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리기 말이야.”
대교 위로 바람이 넘실거렸지만 그녀가 어찌나 꼿꼿이 서 있는지 바람 한 자락 없는 곳에 홀로 서 있는 것 같았다.
“달리기요?”
그녀가 팔짱을 꼈다. 단단한 몸과 자신만만한 표정에 왠지 주눅이 들었다.
“모임 나오기 전에 잘 달릴 수 있는 몸을 먼저 만들면 좋을 것 같아서. 어떻게 생각해?”
“아니, 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내게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다음 주부터 방학이지?”
“네.”
“일주일만 나랑 달리자.”
그녀가 내 어깨에 손을 척 올리며 제안했다. 아니, 그건 제안이라기보다는 명령에 가까웠다. 열정으로 활활 타오르는 그녀의 커다란 눈동자가 나를 압도했다.
“세린공원 어때?”
아니, 별로인데……. 벌써 폭염주의보가 심심찮게 뜨고 있는데. 올여름 진짜 덥다는데. 한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매일 달리자는 말인가요? 진심으로요?
“좋아, 월요일 10시 공원 정문에서 봐. 오케이?”
--- p.24
“나는 일몰이 너무 좋아.”
그녀가 옥상 가장자리 난간에 올린 손에 턱을 괴며 말했다.
“이렇게 멋진 노을은 처음 봐요.”
“내가 좋아하는 배우 별명이 일몰 사냥꾼이거든. 그래서 나도 노을을 좋아하게 됐어. 보면 볼수록 빠져든다고나 할까. 그냥 하염없이 바라보게 돼. 온도, 습도, 구름양, 계절, 시간에 따라 노을이 매번 다르다는 걸 알고는 완전히 사랑에 빠져 버렸어.”
그렇구나.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왜 좋아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이구나. 신기하다. 나는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전혀 모르는데. 나 자신을 생각하면 여전히 깜깜할 뿐인데.
그건 어떤 기분일까. 내가 어떤 사람이고 누구인지 잘 알고 있는 느낌이란. 선택의 순간에 주저 없이 결정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과 친하다는 건 어떤 걸까. 잘까지는 아니어도 어렴풋하게라도 좋으니 나를 좀 알고 싶다. 그게 힘들다면 뭐라도 좋으니 사랑해 보고 싶다.
--- p.72
문틈으로 가족의 모습을 훔쳐봤다. 환하게 웃으며 쉴 새 없이 이야기를 나누는 그들은 완벽해 보였다. 그리고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 보였다. 내가 없는데도, 아니 내가 없기에 더 완전해 보였다. 혈연으로 연결된 사람끼리 알 수 있는 친밀함과 끈끈함. 내가 죽었다 깨나도 이해할 수 없는 그 뜨거운 연결 고리가 훤히 들여다보였다. 내 눈은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뇌리에 새겨 넣었다. 앞으로 이 이미지가 시도 때도 없이 나를 괴롭힐 거라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가방을 멘 채 그대로 집을 나왔다. 정처 없이 발길 닿는 대로 떠돌아다녔다. 왠지 집에 들어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빠져도 완벽한 가족, 내가 없어도 행복한 가족을 한 번 더 본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동안 이를 악물고 버텨 오던 멘탈이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다.
--- p.113
“졸업하면 고생 끝인 줄 알았지. 웬걸. 취준생이 돼 보니까 더 빡세. 아주 캄캄한 터널이야. 아무것도 안 보여. 뭐가 보여야 앞으로 걸어갈 거 아니냐고. 아, 씨. 욕 나올 뻔했다.”
나도 언니를 따라 얼음 하나를 물었다. 사탕을 깨물듯 오도독 얼음을 깼다.
“하루는 전 여사를 붙들고 하소연을 했어. ‘엄마, 사는 건 언제쯤 쉬워져’ 그랬더니 진 여사 왈. ‘죽을 때까지 안 쉬워져. 이번 파도가 지나서 휴, 안도하면 또 다음 파도가 몰려와. 계속 몰려와.’ 이러는 거야. 나는 실망했지. 그래서 또 질문을 했어. ‘그럼 엄마, 나이 들면 좀 현명해지는 건가’ 그랬더니 전 여사가 이렇게 말해. ‘아니던데? 더 멍청해지던데’ 나는 정말 정말 실망했어. 몸이 낡으면 머리라도 좋아져야 공평한 건데 지금보다 더 멍청해지다니. 구원은 없는 거구나 싶었지.”
언니가 자못 비장해진 얼굴로 나를 골똘히 바라봤다.
“그래서 달리기를 시작했어.”
언니가 유리컵을 소리 나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달려 보니까 좋더라고. 머리도 맑아지고. 인생 장난 아니구나. 삶은 원래 힘든 거구나. 그걸 내가 받아들이는 유일한 순간이 달리기를 할 때야.”
--- p.147
“친부모 찾기를 그만두면서 스스로와 약속한 게 있어.”
언니가 혼잣말을 하듯 낮게 읊조렸다.
“나 스스로를 잘 대해 주기로 했어. 그래야 남들도 날 소중하게 대할 테니까.”
그 말을 듣고 뜨끔했다. 나는 누구에게도 1순위가 아니었다. 가족 안에서도, 하나뿐인 친구 시영이한테도, 선생님이나 선배 사이에서도 한 번도 1순위였던 적이 없었다. 그게 늘 불만이었다. 가까운 사람들한테 기대하다가 실망하는 걸 반복하는 사이 내 안에는 서운함만 쌓였다. 마음 가득 쌓인 서운함은 화가 되었고 그건 누가 건드리기만 해도 쉽게 폭발하는 다이너마이트였다.
언니의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봤다. 꼭 누구에게 1순위여야만 하나? 나 스스로에게 내가 1순위면 되지 않나? 언니가 예전에 말했지. 아무도 날 칭찬해 주지 않으면 나 스스로 칭찬해 주면 된다고. 그러고 싶다. 나 자신을 내가 아껴 주면서 칭찬해 주고 싶다. 그러다 보면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거나 답답하게 참지 않고, 부당한 건 부당하다고 잘못된 건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언젠가는 그럴 수 있지 않을까?
--- p.1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