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는 홀로 섰다. 사지로 몰아넣으려는 악의에 찬 재판관과 방청객 앞에서 예수는 혼자일 뿐이었다. 새벽닭이 울기 전에 세 번을 부인하리라던 베드로만 멀찌감치 서 있었다. 극악한 상황에서도 예수의 답변은 위엄과 진실을 지키고 있었다. 묵비권을 적절히 행사하며 어려운 질문을 따돌리기도 하고 때로는 명쾌하게 답변했다.
“네가 유대의 왕이냐”는 빌라도의 질문, “그대가 하느님의 아들인가”라는 가야바의 질문에 예수는 “그것은 너의 말이다”라고 함으로써 직접적인 답변을 피했다. 빌라도에게 “내 왕국은 이 세상의 것이 아니다”라고 말한 예수의 답변은 로마제국의 권위를 전혀 손상시키지 않았으며 반역죄에 해당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바로 '하느님의 아들'로서 하늘나라가 자신의 왕국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예수는 부질없는 변론을 늘어놓지 않았으며 “나는 세상 사람들에게 버젓이 말해왔다. 내가 숨어서 말한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들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아라”하고 역공을 펴기도 하였다. 예수는 비굴하지도 그렇다고 무리한 주장을 내세우지도 않았다. 최선의 변론이며 방어였다.
예수는 위대한 변론가였다. 4대 복음서에는 마흔한 가지의 기막히게 훌륭한 비유들이 나온다. 파종과 수확, 참고 기다리는 농부, 겨자씨, 문지기, 재판관에게 가는 길, 누룩, 보물, 자비로운 고용주, 두 아들, 감독에 임명된 종 등 보석 같은 비유를 보면 예수가 언어의 연금술사였음을 알게 해준다.
독일 튀빙겐 대학 신학교수 요아킴 예레미아스의 노작 '예수의 비유'는 이 마흔한가지의 비유를 자세하게 비교분석한 뒤 그것이 하나도 어그러지지 않고 아귀가 꼭 맞아떨어지는 절묘한 비유들임을 논증하였다.
광야에서 악마의 유혹에 맞서 보여준 그의 행동은 그가 얼마나 기민한 사람이며 임시변통에 능한지 알게 해준다. “하느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더러 빵이 되라고 하여 보시오”라는 악마의 요구에 대해 그는 “사람은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답변한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라, 엎드려 절하면 세상의 모든 왕국을 주겠다는 등 악마의 또 다른 유혹에 대해서도 예수는 “주님이신 너희 하느님을 떠보지 말라는 말씀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다”고 답변한다.
이미 구약에 정통한 예수가 그 가운데 가장 적절함 말을 인용하여 악마를 물리치고 있는 것이다. 사후에 덧칠이 되었든 아니든 간에 적어도 복음서들이 전하는 예수의 변설은 가히 탁월하다.
그 야만적인 재판에서 자신보다 더 훌륭한 변호사는 있을 수 없었다. 군더더기 변론은 예수의 위대함에 오히려 손상이 될 가능성이 많았다. 이미 운명이 정해진 재판이었다.
“네가 하느님의 아들인가”라는 물음에는 쌍올가미가 준비되어 있었다. 시인하면 신성모독이요, 부정하면 사기꾼이 되었다. 어떻게 대답하든 목숨은 이미 적의 수중에 있었다. 예언의 실현이기도 하였다.
--- p.50
십자가에 매달인 예수, 두 발과 두 팔을 심자가에 못박힌 채 죽음을 기다리던 예수, 예언된 운명을 충실히 따랐던 예수. 그가 숨을 거두기까지 무슨 생각을 했을지 누구도 알 수 없다. 복음서에 적힌 간단한 기록을 보면 단지 그가 엄청난 고통을 느꼈으리라는 점만 짐작할 뿐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는 자신이 아버지라고 부르던 하느님께 '홰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외쳤다. 만약 그의 외마디 절규가 없었다면 우리는 단지 '신의 아들'일 뿐인 예수에게 별다른 매력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기계처럼 고안된 운명의 틀 안에서 움직이는 그를 숭배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사람의 아들'로서 느끼는 그 고통의 무게와 깊이 때문에 우리는 그에게 무한한 연민을 느끼고, 고마움과 동시에 엄청난 죄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 p.56
모어는 미끄러운 단두대로 올라가면서 사형집행관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집행관, 나는 자네를 위해서 기도하겠네. 제발 나를 안전하게 부축해 올라가 주게. 내려올 때는 나 혼자서 잘 내려올 테니까.' 그리고 사형집행에 임하는 집행관에게 다음과 같이 격려하였다. '힘을 내게. 자네 일을 하는 데 두려워하지 말게.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또 다른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는 사형집행 전에 머리를 쑥 내밀며 자신의 수염이 잘려지지 않게 하였다는 것이다. '수염은 반역죄를 저지른 적이 없으니까'라는 말과 함께.
(토머스 모어가 사형당하기 전에...)
--- p.133
...드레퓌스가 무죄라는 진실을 향한 행군에는 수많은 엑스트라가 등장한다. 또 하나의 위대한 엑스트라, 그가 바로 조르주 클레망소였다. 그는 외국신문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 프랑스는 정의와 자유라는 인간의 권리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현대사회가 예전에는 몰랐던 행복을 지표로 삼고 발전하도록 보장해주는 길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말에 반영되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두 나라를 갖고 있다. 자기의 모국과 프랑스이다.' ... 그 정의가 이제 의미없는 빈말이 되어버렸고 폭력이 고삐를 벗어났다. 또다시 우리가 인종과 종교의 박해자가 될때, 관용과 자유라는 표어가 증오의 외침에 그 자리를 양보하게 될때, 그때에도 우리는 바로 이 평야, 이 강물, 이 산들을 소유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프랑스 땅위에 앉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우리는 우리조상이 창조하려 했던, 프랑스 조상들이 실현하라고 우리에게 물려준 그 프랑스가 아니게 될 것이다. '
--- p.229-230
...드레퓌스가 무죄라는 진실을 향한 행군에는 수많은 엑스트라가 등장한다. 또 하나의 위대한 엑스트라, 그가 바로 조르주 클레망소였다. 그는 외국신문을 읽고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 프랑스는 정의와 자유라는 인간의 권리를 발견하였다. 그것은 현대사회가 예전에는 몰랐던 행복을 지표로 삼고 발전하도록 보장해주는 길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말에 반영되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두 나라를 갖고 있다. 자기의 모국과 프랑스이다.' ... 그 정의가 이제 의미없는 빈말이 되어버렸고 폭력이 고삐를 벗어났다. 또다시 우리가 인종과 종교의 박해자가 될때, 관용과 자유라는 표어가 증오의 외침에 그 자리를 양보하게 될때, 그때에도 우리는 바로 이 평야, 이 강물, 이 산들을 소유할 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프랑스 땅위에 앉아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우리는 우리조상이 창조하려 했던, 프랑스 조상들이 실현하라고 우리에게 물려준 그 프랑스가 아니게 될 것이다. '
--- p.229-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