재직하시던 학교를 떠나 다른 여러 자리를 통하여 철학과 삶의 경륜을 더해 가셨고, 나는 내 나름의 삶의 신산辛酸을 경험했다. 그런 만큼 선생님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역시 가장 중요한 질문은 하나다. “철학이란 무엇입니까?” 철학이란 무엇인지 묻는 것이야말로 가장 철학적인 질문이다. 그 질문에 답해 보려는 노력 자체가 철학함이다. 정답도 해답도 없다. 다만 실마리는 철학 텍스트에도 있고 타인과 나의 삶에도 있다. 누군가 나에게 강영안 선생님을 한마디로 말해 보라 한다면 주저 않고 말할 것이다. “늘 묻는 사람.”
내가 선생님에게 배운 것이 있다면 바로 “묻는 것”이다. 10여 년 전에는 선생님의 서강대 연구실로 찾아뵈었기에 “어서 오게”라 말씀하시며 나를 맞아 주셨다. 이번에는 책방에서 내가 먼저 기다렸다. 책방 문을 열고 나를 보시자 말씀하셨다. “그래, 왔는가!” 이번에도 선생님에게 먼저 인사드릴 타이밍을 놓쳤다. 제자는 배움에서도 그 어느 것에서도 느리기만 하다.
---「10여 년 만에 다시 연 강의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