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싸울 때마다 붉은 피를 산과 들에 뿌려왔으나 배달얼은 잇달아 끊임이 없이 흐르고, 싸움터에서 굽힐 수 없는 배달의 용기는 괭이를 들어 밭을 일구는 여름지기가 되어 어떤 가뭄이나 큰 장마에도 굽히지 않고 곡식을 내었으며 가슴에 더운 불을 지폈습니다. 벗들의 쓰러짐을 내 죽음으로 맞서 싸우는 넋은 내 이웃을 돌아보며 함께 사는 두레가 되어 우리를 배달다운 배달, 사람다운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때인가 들어온 불교와 유교는 슬그머니 우리를 타고앉아 우리의 풍습을 못난 것으로 몰아세우더니 마침내 제 뜻을 이루기 위해서는 아무리 못된 꾀라도 부리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또 저 신라인들이 오랑캐 군사를 이 땅에 불러들이는 것으로 나타나고야 말았습니다. 단군 한아비께서 한웅천황의 뒤를 이어 나라를 여신 지 3천 년, 어느 누가 함부로 제 배달 됨을 잊고 제 핏줄을 베고 짓밟기 위해 스스로 서토 오랑캐까지 불러들인단 말입니까? (252-253쪽)
“한낱 계집에게 놀아나고 몇몇 간신배에 속아서 나라를 요 모양 요 꼴로 만든 임금이라면 나라를 다스릴 자격이 없는 것 아니겠소?”
“스님은 이 나라가 임금 한 사람의 나라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까? 임금 한 사람이 잘못되었다고 나라가 없어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칠 거라고 믿는다면 스님은 수백만 백성을 조금도 생각하지 않은 것이 됩니다.” (260쪽)
“고구려의 을지문덕이나 연개소문 등은 오랑캐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그 이름만 듣고도 꼬리를 내리고 달아나는 무서운 장수들이었습니다. 그런 장수들이 서토 오랑캐들한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으니 망정이지 신라로 눈을 돌려 군사를 휘몰아 쳐들어왔더라면 참으로 얼마나 맞버티어 싸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김유신과 김춘추한테 더러운 잔꾀 말고는 간도 쓸개도 없이 울며불며 서토 오랑캐들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리는 재주밖에 무엇이 더 있습니까? 툭하면 서토 오랑캐들한테 달려가 고구려와 백제가 신라를 괴롭히니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한 번이라도 고구려에서 괘씸하기 짝이 없는 신라를 혼쭐내기 위해 군사를 보낸 일이 있었습니까? 백제가 신라를 괴롭힌다는 핑계로 오랑캐 군사를 끌어들였지만, 그동안 김유신이 두 손을 묶고 앉아서 백제에 당하기만 했습니까? 백제 임금의 잘못을 말씀하셨지만, 그가 누구의 덫에 걸려 저리 되었습니까? 뒤에 숨어서 충신들에게 없는 죄를 씌워 죽이게 하고 백성들을 도탄에 빠뜨린 김유신이라는 자가 어찌 함부로 남의 그릇됨을 말할 수 있으며, 삼국정립을 저버리고 삼국통일을 입에 올릴 수 있다는 말입니까?” (262-263쪽)
“저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덤비기 때문에 우리 신라군이 힘을 내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신라군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움에 나서기만 한다면 저들은 섶으로 만든 울타리처럼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모두들 입을 다물고 있는데 좌장군 품일이 큰 소리로 말했다.
“바로 그것이오. 스스로 싸움에 나서고자 하는 마음이 없다면 장군들이 아무리 힘껏 싸워도 군사들은 몸을 사리고 오늘 같은 꼴을 되풀이할 뿐이오.” (388쪽)
화랑낭도들이여, 조금만 기다려라. 여기, 그대들의 벗 화랑 관창이 간다. 오늘은 기어이 적장 계백의 목을 들고 저승에 가서 관창이 하루 늦었음을 빌리라. 신국 화랑이 비겁하지 않았음을, 관창이 신의 없는 자가 아니었음을 그대들은 알리라.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다오. (430쪽)
“보라, 저 신라 배달의 용기를!”
웃음이 언제라도 다시 터져나올 듯 아직 눈가에 눈물이 번지는 그 얼굴, 그 목소리로 계백은 아낌없이 칭찬했다.
“다시 왔으나, 묻지 않겠다. 꺾이지 않는 신라 배달의 용기를 높이 받든다. 마달, 기호! 그대들은 저 신라 배달과 겨루기를 다짐했다 하나 나는 허락하지 않는다. 이곳은 배달과 배달이 맞서 겨루는 겨룸터가 아니라 군사들이 나라의 존망을 걸고 싸우는 싸움터다. 한 사람을 놓고 여럿이 싸울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싸움터이니, 너희들의 겨룸은 오히려 이 싸움을 욕되게 하는 것이 된다. 그대 배달들은 목숨을 두고 서로 겨루기를 바라나, 나는 허락하지 않는다. 창칼로써 배달얼까지 겨룰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배달얼은 참으로 목숨을 사랑하는 맑은 용기여야 한다.” (438-439쪽)
배달얼을 저버리고 나라를 지켜야 할 것인가, 나라가 망하더라도 배달얼을 지키고 바른길을 가야 할 것인가?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다. 마침내 번쩍 번쩍 눈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장수들은 한목소리로 외쳤다.
“보냅시다!!”
그렇다! 우리는 자랑스러운 백제 싸울아비다! 온몸이 찢기고 뼈가 바숴진다 해도 우리가 배달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저 어린 배달의 목이 신라군에게 어떤 영향을 준다 하여도, 어머니 가슴에 피를 뿌리고 내 어린아이들이 저들의 종이 된다 하여도. (444-44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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