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와다 요코는 우리가 흔히 가장 근원적이고 일차적인 언어로 간주하는 ‘모국어Muttersprache’라는 단어를 언어유희적으로 다룸으로써 그것에 대한 환상을 파괴한다. 이러한 해체로부터 생겨난 ‘언어엄마’라는 신조어는 근원적인 언어의 신체연관성과 생산성 내지 창조성을 잘 보여준다. 다와다 요코는 가부장적인 법의 질서인 동시에 언어질서이기도 한 라캉의 상징적 질서와 구분되는 또 다른 언어적 차원으로서 ‘언어엄마’를 언급하는데, 이러한 ‘언어엄마’는 단순히 외부세계를 지시하거나 재현하는 기호로서의 기능을 갖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념적 언어로 포착할 수 없는 다양한 감각적인 것들을 생성하고 창조하는 무의식적인 신체언어의 특성을 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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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와다 요코는 어떤 언어로 꿈을 꾸냐는 질문보다 어떤 문자로 꿈을 꾸냐는 질문이 더 적절하다며, 문자가 말보다 꿈을 꾸는 인간의 신체에 더 깊숙이 박혀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꿈에서처럼 인간의 의식이 약화되고 무의식이 활발히 작용하는 곳에서 신체에 새겨지는 무의식의 문자가 우리가 접근할 수 없는 근원적인 흔적문자의 지위를 갖고 있음을 의미하는데, 이를 어떻게 번역하는지가 작가의 과제가 된다. 따라서 신체문자를 옮겨쓰는 번역은 다와다 요코에게 근본적으로 시학 원칙으로서의 의미를 갖는다.
--- p.75
다와다 요코의 소설에서는 헬스를 하거나 성형을 하면서 자신의 외모를 가꾸는 인물들이 빈번히 등장하곤 한다. 이러한 외모지상주의는 특히 대중매체를 통해 더욱 강화되며 많은 사람에게 보편적인 사고로 자리 잡는다. 하지만 다와다 요코는 이러한 매끄럽고 보기 좋은 몸의 표면에 숨겨진 어두운 검은 지점들에 주목하며 이성적인 인간의 시각으로 완전히 밝혀낼 수 없는 무의식적인 몸을 탐구한다. 오늘날 많은 현대인이 정신병에 시달리며 고통을 받고 있는데, 이러한 병은 합리성과 유용성의 요구에 따라 몸의 요구를 억압한 삶의 태도에 기인한다.
--- p.131
다와다 요코는 벤야민의 생각을 발전시켜 인간중심적인 얼굴 정의를 비판하며 얼굴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시도한다. 이에 따르면, “얼굴은 가시적이 된 어떤 것”이다. 그러한 정의에서는 인간만이 얼굴을 갖는 것이 아니며, 심지어 사물조차 얼굴을 가질 수 있다. 가령 바람도 얼굴을 지닌다. “물이 웃을 때 생기는 주름을 보여주거나 얼굴을 찡그릴 때면, 나는 바람의 얼굴을 본다.” 이에 따라 인간이나 동물의 얼굴 외에 사물이나 도시도 얼굴을 지닐 수 있게 된다.
