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상구 (flypaper@yes24.com)
“개가 아닌 다른 것이 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순간도 없어”라고 말하는 역사상 가장 유명한 개 `스누피'로 더 잘 알려진 만화 『피너츠』.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2일에 처음으로 신문에 게재된 이래 전세계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피너츠』는 주인공인 찰리 브라운과 스누피, 그리고 이들의 친구들과의 얽히고 섥히는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을 통해 삶을 반추하는 다양한 메시지를 안겨주는 작품이다.
임상정신과 의사인 저자 트워스키는 『피너츠』를 그린 찰스 M. 슐츠가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 프로이트, 융 등의 쟁쟁한 사상가, 철학자들과 같은 반열에 올려 놓을 수 있는 무게의 작가라고 다소 호들갑(?)을 떨면서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를 밝힌다.
“찰스 M. 슐츠는 인간의 본성을 직감적으로 파악하고 매우 복잡한 심리학적 개념을 단 몇 개의 만화 구도 속에 집약시키는 놀라운 능력을 지닌 예술가다. 찰스 슐츠가 만들어낸 귀여운 등장인물들은 단지 독자를 웃기는 데서 그치지 않고 심리학의 중요한 원칙들을 아주 단순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단순한 그 그림 속에 사실은 매우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저자는 한 알코올 중독자와의 상담 때 시종, 자기가 알코올 중독자라는 사실 자체를 부인하며 매번 술을 마실 수밖에 없는 상황만을 둘러대는 중증 환자에게 찰리 브라운이 매번 공을 차다 넘어지며, “올해에는 꼭 저 공을 우주 밖으로 날려 버릴 테다” 하며 다짐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놀랍게도 만화를 지그시 읽던 알코올 중독자는 한바탕 시원하게 웃어제끼더니 “그게 바로 나요” 하면서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임을 인정하게 되었다는 스토리다.
그리하여 저자가 이 책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보다 명확해진다. 환자의 눈에 정신과 의사는 부담스러우면서도 위협적인 존재, 매번 핀잔만 일삼는 아버지 같은 존재로 다가온 반면, 순진하고 착하다 못해 늘상 좌절하고만 사는 『피너츠』의 찰리 브라운은 자신의 거울 이미지로서 편안하게,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로서 다가온다. 그래서 보듬어 안게 된다.
`자존심' `걱정' `자책감' `우울' `가치' `처세술' 등, 인생을 살아 가면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짐이 되어 꼬리표처럼 달라붙는 여러 상황을 열 세 개 항목으로 나누어 스케치를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이다. 각 항목은 『피너츠』의 간결한 만화로 정리되기도 하며 되새겨지기도 한다. 글로 나열해서 궁색해지는 말 또한 『피너츠』의 주인공들은 요령껏 전달한다.
한물 간 듯 하지만, 카툰의 세계에서는 여전히 독보적인 지위를 확보하고 있는 `일상 속에서의 깨달음'을 도출하는 형식의 만화는, 잘하면 `아포리즘'이 되지만, 조금만 오버하면 `썰렁함의 극치'가 된다. 아포리즘과 썰렁함의 양 극단에서 저자가 『피너츠』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슐츠의 만화 주인공들은 독자에게 어떤 해석을 내려주지 않는다는 이유. 그냥 자기 식대로 행동하고 독자에게 해석을 맡긴다는 것. 의사보다는 환자로부터 나오는 통찰력이 치료의 효과를 보다 극대화할 수 있다는 이유이다.
찰리 브라운과 그의 친구들이 겪는 다양한 인생 경험의 세계 속에서, 실패하고 좌절하면서도 또 다짐하고 위로 받는 상황을 지켜보다 보면, 어쩌면 우리의 인생이 조금 더 뛰어 볼 만한 것이 아닌가 싶어지게 된다.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다양하게 존재하지만, 그에 앞서 그 행복의 단맛을 보기 위해서는 피치 못할 불행의 요소 또한 무수히 많다. 찰리 브라운은 바로 그 좌절의 현실성을 독자들에게 전한다. 사고와 좌절은 이미 예정되어 있는 바, 너무 두려워 말고 좋은 것부터 먼저 시작하라고 한다.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의미를 깨닫다 보면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