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 따스한 생명의 힘을 담은 기쿠치 치키 작가의 눈 그림책 동물들이 사는 숲에 첫눈이 내립니다. 하얀 눈송이를 보며 다람쥐는 솜사탕이 생각나고, 토끼는 먹이를 감출까 걱정입니다. 눈이 점점 거세게 내리자, 동물들은 어딘가로 달아나고 곰 가족은 겨울잠에 들어갑니다. 결국 눈은 온통 하얀 세상을 만들지만, 눈을 반기는 아이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세상을 깨웁니다. 브라티슬라바그림책 원화전에서 황금 사과상을 수상한 기쿠치 치키 작가가 태어나고 자란 홋카이도의 눈을 그린 작품입니다. 시적인 글과 아름다운 색감, 역동적이고 섬세한 붓 터치가 돋보이며, 눈의 다양한 표정을 동물들과 아이들의 따스한 숨결에 담아 환상적으로 보여줍니다. |
기차를 타고 남녘으로 가는 길에 첫눈을 만났다. 사모하는 시인을 뵈러 가는 길에 첫눈이라니! 빠르게 달리는 기차 때문에 사선으로 내리는 눈 뒤로 들판 허공이 눈으로 가득 찼다. 기차역에서 눈과 함께 잠시 풍경이 되었다. 시인을 만나서 밥 먹으러 가는 길은 눈이 잠시 흩날렸을 뿐 길가 그늘진 곳에 쌓여 있었다. 시인이 준 보리를 비둘기한테 주려고 가는 옥천에서 다시 함박눈이 내렸다. 버드나무에 쌓이는 눈, 눈을 맞고 비둘기에게 보리를 주었다. 동천에 내리는 눈은 금방 물이 되었다. 물 위에서 물이 되기 직전의 눈들이 휘날렸다. 언제까지 지켜보아도 좋을 동천에 내리는 눈. 그 그림에 야생의 생명이 온기까지 불어넣어 주었다. 날아가던 흰뺨검둥오리가 내려앉아 헤엄치고, 물닭이 작은 무리를 지어 돌아다녔다. 압권은 순천만의 눈이었다. 함박눈 내리는 논 들판이 온통 눈 세상이었다. 뚜르 뚜르 흑두루미랑 끼룩 끼룩 기러기들이 독수리들과 함께 순천만을 멋진 설국으로 만들었다.
내가 사는 도시에도 눈이 내렸다. 이튿날 생태공원을 찾았다. 눈이 수북하게 쌓여 있었다. 아무도 밟지 않은 길을 홀로 걷기 아까웠다. 두런두런 이야기 나누며 함께 걷고 싶은 마음과 아이들이 뛰어놀며 눈사람을 만들면 좋겠다는 생각이 겹쳤다. 뒤돌아서기에는 눈길의 유혹이 컸고 나무 위쪽에 쌓인 눈이 햇살을 받아 눈부셨다. 성급하게 녹은 눈이 나뭇가지에서 내린다. 화르르 깃털처럼 내리기도 하고 와르르 와르르 뭉치가 되어 내리기도 한다. 그렇게 눈 내린 이튿날까지 눈을 맞으며 눈길을 걸었다. 눈 때문일까. 새가 다른 날보다 많다. 메타세콰이어 나뭇가지 한쪽에 맹금 말똥가리가 오도카니 앉아 있다. 나무 중간 부분 천 쪽으로 앉아 있어서인지 텃새 까치들이 텃세를 부리지 않는다. 새를 잡아먹는 맹금 새매가 빠르게 날아다니고, 천연기념물 노랑부리저어새가 소리 없이 날아간다.
기쿠치 치키의 눈은 춤으로부터 시작한다. 주먹보다 큰 눈송이가 노란 하늘에 둥둥 떠 있다. 주먹보다 작은 눈송이도 있지만 커다랗게 다가오는 것은 눈을 반기는 마음 때문일 테다. 노란 하늘 또한 눈을 맞이하는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 알려 준다. 눈을 가장 먼저 반기는 존재는 숲속 동물이다. 낙엽 위에 쌓인 흰 눈은 폭신폭신 솜사탕 같다. 다람쥐에게는 맛있는 알밤만큼이나 즐거운 눈이다. 나무 위 새들도 눈을 반기기는 마찬가지이다. 가장 많이 얼굴을 드러낸 새는 흰머리오목눈이, 세상에서 가장 귀엽다는 새다. 오목눈이만 하더라도 귀엽기 그지없다. 참새만한 크기 더 날렵한 몸매로 찌르 찌르 소리를 내며 무리 지어 다니는 모습을 보면 찬탄을 금할 수 없다. 귀엽기 그지없는 오목눈이에 머리가 온통 흰 눈처럼 하얀 새가 흰머리오목눈이다. 세상에서 가장 귀엽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다. 흰머리오목눈이와 동고비와 청딱따구리가 눈 내리는 숲을 활기차게 만든다.
