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제】
‘소요’는 의태어로 유유자적하는 모습이고, ‘유’는 노닌다는 뜻이므로, ‘소요유’는 아무런 구속 없이 자유롭게 노닌다는 의미이다. 물론 단순히 평범한 놀이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소요유는 현실을 초극하여 도의 세계에서 도와 하나가 되는 것으로서, 개인적으로는 ‘하늘’의 동반자가 되고 사회적으로는 ‘사람’의 동반자가 되어서 ‘천인합일天人合一’의 경지에서 노닒을 의미한다. 본 편은 장자 내편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내편 7편을 총괄할 뿐만 아니라, 장자 전체 33편을 관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우언과 살아 꿈틀대는 비유를 통하여 자신의 주장을 펼치고 있는데, 기발한 상상과 낭만적인 색채가 넘쳐나서 어느 문학작품에도 뒤지지 않는 매력을 갖고 있다. 또한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뛰어난 문학적 강성으로 성찰하고 있어서, 독자로 하여금 철학적인 사변의 딱딱함에서 벗어나, 푸근한 공감을 느끼도록 해주고 있다.
본 편은 크게 4개의 장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제1장은 구만 리 상공을 날아올라 북쪽 바다에서 남쪽 바다로 날아가는 붕새 이야기로 시작하므로, 〈웅비하는 붕새처럼〉이라고 부제를 달았다. 붕새의 웅비를 통해서 소요유를 생생하게 형상화하고 있다. 아울러 소요유를 구현하는 사람이 바로 도가의 이상인 지인至人이고 신인神人이며 성인聖人임을 일깨워 주고 있다.
제2장 〈천하를 준다 해도〉는 천자의 자리를 양도하려는 요堯 임금과 이를 거절하는 허유許由의 이야기이다. 허유는 웅비하는 붕새, 다시 말해 소요유를 구현하고 있는 자이기에 천자라는 직책을 사양한다. 이는 소요유가 천자보다도 더 큰 일을 할 수 있고, 그렇기에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제3장 〈막고야산의 신인들〉은 막고야산에 있는 신인들에 대한 묘사를 통하여, 소요유를 거듭 설명하고 있다. 도의 세계에서 도와 함께 하는 신인들은 개인적으로 절대자유를 누리면서, 아울러 풍년을 들게 하는 커다란 능력을 소유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소요유가 개인적 차원의 현실 도피가 결코 아님을 잘 보여준다.
제4장 〈쓸모 너머의 쓸모〉는 장자의 친구이자 당대 최고의 말꾼인 혜자惠子와의 대화를 통하여, 세속의 작은 쓸모를 넘어서는 도의 큰 쓸모를 설파하고 있다. 특히 두 사람이 생동감이 넘치는 비유를 들어가며 벌이는 논쟁은 매우 흥미롭다. 소요유의 쓸모가 바로 도의 쓸모이다.
장자가 활동하던 당시, ‘유’는 사회적인 유행이었다. 이 때 ‘유’는 ‘유세遊說’로, 이른바 제자백가諸子百家가 모두 유세객이었다. 장자도 물론 여기에 속하지만, 그의 유세는 달랐다. 대부분이 부국강병으로 요약되는 현실적 목표에 집중하고 있을 때, 그는 난데없이 웅비하는 붕새처럼 소요유하라고 외쳤던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장자의 외침이 현실을 외면하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소요유만이 인간의 존엄성을 보장하는 절대자유를 가능케 할 뿐만 아니라, 세상의 평화에도 결정적으로 기여한다고 장자는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이러한 믿음에서 장자는 소요유를 통하여 ‘도와 함께 하는 웅혼한 삶’을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이하 장자 내편 6편은 모두 소요유를 실현하는 방안을 단계별로 제시하고 있다.
‘도와 함께 하는 웅혼한 삶’은 작은 쓸모를 넘어서는 큰 쓸모를 추구하는 삶이고, 이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 붕새의 웅비이다. 그런데 붕새 이전에 곤鯤이 있다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원래 ‘새끼 물고기’에 불과한 것이 몇 천 리에 달할 정도로 거대하게 성장한 것이 곤이다. 물론 여기에서 ‘성장’은 생물학적 크기보다는 정신적 크기를 염두에 두고 있다.
이는 맹자孟子가 잘 키운 호연지기浩然之氣는 하늘과 땅을 가득 채운다고 말한 것과 똑같은 경지이다. 아무튼 ‘새끼 물고기’가 성장하여 거대한 곤이 되었을 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는데, 그것이 바로 붕새로의 탈바꿈이다. 곤과 붕은 이후 전개되는 장자 내편 6편의 내용을 개괄한다.
