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발생시기가 6~7천 년 전이라 해도 지금까지 동양의 문명이 세계의 정신이 된 적이 없었다.
기독교가 서구의 정신, 미국의 정신이 된 이후에 더 더욱 동양의 정신은 지배자들의 폭력과 증오에 가려 세상에 제 모습을 드러내 보일 수가 없었다. 그 혐오스러운 간난의 세월 속에 여성은 오랜 시간 동서양을 막론해 천대와 인종이요 차별과 멍에뿐이었다.
여태껏 여성에 대한 차별과 유린은 남성위주의 사회에서 어디까지나 남성 우월감에 배태된 씨앗이었다. 이런 척박한 현실 속에 여성시대의 도래함이 21세기의 화두가 되어야 하는 당위성은 무엇이며 21세기 여성의 힘이 자구의 운명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힘의 원천은 무엇인가.
지금까지 수천 년 역사의 주인공들은 남성이었다. 정복하기 위해 끝없는 혈투를 벌였고 소유를 위해 수없이 많은 전쟁을 벌여 오대양 육대주에 피가 마를 날이 없었다. 탐욕을 일으켜 재물과 향락에 빠져 수많은 선남선녀를 타락시키고 오만이 극에 달해 사바의 자연을 처절하게 황폐화시켰으며 그리고 여인을 얼마나 학대하였던가.
순간에는 여성은 남성의 소유물이요 씨받이요 정액받이라는 관념이 남성의 대뇌의 가장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천만번을 이야기해도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평화스러운 어머니의 모습은 꼭 막혀 숨통이 터져나갈 듯한 지구의 배출구임에 틀림이 없다.
여성은 어려서부터 평화를 먹고 자란다. 모든 사물을 폭력과 욕망과 정복의 대상으로 접근하지 않는다.
꽃을 만나도 물주고 가꾸고 피어나게 하지 그만 꺾어 죽여 버리지는 않는다. 멱살 잡고 머리 터지게 싸우는 건 남성이요, 어디까지나 이것을 뜯어 말리는 건 여성의 역할이었다. 여성의 마음에는 본시 평화의 마음이 넓게 자리 잡고 있다. 자라나는 과정에서 좋은 비료를 주어 훌륭한 인간으로 키워 가면 남성의 상징인 폭력과 욕망과 정복과 다툼대신 비폭력과 배품과 화해와 나눔의 모습이 천하에 자리매김 될 수 있다.
때로는 세상이 너무 냉혹해져 그 속에서 자라난 여성들도 물들고 거칠어져 남성을 두들겨 패는 여성이 늘어나고 남성을 성욕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게슴츠레한 눈들이 돋아나며 자신의 가족의 이익을 위해선 독선과 아집만이 남아 떼 지어 다니며 광란의 탈춤을 추어대고 혹은 산에 피는 꽃을 꺾어 자신의 꽃병에 꽂는 추한 양상이 보인다면 이것은 참담한 모습일 뿐이다. 여성이 남성지배의 사회구조에서 즐겨 찾던 폭력과 욕망과 정복과 다툼의 씨앗을 그대로 닮아간다면 지구의 비전은 없을 뿐이다.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는 대비라는 보배가 잠자고 있다. 모든 인간에게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잠자고 있다.
우리는 남의 슬픔을 보고 눈물을 흘릴 때가 있다. 남의 불행을 보고 슬퍼하는 마음, 영화나 TV영상에 슬픈 장면을 보고 흘리는 눈물, 이 모두가 대비의 한 조각들이다.
여성이 눈물이 많은 것은 대비의 씨앗이 너무 많이 축적되었기 때문이다.
남의 슬픔을 나의 슬픔으로 남의 간난을 나의 간난으로 쓸어안는 원초적으로 안고 있는 사랑의 씨앗이 작은 가슴에 풍요롭게 쌓여있다.
이 보고의 그릇은 그냥 놓은 그대로는 절대로 광채가 나지 않는다. 닦아야 한다.
이 세상에 가장 천대 받은 아프리카가 다음 세상에 가장 축복 받아야 할 땅덩어리라면 아프리카 못지않게 천대 받아온 여성의 미래에 밝은 광명이 비추어져야 할 것이다.