토끼는 눈과 차이가 없는 흰 깃털을 가졌다. 저랑 동족이라도 되는 듯 토끼는 눈이 반갑다. 숲속 동물들이 눈을 반기며 뛰어다니고 날아다니는 동안 눈은 계속 내린다. 내린다. 소리 없이 쌓인다. 제법 쌓인 눈, 이제는 커다란 동물도 눈과 함께 숲으로 나온다. 겨울 눈이랑 떼어놓을 수 없는 사슴이 우두커니 서서 눈을 바라다보기도 하고 휘휘 걸으며 눈을 맞기도 한다. 큰 동물들이 숲을 걸으면 자연스레 소란이 일기도 한다. 숲속을 지배하며 먹이사슬의 최고 위에 있는 동물도 어김없이 나오기 때문이다. 화들짝 놀라 달아나기도 하는 동물들. 그럼에도 눈은 그치지 않는다. 그치지 않고 계속 내리는 눈은 마침내 눈을 반기는 존재들을 뒤로 물러나게 한다. 자신만의 안전한 동굴 속으로 들어가게 하고 숨소리를 죽이게 한다. 이제는 오직 눈, 하얀 소리뿐이다. 점점 무거워지고 어두워지는 숲.
숲은 눈으로 꽉 채워졌다. 빈틈없이 내린 눈으로 숲은 빽빽하고 그나마 나무가 없는 부분만 그저 흰 눈으로 길이 되었다. 작은 틈으로 어린이들이 들어선다. 작고 여린 어린이들이 숲을 깨어나게 한다. 무겁고 어두운 숲에 햇살처럼 빛을 뿌리는 존재가 바로 어린이다. 가볍고 가벼운 어린이. 그 가벼움은 눈을 닮았다. 어떤 색으로든 채색이 가능하다는 것도 눈과 어린이의 공통점이다. 눈을 닮은 어린이는 눈이 내리면 자신을 만난 듯 가슴이 뛴다. 몸이 살아 움직인다. 펄펄 뛰어다니고 날아다닌다. 숲에 들어가 동무들과 함께 눈싸움하고 그러다 보면 눈과 하나가 된다. 눈인지 어린이인지 어린이인지 눈인지. 눈 내린 날 즐거움의 정점이 아닐 수 없다. 비록 차갑고 하얀 눈이지만 어린이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동그랗게 환한 어린이들의 얼굴과 눈송이 눈송이의 조화로움이라니! 눈 오는 풍경을 창으로 응시하는 가족의 뒷모습이라니!
숲노래 그림책 2021.12.21.
그림책시렁 848
《눈》
기쿠치 치키
황진희 옮김
책빛
2022.1.3.
눈이 올 적에 투덜거리는 사람은 비가 와도 투덜거리고, 해가 쨍쨍해도 투덜거리고 바람이 불어도 투덜거립니다. 보셔요. 봄여름가을겨울 네 철에 따라 다르게 흐르는 날씨인데, 새뜸(방송)에서는 눈이건 비이건 바람이건 해이건 다 ‘걱정’이요, 사람들더러 ‘짜증’을 내라고 부추깁니다. 부릉이를 몰면서 날씨가 어떻다고 하는 소리를 듣는 이들은 스스로 하늘을 안 봅니다. 둘레를 보지도 않아요. 오늘날 숱한 어른은 스스로 철이 없이 굴고, 아이는 철없는 어른 곁에서 똑같이 철없는 마음을 물려받습니다. 우리말로 나온 《눈》을 읽으며 기쿠치 치키 님 그림책을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이이는 ‘철있는’ 눈썰미로 둘레를 보고 스스로 보며 하늘을 봅니다. 바다 곁에서 바다를 보고, 비오는 날에 비를 봐요. 바람이 불면 바람을 보고, 눈이 오면 눈을 봅니다. 오직 이 마음 하나입니다. 요즈막 우리나라 그림지음이(그림작가)를 보면 붓솜씨는 빼어나되, ‘나·너·우리를 그대로 보는 눈빛’은 없거나 옅거나 기울기 일쑤입니다. 붓질을 잘하면 ‘붓질쟁이’예요. 그림책은 붓질이 아닌 ‘마음담기+생각담기+사랑담기’입니다. 나풀나풀 춤추는 눈송이를 바라보는 눈길이 닿아 풀꽃나무마다 새눈이 돋아 겨우내 곱게 잠들다가 머잖아 깨어나요.
#きくち ちき #ゆき #ほるぷ創作繪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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