〈제물론〉 〈양생주〉 〈인간세〉는 바로 곤의 단계에 상응하고, 〈덕충부〉 〈대종사〉 〈응제왕〉은 붕의 단계에 상응한다. 그러므로 장자, 특히 내편은 ‘소요유’에서 출발하여 ‘소요유’로 귀착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제1장 웅비하는 붕새처럼
1-1 붕새가 높이 나는 이유
북녘 검푸른 바다에 물고기가 있으니 그 이름을 곤鯤이라고 한다. 곤의 크기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것이 몇 천 리里가 되는지 알지 못한다. (어느 날 이 물고기가) 변신을 해서 새가 되니 그 이름을 붕鵬이라고 한다. 이 붕새의 등짝은 그것이 몇 천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다. 성난 듯이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활짝 편) 날개가 마치 하늘 한 모퉁이를 (뒤덮은) 구름과 같다. 이 새는 (큰 바람에) 바다가 움직이면 장차 남쪽 검푸른 바다로 날아간다. 남쪽 검푸른 바다는 천지天池, 즉 하늘의 연못이다.
제해齊諧는 괴이한 일을 기록한 책이다. 이 제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붕새가 남쪽 바다로 날아 갈 때에는 물 위에서 (날개로 수면을) 삼천 리里나 치고, 회오리를 일으키면서 올라가는 것이 구만 리이며, 유월이 내쉬는 큰 바람을 이용하여 멀리 떠나가는 것이다.”
(대기 중의) 아른아른 아지랑이와 뿌연 티끌은 생물들이 호흡으로써 서로 불어 내뱉은 것이다. (이런 자욱한 대지와 달리) 하늘이 푸르고 푸른 것은 그 본래의 빛깔인가? 아니면 (깊고 깊어 검푸른 바다처럼) 멀어서 그 끝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일까? 붕새가 내려다 볼 때에도 역시 이와 같을 따름이리라.
대저 물이 쌓인 것이 두텁지 아니하면 큰 배를 짊어지는 데 그만한 힘이 없다. 한 잔의 물을 마루의 움푹 파인 자리에 부으면 겨자씨가 그 위에 뜨는 배가 되지만, 거기에 잔을 놓으면 (바닥에 착) 달라붙고 만다. 물이 얕고 배가 크기 때문이다. 바람을 축적함이 도탑지 않으면 큰 날개를 짊어지는 데 그럴만한 힘이 없다. 그러므로 구만 리 (높이 올라가면) 그만한 바람이 바로 아래에 있게 된다. 그런 뒤 이제야 (충분한) 바람을 쌓게 되는 것이다.
등에 푸른 하늘을 짊어지고 그 붕새를 가로막는 것이 없는 경우라야 그런 뒤 이제야 장차 남행을 도모한다. 매미나 작은 비둘기가 이것을 비웃으며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재빨리 일어서서 날아오르면 느릅나무나 박달나무 (끝)에 도달한다, 때로는 거기에도 이르지 못하고 땅으로 떨어지고 만다. (그런데 저 붕새는) 구만 리를 올라가서 남행함으로써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어렴풋하게 (먼) 교외로 나가는 사람은 세 끼를 먹고 돌아와도 배가 여전히 든든하지만, 백 리 길을 가는 사람은 전날 밤새우며 식량을 절구질해야 하고, 천 리 길을 가는 사람은 석 달 동안 식량을 모아야 하는 법이다. 그러니 저 두 미물이 또한 무엇을 알겠는가?
작은 지혜는 큰 지혜에 미치지 못하고, 짧은 수명은 긴 수명에 미치지 못한다. 어떻게 그것이 그러함을 알 수 있는가? 아침에 나서 저녁에 스러지는 버섯은 그믐과 초하루, 즉 달(月)을 알지 못하고, 매미는 봄과 가을, 즉 해(年)를 알지 못하나니, 이는 곧 짧은 수명들이다.
초楚 나라 남쪽에 신령한 거북(冥靈)이 있었는데, 오백 년을 봄 한 철로 삼고, 오백 년을 가을 한 철로 삼았다. 상고시대에 거대한 참죽나무(大椿)가 있었는데, 팔천 년을 봄 한 철로 삼았고, 팔천 년을 가을 한 철로 삼았다. 이는 곧 긴 수명들이다. 그런데 지금 (인간 세계에서는) 팽조彭祖가 바로 오래 산 것으로서 특별히 알려져서, 모든 사람들이 그와 나란히 하고자 하니, 또한 슬프지 않으랴!
---「소요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