돌이켜 보면 미국에서도 여성에 참정권을 부여한 것이 1929년,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에서도 그전에는 여성들이 차별을 받았으나 1929년 이후 근 4, 50년밖에 안 되는 세월 속에 그들 스스로 그들의 권리를 찾아 부단히 싸워 감히 남성이 여성을 이유 없이 무시하고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는 경우가 있을 수 없게 되었다. 한국의 여성들도 그간 여권신장을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며 사회 각 분야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진출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여성의 사회적 진출은 지금보다 더 넓게 더 길게 뻗어 나가야 한다. 물론 여성의 일자리에 한계가 있고 사회적 지위가 약하다는 현실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사회적 구조가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지 말고 도전이라는 새로운 창조의 문을 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 자신이 태어난 보람을 찾으려는 뜻이 있어야 한다.
사회를 일으켜 세우는 것은 뜻이다. 인간은 이해에 얽혀 뒹굴고 있는 것 같지만 한 베일을 벗기면 영혼의 고동치는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사람과 사람이 모여 이룬 사회의 원동력은 영혼의 화음이지 현대적 신(神)인 재물의 곡예는 절대 아니다. 영혼의 화음이란 뜻의 모임이다.
꽃이 시들다가도 뜻을 만나면 영롱하게 채색되며, 인간도 시름에 잠겨있다 뜻을 찾으면 설레고 고동치며 밤잠을 설쳐버린다. 가슴 속에 설렘의 물결이 일어나면 마음속에 대비라는 보배가 잠을 깬다. 여성운동의 방향도 잠자는 뜻을 두들겨 깨우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옛날의 한국 여성들은 지금도 별로 달라지지 않았지만 남편과 자식 뒷바라지가 아내 역할의 전부라고 생각했다. 그게 전부라면 현대 한국의 여성들은 여성의 존재의 이유에 대해 크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한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뜻을 찾은 여성에게 묻는다. 여성의 존재이유에 대해 어떤 답을 들을 수 있을까, 여성들은 참다운 어머니가 되기 위해 결혼하는 것으로 안다. 자식은 누가 무어라 해도 세상의 어머니에게 달려 있고, 어머니는 자식을 훌륭하게 키워 사회에 내보내야 할 의무가 있다. 자식을 참되게 키우는 것이 하늘아래 어머니의 도리라고 강조한다.
자식을 내 소유물이라 하며 자식에게 목을 매선 안 된다는 것이다. 내 새끼 내 소유물이니 내 호주머니에 넣고 내가 보는 땅, 내가 보는 하늘만, 땅이요 하늘이라고 우기며 옆에 누가 우는 지 옆에 누가 사는지 그깟 것 알 필요가 없다 하며 내 것만 소유하려 든다면 여성은 결혼해 그 아픈 진통을 겪으며 자식을 낳을 필요가 없다.
한국 어머니의 교육열이라는 게 얼마나 천박한 것인가, 내 핏덩이 내 것이라는 소유욕이 들어앉아 어머니는 자신의 아이들을 어려서부터 자신의 갈증의 도구로 삼아 달달 볶는다. 이런 걸 뜨거운 교육열이 남긴 높은 교육수준이라 하니 한참 웃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환경 속에서 자란 아이들은 좋은 대학, 좋은 직업을 가져도 자기 자신을 보는 공부를 하지 못했기에 자본주의의 냉혹한 법칙에 길들여져 지성적 이기주의자를 만들어 자신의 부모같이 소유와 존재론적 사고의 사슬에 갇혀 결국 정견(正見)을 볼 수 없게 되고 만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추한 것은 남의 것이고 우리 가정의 이익을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고통스러워하는 사람을 위해 아파하며 울어줄 줄 모르는 사람들 그들은 절대로 선진 국민이 될 수 없고 국민소득이 5만 불이라 해도 그런 사회를 선진국가라 말할 수 없다.
모두에서 아기에게 젖을 물리고 있는 평화스러운 어머니의 모습이 숨 막히는 지구의 배출구라고 표현한 바 있다. 이 땅의 어머니는 뭍에 태어난 아이를 위한 사람들의 기도가 있듯이 평화와 자비를 사랑하는 인재로 참말로 키워야 한다.
한국의 여성들이 자식을 낳아 바르게 키워 사회의 동량으로 일구어 내어 국가에 내보내야 하는 것이, 앞으로 21세기가 끝날 때까지 이 지구촌을 이끌어 갈 뜻을 찾은 한국의 여성들의 여성운동의 본질이며 역할이라고 믿어본다.
21세기는 동양문명의 시대다. 동양문명의 시대는 자비의 시대다.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상생의 시대다.
