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 속에 앉아 있는 동안 이런저런 잡념이 들다가 시간이 갈수록 숨 쉬는 행위만 느껴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 차차 내가 숨 쉬는 게 아니라 모래바다, 하늘, 구름이 벌렁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라는 자의식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인식되는 것일 뿐, 아무도 없는 모래바다에서는 나조차 희미해졌다. 예언자들, 수행자들이 사막이나 동굴로 들어가는 이유가 이런 것 때문일까? 여기에 몇 달, 몇 년간 침묵 속에 빠져 있으면 현자가 될 것 같았다. --- p.14
골목길 끝의 소실점은 현실이란 어둠에 갇혀 있었지만 하늘에 뜬 둥근 보름달은 시간을 벗어나 있었다. 늘 거기 있어 아름답고, 잡을 수 없어 더 아름다운 빛이었다. 시탕의 매력은 빛이었다. --- p.41
현재가 힘들고 답답해질 때, 나는 과거의 추억을 불러낸다. 인도는 말이야, 하면서 시작되는 나의 경험담은 밤새도록 이어질 수 있다. 인도 이야기를 하며 웃기도 하고 눈물짓다가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엄살 피지 말아야지, 방에서 등 눕히고 잠을 잔다는 것만 해도 얼마나 행복한가’라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 p.53~54
사람들은 박수를 치며 흥을 맞췄고 연주를 끝낸 가수는 모자를 들고 오픈카페를 돌았다. 이런 풍경은 어느 나라에서나 볼 수 있었는데 도시마다 달랐다. 파리는 세련되었고, 프라하는 예뻤다면, 크라쿠프는 자연스러웠다. 흐트러짐 속에서 솟구치는 자유의 열기가 가득했다. 숙소로 돌아와 잠을 청하는데 어디선가 교회 종소리가 들려왔다. 뎅그렁, 뎅그렁, 뎅그렁 …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 맑은 종소리였다. 크라쿠프는 그 시절, 내가 돌아본 수많은 도시 중, 가장 따스했던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다. 아무리 화려한 곳도 사람이 따스하지 않으면 정이 안 간다. 세월이 갈수록 따스함이 그립다. 도시에서든 사람에게서든. --- p.116
길이 좁아서 팔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은 그곳에서 어떤 이들은 기적 소리에 상을 찡그리며 귀를 막았고, 어떤 이들은 기차를 구경했고, 어떤 이들은 무심하게 계산기를 두드렸다. 문득, 장난감 세계를 통과하는 것만 같았다. 무쇠 덩어리 기차도, 철로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기차 안에 탄 우리들도 모두 장난감처럼 보였다. 모든 게 유희처럼 보이는 그 순간, 부연 안개와 비와 어둠 속에 펼쳐진 세상은 따스하고 사랑스러웠다. --- p.185~186
그 후, 소년의 눈빛은 종종 나를 따라 다녔다. 여행 중에도, 살다가 아프고 힘들 때도 소년의 눈빛이 떠오르면 옷깃을 여 미고 싶어졌다. 아프리카 여행 중, 그런 눈빛을 가진 아이들 을 가끔 보았었다. 삭막하고, 병들고, 열악한 땅에 살고 있던 아이들이었다. 신의 눈빛은 가난하고, 상처받고, 애통해 하는 사람들에게 서 드러나는 것일까? 가슴 아프면서도 가끔 그들이 그리워진다.
--- p.2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