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워를 끝내고 머리를 말리면서 침실의 주인 중 한 명이 걸어 들어온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스마트폰 빛이 밝힌 내 얼굴 때문인지, 아직 잠들지 않은 사람이 있다는 사실 때문인지, 그의 얼굴은 살짝 놀란 기색이더니 이내 싱긋 웃으며, 내게 “Good night!”이라고 말하고는 2층 침대 위로 올라간다. 나도 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Good night.” 그럴 리 없다.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저 사람은 내게 ‘Good night’이라는 한 마디를 하려고 멀고 먼 여행을 시작해서 돌고 돌아 마침내 이 숙소에 머물게 되었고, 나도 저 한마디를 듣기 위해 한국에서 스무 시간이 넘도록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대륙을 여행하다가, 이 숙소에 머물게 된 게 아닐까 하는. 우리는 때로 그런 순간을 위해 살아가기도 하니까.
--- 「밤_프롤로그」 중에서
나는 그 말이 옳다고 했어. 외로워지러 간다고. 끊임없이 사람과 관계를 맺는 일에 나는 때로 지치고 귀찮고 무력해지는 기분이거든. 그래서 훌쩍 혼자가 되고 싶어져서 떠나는 거야.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누구를 신경 쓰려는 나 자신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곳으로. 그렇게 지내다 보면 문득 외로움을 느끼거든. 우리는 결국 혼자 살아갈 수 없어서 고통스러우니까. 그러면 두고 온 사람들을 생각하게 돼. 한 발짝 떨어져 보면 다들 너무 소중하고 고맙고 미안한 법이거든. 머리로는 이해가 되고 마음으로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뭐, 어쩌겠어. 즐거운 여행하기를.’이라고 말하는 너를 보며 이 여행이 내 생각보다 빨리 끝나기를 바랐지.
--- 「밤 12_ 떠나온 사람, 머무는 사람」 중에서
여행하면서 많은 것들을 담아서 돌아오게 된다. 갖가지 기념품, 사진, 다양한 생각, 경험 등 이곳저곳 여행을 다니면서 나 또한 다양한 것들을 담아서 돌아왔다. 그러나 어떤 여행에서도 ‘사람’을 얻어서 돌아온 적은 없었다. 지금도 우리 셋은 자주 연락하고, 만나고, 옛 사진들을 주고받으며 그 시간을 추억한다. 나에게 남미는 ‘아미고’다.
--- 「밤 29_ 아미고, 남미」 중에서
놀랍도록 평범한 일상적인 행위. 그런데 이 일상적인 행위를 제외한 모든 환경이 낯선 바로 그때, 나는 ‘여행’을 느낀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가다가 나가는 사람을 위해 몸을 비켜주니 들리는 이국의 말, “takk(타크)”. 낯선 곳에서 주문 전이면 언제나 살짝 느끼는 긴장감을 표 내지 않고, 현지어가 아닌 영어로 주문하는 것에 대한 약간의 미안함을 어떻게든 표현하며 주문하는 커피 한 잔.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를 쉼 없이 이야기하는 아이슬란드인들을 지나쳐 자리에 앉아 이방인 사이에 둘러싸인 나. 유명한 랜드마크 앞에서도, 많은 사람이 꼭 찾는다는 핫 스폿에서도 느낄 수 없는 ‘여행’을 나는 이곳에서 느낀다. 낯선 여행지에서 일상인 양 행동하는 내 위선을 짓밟는 이 카페의 모든 것이 내게 말한다. ‘동네 사람인 척하는 위선 따위 집어치워, 여행자.’
--- 「낮_프롤로그」 중에서
여행지를 고르는 과정만큼이나 매우 까다롭고 공정한 과정을 거쳐서 책을 선정한다. 그리고 여행이 끝나기 전까지 어떻게든 다 읽은 후, 그 책을 여행이 끝나기 직전 여행지에서 만난 다른 사람에게 선물하고 그곳을 떠난다. 내 나름의 여행 의식이라 할 수 있다. 마치 그 책이 세계를 둥둥 떠다니는 것이 나의 항해라고 생각하며.
--- 「낮 17_나만의 여행 의식」 중에서
마추픽추가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 위에 서서 수백, 수천 년이 넘게 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유적지를 바라보고 있자니 《코스모스》가 떠올랐다. 오래전 이곳에 살던 잉카족과 나는 같은 조상의 뿌리를 둔 하나의 인류였다. 그들은 나와 어디서부터 분리되어 이렇게 다른 역사를 남겼을까. 그들은 자신의 땅과 전혀 관련 없는 사람들만 드나드는 이곳을 남긴 채 어떠한 풍랑에 휩쓸려 사라져버렸을까. 그들과 나 사이의 공간을 그려본다. 그 속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런 상상이 겹겹이 쌓일수록 내게는 남들은 모르는 재산이 쌓이는 기분이다.
--- 「낮 29_별의 구성 요소」 중에서
이 책은 나를 위한 책이기도 하다. 차갑게 식어버린 잿더미 안에서 미약하게나마 빛을 내며 최선을 다해 타고 있는 여행에 대한 마음을 향한 부채질이자, 여행에 관한 그동안의 기억을 조각내어 장작으로 던져 주고 다시 큰 모닥불로 만들고 싶은 욕심이, 평소라면 꿈도 꾸지 않았을 글들을 끄적이게 만들었다. 지구의 많은 생명체와는 다르게 인류는 자신들이 맞닥뜨린 환경을 받아들이기보다는 극복하며 생존해왔다. 그런 의미에서 인류는 기본적으로 반골기질을 타고났다. 평소 여행 생각이 없던 사람도 분명, COVID-19 시대를 겪으며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이 시간이 지나면 꼭 한번 여행을 가자.’ 그런 마음에 부채질이 될 수 있기를, 상상만 하던 여행에 조금의 색채가 더해지기를. 언제가 당신이, 내가 떠난 여행지에서 이 책의 한 구절쯤 떠올리기를, 감히 바라며.
--- 「에필로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