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는데 무엇부터 말할까요?”
“나쁜 소식이 뭔가요?”
“여기 하얀 부분 보이시죠? 혹시나 하고 해봤던 조직 검사에서 암세포가 발견됐습니다.”
“네? 암세포요?”
(…)
“저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그건 환자도 모르고, 의사도 모르고, 하느님도 모릅니다. 괜찮아 보이던 환자가 일주일 만에 죽기도 하고, 위독해 보이던 환자가 고비를 넘기며 몇 년을 더 살기도 합니다.”
--- p.23-24, 「암은 설마를 타고 온다」 중에서
암환자가 되면 누구나 인생을 돌아보게 된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하고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내가 걸린 거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듯 어리석은 반추를 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암에 걸리기 위한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하며 살아왔다. 인터넷과 TV, SNS상에 암과 관련된 정보는 넘쳐난다. 암을 유발하는 음식, 면역력이 올라가는 생활 습관, 항암에 좋은 성분 등. 가만히 대입해보니 나는 좋은 것을 굳이 멀리하고 나쁜 것만 콕 집어 선택하며 살아온 것이다.
--- p.49, 「웬만하면 암에 걸리는 방법」 중에서
결혼도 못한, 노총각이란 표현도 붙이기 겸연쩍은 독거 중년이지만, 나에게도 가족이 있다. 고창에 내려오는날 집 앞 골목에서 나를 보며 성호를 그으시던 어머니가 있고, 표현은 안 하셔도 항상 나의 안부를 궁금해하는 아버지도 있다. 나의 글을 보게 될 누군가가, 어느 날 갑자기 문을 쾅쾅 두드린 가족력이 막무가내로 두고 간 불행에 절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는 암 선고를 받은 후부터 천국과 지옥의 주소는 같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다. 가족력은 불행이지만 가족력은 또한 행운이다.
--- p.76-77, 「가족력歷 VS 가족력力」 중에서
소담스럽게 내리는 아키타의 첫눈을 헤치며 타자와코역까지 가는 버스 안에서, 며칠간 나에게 일어났던 따뜻한 에피소드를 공제에게 이야기해줄 생각으로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도쿄에서 공제를 만나면 늘 가던 간다의 에도코 스시에 가자고 할 것이다. 네타(초밥에서 밥 위에 올라
가는 재료)를 다른 집의 두 배로 올려주는 에도코 스시에서 우니 스시를 입안 가득 집어넣고 신나서 이야기를 하겠지. 헤어질 때는 술기운을 빌려 공제에게 꼭 얘기해야겠다. 나를 타마가와 온천에 데려가줘서 고마웠다고.
--- p.127, 「타마가와 온천에 가다 2」 중에서
노트북을 하나 들고 자주 가던 카페 씨엘에 들어가 바다가 보이는 이층 창가 자리에 앉았다. 연선이가 아직까지 결혼을 안 한 것도, 내가 암에 걸린 것도, 우리가 다시 만난 것도, 느지막한 나이에 또다시 연인이 된 것도, 모두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잘 살고 싶어졌다. 나태해진 일상을 바로 잡고, 열심히 글을 쓰고, 달리기도 거르지 않고, 몸에 해로운 것들을 멀리하며, 최선을 다해 연선이와 행복한 날들을 만들어가고 싶어졌다.
--- p.153, 「운수 좋은 날」 중에서
골수 검사 시간이 오 분이 걸렸는지 한 시간이 걸렸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골수 검사를 받다가 코마 상태에 빠진 환자가 있는지 검색해보고 싶었다. 영화에서 고문을 받는 독립투사가 “차라리 날 죽여라!”라고 얘기하는 심정을 알 것도 같았다. 다시 나라에 위기가 찾아와 얼떨결에 내가 독립투사가 된다면, 최대 약점이 골수 검사란 걸 비밀에 부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고문도 하기 전에 “배후를 적어낼래? 골수 검사를 받을래?”라고 간수가 물어본다면, 나는 곧바로 영화 〈슈렉〉의 장화 신은 고양이가 되어 세상 착한 표정으로 A4 용지와 볼펜을 가져다 달라고 말할 테니까.
--- p.185, 「무서운 것투성이」 중에서
아저씨는 죽기 전, 그나마 희미한 의식이라도 있을 때 나만 봤다. 그때 아저씨는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 “자네는 반드시 건강을 회복하게!” 마지막 선의를 전하고 싶으셨을까. 설마 “혼자 가기 적적한데 함께 가주시겠나?”라며 서늘한 농담을 건네고 싶으셨을까. 망자의 생전 이틀에 본의 아니게 개입을 하다 보니 후유증이 꽤 오래갔다. 하늘나라에서는 섬망 증세도 없어지고 피부색도 원래대로 돌아왔기를. 고인의 명복을 빈다.
--- p.213, 「나의 옆 아저씨」 중에서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사람과 사람의 관계로 바꿔준 뜻밖의 마음 한마디. 교수님이 나보다 나이가 많았다면, 옆에 간호사가 서있지 않았다면, 내가 눈물을 흘려도 주책맞을 나이가 아니었다면 그 자리에서 아이처럼 펑펑 울었을 만큼 말 한마디의 힘은 강력했다. 꾹꾹 눌러왔던 힘들고 서러운 감정들이 한꺼번에 밀려와 황급히 진료실을 나왔다. 나는 처음으로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 p.257, 「따뜻한 말 한마디」 중에서
망가진 얼굴, 이뤄놓은 것 없는 인생, 여태 솔로. 그래도 살아야겠지. 치료 안 받으면 육 개월에서 이 년 안에 죽는 지독한 병에 걸려, 삼 년이나 늦게 치료받고도 결국 죽지 않았으니. 암으로 장남 잃고 차남까지 잃는다면 너무 불쌍할 부모님을 위해서라도 꾸역꾸역 살아야겠지. 언젠가 햇빛 벗고 긴 어둠 속으로 들어가는 날, 조금이라도 덜 후회하기 위해서라도.
--- p.264, 「환자복 벗고 햇빛 입던 날」 중에서
나는 암환자가 되기 전에는 내 인생이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결혼도 못 했고, 모아둔 돈도 없고, 특별한 업적을 쌓지 못했어도 그랬다. 주로 인간관계에 국한된 생각이었으니까.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 누군가에는 나쁜 사람, 어떤 순간에는 바른 사람, 어떤 순간에는 그릇된 사람, 어딘가에서는 필요한 사람, 어딘가에서는 쓸모없는 사람. 평균값을 내보면 결국 무난하고 평범한 사람으로 귀결된다고 생각했다. 나에게 특히 중요한 두 개의 단어, 친구와 애인 관계에서는 더 그랬다. 그냥 다 그렇게 사는 거지. 좋으면 좋은 대로, 싫으면 싫은 대로.
--- p.285, 「Present라는 선물」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