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인간 존재의 개념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인간 존재가 둘로 나뉘었다. 어떤 아기가 수정 단계에는 인간 생명이지만 나중의 어떤 시점까지 인격이 아니라면, 확실히 이 둘은 다른 종류다. 이것은 철저하게 파편화된 이분법적 인간관이다.……이 현대의 이분법을 그리기 위해 한 건물에 두 층이 있는 쉐퍼의 이미지를 적용할 수 있다(서론을 보라). 초기 단계 태아는 하층부에 있다. 여기서 태아는 과학의 실증적 방법으로 인식할 수 있는 생물학적 기관이라는 의미에서 수정 단계에서부터 인간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어떤 도덕적 지위가 있다거나 법적 보호를 보장한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나중에, 정의하기 힘든 어떤 시점이 되면 상층부로 뛰어 올라가 인격이 되는데, 이 인격은 전형적으로 인지 기능과 의식, 자기 인식이라는 특정 차원의 측면에서 정의된다. 그제야 비로소 태아는 도덕적·법적 지위를 얻는다.
이를 사람됨 이론(personhood theory)라고 하는데, 이것은 사실/가치 분리가 실제로 드러난 결과다. 생물학적 인간이 되는 것은 과학적 사실이지만, 인격이 되는 것은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으로 정의되는 윤리적 개념이다.
---「1장 나는 내가 싫다」중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인간은 육체를 지닌 인간이 확실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분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육체가 경멸스럽고 무가치하다는 말은 불합리하지 않은가? 2세기 순교자 유스티누스의 신학적 통찰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는 이 시대의 사회악을 목격할 때마다 가혹하거나 분노에 차 있거나 비판적으로 들릴 수 있는 비난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형상의 일부인 몸에 대한 긍정적 관점에 기초한 성경 윤리를 드러내려 힘써야 한다. 문화 전쟁에서 이기거나 우리 관점을 다른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는 것, 곧 이웃의 유익을 위해 수고하는 것이 목표다.
---「1장 나는 내가 싫다」중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 마지막 단계다. 이들은 자신이 겪은 어려움이 내면 성장의 원동력이 되었기에 그 어려움에까지 감사하게 되었다. 그래서 내리는 결론은, 어떤 사람이 고통을 겪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안락사 후보로 가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런 긍정적 결과가 자동으로 나오지는 않는다. 고통은 우리를 깊어지게 할 수도 있지만, 분노와 억울함, 후회를 불러올 수도 있다. 핵심은 우리가 고통 가운데 하나님을 향하는지 여부다. 그렇게 되면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우신]” 예수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다(히 5:8).
---「3장 친애하는 소중한 유권자께」중에서
세속 사회는 많은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는 “게이 대본”을 제시한다. 동성애 욕구를 경험한 사람이 자신의 진정한 자아를 발견했으며, 그들이 동성애 성향을 자신의 진정한 정체성으로 공개적으로 인정하면 가장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말해 주는 대본이다. 수많은 영화와 소설, 기사, 노래, TV 프로그램에서 이 대본을 재연한다. 게이 대본은 특히 젊은이들의 사고를 형성하는 강력한 서사가 되었다.……문제는, 성욕을 우리 정체성을 정의하는 특징으로 본다면, 그것이 고정되고 침범할 수 없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누군가의 정체성에 의문을 품는 것은 그 사람의 자아와 가치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된다. 성적인 감정에 따라 행동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억압과 자기혐오라고 비난을 받는다.
하지만 왜 성적 감정을 정체성의 핵심에 두어야 하는가?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관점, 곧 우리가 그분의 형상을 반영하도록 창조되었다는 관점에서 정체성을 정의하는, 더 설득력 있는 대본을 제시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사랑받고 구원받는다. 이런 진리에 우리 삶을 기초할 때 성적인 느낌과 상관없이, 그것이 변하든 변하지 않든 우리 정체성은 확고해진다.
---「5장 부적절한 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