--- p.137
다와다 요코는 『바다 너머 혀넙치의 혀들』에서 인간의 성정체성을 체감온도에 비유한다. “바람이 얼마나 강하게 부는지 또는 공기가 얼마나 습한지에 따라 동일한 온도가 더 높거나 더 낮게 느껴진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마도 체감한 성性이라는 것이 있을지도 모른다. 바람이 부는 날에 태평양에 있었을 때의 내가 다른 때보다 더 남성적으로 느꼈다면, 반대로 무덥고 습한 8월 어느 날의 나는 두말할 나위 없는 소녀였던 것이다.” 이처럼 한 개인의 성정체성이 확고하지 않으며 그 경계를 넘어설 수 있다는 생각은 「손님」에서 이웃집 남자와 지몬, 지몬 및 이웃집 남자와 서술자 나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 p.159
“동물은 다채로운 음악과 색채의 향연 속에서 살아간다. 예를 들어 돌고래는 인간의 언어보다 훨씬 많은 음악을 통해 소통하는데, 먼 곳에 있는 돌고래에게 자신이 만든 음악을 전달해줌으로써 모든 바다의 돌고래 집단에게 유행가처럼 퍼지기도 한다. 새들의 경우에는 다채로운 화음을 통해 자신의 영토를 알리고 구애 의례를 하기도 하며 적의 등장을 알리기도 한다. 이렇듯 동물은 대부분 화려한 음악의 세계에 사는 데 반해, 인간의 언어는 음악적 선율을 잃어버린 채 단조로운 음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 p.195
다와다 요코는 자신이 글을 쓰기 전에 일종의 의례 같은 것을 한다고 말한다. 그녀는 곧장 글쓰기에 들어갈 수 없으며, 그 전에 “우선 향을 피워야 한다. […] 그리고 작업실에 있는 왼의 위 창문을 열어야 한다. 그다음에 자리에 앉아 필기구를 정돈하고 박수를 두 번 쳐야 한다.” 마치 차를 마시기 전에 다도를 하듯이, 다와다 요코는 글쓰기 전에 이러한 의식을 행하는 것이다.
--- p.217쫃
다와다 요코는 문자가 지닌 낯선 얼굴을 이야기하며, 글쓰기가 우리를 일상에서 벗어난 낯선 곳으로 데려갈 수 있음을 강조한다.
“모든 알파벳 자모는 한 사람의 등과 같다. 그것은 언제나 등을 돌릴 수 있다. 자신이 쓴 텍스트를 마지막 글자 하나까지 다 알고 있다고 믿는 작가는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알파벳 자모가 몸을 돌리면, 낯선 얼굴이 드러난다.”
--- p.222
번역은 흔히 출발언어와 도착언어 사이에 놓여 있는 장애물을 극복하여 출발언어에서 도착언어로 넘어가는 과정으로 생각되지만, 다와다 요코는 이러한 다리를 넘어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다리 사이에 있는 틈들, 사잇공간으로서의 바다에 주목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말한다. 완전한 번역이란 불가능하다고 한다면, 번역가는 비단 출발언어를 번역하는 도착언어에 내재한 다양한 잠재성뿐만 아니라, 도착언어의 관점에서 출발언어 자체에 내재한 다양한 잠재성도 고려하며 번역이라는 문제를 성찰해야 한다.
--- p.284
통념적으로 번역은 원전에 해당하는 출발언어를 그 사이에 놓여 있는 장애물을 넘어 도착언어로 성공적으로 옮겨놓아야 성공한 것으로 간주된다. ‘번역하다ubersetzen’라는 단어의 또 다른 의미를 찾아보면, ‘-로 건너게 해주다’라는 타동사와 ‘-로 건너가다’라는 자동사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이 두 경우 모두 특정한 공간적 구도가 떠오르는데, 두 개의 지점이 있고 그 지점 사이에서 건너가야 할 어떤 장애물이 놓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 번역은 그러한 장애물을 넘어 무언가를 옮겨놓는 작업인 셈이다. 따라서 번역은 공간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p.300
다와다 요코는 일본에 대한 유럽의 잘못된 시선을 지적하고 자신의 역사에 대해 제대로 교육하지 않는 일본을 비판하면서,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의 방사능 유출로 인해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는 이웃국가 한국을 언급한다. 그러면서 일본의 잘못으로 죄 없이 같이 대가를 치르고 있는 한국에 대한 미안함과 일본과 달리 세계와 더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개방적인 정책을 펴는 한국에 대한 칭찬을 곁들인다.
이처럼 다와다 요코가 일본의 역사왜곡 및 일본에 대한 유럽의 잘못된 시선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세계와 소통하며 다양한 시점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 p.3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