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요리는 대표적인 중화요리 중 하나다. 흔히 사천요리라고 하면 매운맛을 먼저 떠올리지만, 사실 매운맛을 내는 고추는 17세기 명 말기에나 중국에 전해졌다. 고추가 식용으로 재배된 것은 더 이후인 18세기 초로 추정된다. 따라서 매운맛이 특징인 사천요리 또한 길게 잡아도 사백 년을 넘지 않는다. 그 이전의 사천요리는 고추가 아니라 산초를 사용했다. 채소를 절여서 만드는 사천 지역의 반찬요리 착채(자차이)?菜도 촉蜀, 즉 지금의 사천을 근거지로 했던 유비와 제갈량은 물론 사천 출신의 미식가 소동파도 전혀 언급한 적이 없다. 마파두부는 근대 이후에 진陳이라는 할머니가 처음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그렇게 보면, 마파두부의 역사도 고작 백 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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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중국에서는 지극히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육류나 생선의 회를 전혀 먹지 않는다. 정식 중화요리에도 날음식은 나오지 않는다(북경과 상해 같은 대도시에 일본 음식점이 진출하여 생선회가 유행한 것은 1990년대 이후에 일어난 새로운 현상이다). 그러나 춘추시대에는 생식이 매우 일반적이어서 공자도 육류 회를 즐겨 먹었다. 『예기』에 “회 양념으로 봄에는 파, 가을에는 겨자를 사용하고 사슴 생고기에는 간장을 사용해야 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왜 날것을 그대로 먹으려 할까? 현대인은 미식을 추구하여 조림, 찜, 백숙, 튀김, 훈제, 꼬치구이 등 다양한 조리법을 두루 사용하기 때문에 오히려 회 같은 생식이 맛있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고대 사람들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상황이 180도 달라진다. 철이 발명되기 전에는 음식을 가열하려면 손이 많이 갔다. 냄비, 쟁반, 사발이 다 도기여서 찌거나 졸이는 조리법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도기는 열전도율이 낮아 가열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농작업이나 수렵 혹은 전쟁처럼 촌각을 다투는 때에는 천천히 가열할 여유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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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공자가 노나라 애공哀公을 알현하고자 가까이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애공은 공자에게 복숭아와 기장밥을 내어 먹도록 권했다. 공자는 먼저 기장밥을 먹고 그다음 복숭아를 먹었다. 그 모습을 본 일동은 모두 입을 가리고 웃었다. 애공이 공자에게 “기장밥은 먹는 게 아니라 복숭아털을 벗기기 위한 것이요”라고 말하자,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도 알고 있사옵니다만 기장은 오곡 중에 가장 으뜸이라 조상의 제사를 모실 때도 최상의 제물로 쓰입니다. 하지만 복숭아는 여섯 가지 나무 열매 중 가장 아래에 있습니다. 군자는 천한 물건으로 귀한 물건을 벗기는 건 들은 적이 있사오나, 그 반대는 들은 적이 없습니다. 오곡의 으뜸인 기장으로 과실의 말석에 있는 복숭아의 털을 벗기는 것은 중한 물건으로 허접한 물건을 벗기는 게 됩니다. 이는 대의에 어긋나는 일로 저는 그리할 수 없사옵니다.”
공자가 애공을 충고하고자 그렇게 말했는지 아니면 귀족의 사치스러운 식사법을 몰랐는지는 차치하고, 이 일화로 의외의 사실을 알 수 있다. 복숭아털을 벗기기 위해 내놓은 기장밥에 젓가락이 따라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공자가 자연스럽게 손가락으로 밥을 쥐었던 것은 당시 풍습이 그랬기 때문이 아닐까? 만일 지금처럼 젓가락을 사용해 밥을 먹었다면, 공자가 손으로 기장밥을 떠먹지는 않았을 게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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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추 이상으로 많이 사용한 향신료는 귤 껍질이다. 『제민요술』 권10에 중국 외의 산물로 기록된 점으로 보아 처음에는 외래 향신료였을 것이다. 『제민요술』에는 귤을 말린 껍질을 53종의 요리에 사용하고 그중 3종은 잎과 함께 사용한다고 나온다. 또 귤즙을 조미에 사용한 예도 볼 수 있다. 이때 귤은 식용 감귤류의 총칭으로 그 종류는 다양하다. 물론 중국에서 난 귤도 있다. 귤 껍질이 왜 외래 향신료로 기록되었는지는 불분명하다. 『제민요술』에 등장하는 말린 귤 껍질은, ‘가금류 국’, ‘양발굽국’, ‘가물치국’ 등 대부분 육류나 생선 요리에 사용했는데, 냄새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외래 귤과 중국 귤은 그 성질이 미묘하게 다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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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고추는 중국에서 나지 않고 명 말기에 외국에서 들어온 것이다. 대항해시대에 멕시코와 아마존이 원산지인 고추가 세계 각국으로 퍼져 재배된 것이다. 그에 관해서는 현재까지 이견이 없다. 사실 만력24년(1596년)에 간행된 이시진의 『본초강목』에는 아직 고추가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중화요리에 고추를 사용한 것은 겨우 300년 남짓이다. 매운맛이 주를 이루는 사천요리도 옛날에는 고추를 사용하지 않았다.
물론 고추가 외국에서 들어오기 전에도 사천성과 호남성 사람들은 매운 것을 좋아했다. 오래전부터 겨자를 조미료로 사용했고, 원대의 매명은 『음식필지』에 양생의 관점에서 겨자의 효용을 소개했다. 고추가 중국에 들어온 후에도 겨자를 먹는 습관은 없어지지 않았다. 이어李漁의 『한정우기』에 “매운 국을 만드는 겨자의 씨앗은 오래될수록 좋다. 이것을 요리에 넣으면 맛있지 않은 것이 없다”라고 썼다. 청대에도 겨자를 조미료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런 기호 때문에 고추가 중국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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