네가 슬프니 나의 마음이 슬프고 네가 기쁘니 나의 마음이 기쁘다. 너와 나는 하나지, 둘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서양문명은 철저히 너와 나를 갈랐다. 일체를 주장하면서 철저하게 일체를 죽였다. 서양문명의 주인공은 누가 무어라 해도 전투적이고 교활하고 야심찬 욕망의 노예들이었다. 그 들은 전쟁을 일으켜 혹은 혁명을 한답시고 살인과 폭력을 낳고 증오와 저주를 산하에 뿌리고 다녔다. 그래서 수없이 많은 아들들을 죽였으며 그 어머니의 가슴에 피눈물을 먹였다. 21세기의 우리가 바라는 세상은 동체자비의 세상이다.
너의 고뇌는 나의 고뇌요 너의 안락은 나의 안락이라는 원융무애한 세상이다. 여자가 승화한 우리 어머니의 세상이다.
동양문명의 주인공들은 남편과 아내가 둘이 아니고 하나인 중도(中道)의 가정을 배워야 한다. 너와 내가 둘이 아닌 일체의 사회를 배워야 한다.
이제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설움과 천대를 받아온 여성의 시대가 우리 눈앞에 닥쳐온다. 천하산천에 죽은 내 아들을 살리기 위해 어머니의 자비가 다시 살아난다. 세상의 이치가 이렇듯이 남성은 여성에게 수천 년간 진 빚을 갚을 시기가 찾아온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머니의 찬가를 부르지 않을 수 없다.
어머니의 사랑, 애써 좋은 말로 미사여구를 늘어놓지 않아도 그보다 더 높은 진솔한 사랑의 샘물을 땅 위에 찾을 수 있을까. 그에게 열 손가락 다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어디 있을까. 당신의 이마에 주름이 늘고 허리가 휘어 휘청거릴 때 약한 우리의 마음을 작게 치고 만다. 머리가 어지러워 담장에 기대야 한 발이라도 떼어놓을 수 있는 병상의 어머니의 모습을 볼라치면 그렇게 가슴이 아픈 것은 웬일일까, 왜 부모와 자식 간의 인연을 맺어놓곤 사랑과 미움의 세월로 잔정, 굵은 정을 쌓을 대로 쌓아놓고 애별리고의 슬픔을 우리에게 안겨 주었는가.
그렇게 높은 어머니의 사랑을 노래하면서 언젠가 헤어질 날을 생각하면 서러움이 가슴에 밀려 어찌 이슬이 되어 녹아버리고 마는 것일까.
나는 오늘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고해의 언덕을 넘어가는 남성들에게 묻는다. 어머니는 당신에게 있어 도대체 무슨 존재인가, 왜 그를 생각하기만 하면 콧등이 시큰거리고 목이 메어 눈가에 눈물이 말없이 고이는가, 우리들의 어머니는 단지 전생에 사랑하는 부인, 사랑하는 가족, 사랑하는 여인 그 이상의 것이었나.
넓은 세상에 우리들의 어머니는 우리가 의지해야 할 우리들의 신앙이다. 저 먼 하늘나라에 앉아있는 알지도 못하는 미지의 신이 아니라 이곳에 엄연히 존재하는 나의 신이었다.
영지주의 문헌에서 여신인 소피아는 만물의 어머니, 살아있는 것의 어머니의 이름으로 불린다.
지상보살은 인도의 고대 지모신(地母神)에서 유래된 것으로 그 이름은 프리티비이다. 프리티비는 인도바라문교의 최고의 신으로 최고의 여신 중 하나였다. “이 땅 넓게 펼쳐진 은혜로운 너의 어머니 프리티비인에게 가라. 신앙심 깊은 그대는 그녀가 파멸의 구렁텅이로부터 솜털같이 지켜 주리라.”
더하여 불교를 대하는 신도들에게 관세음보살은 최고 경의의 대상인데 관세음보살은 아미타 부처님의 좌보처 보살이라지만 원래 정법명왕(正法明王) 여래(如來: 부처님)로 오랜 겁전에 완전히 해탈하여 불생불멸을 이룬다. 이 죄 많은 사바세계(娑婆世界: 인간세계)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보살의 몸으로 화현하심을 설명할 수 있으나 어디에 뒤져봐도 관세음보살이 여성이었다고 말한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여성의 모습으로 변화해 나가는 관세음보살의 조상(彫像), 탱화를 마주하면서 현대 불교가 제시하는 방향의 설정이 무엇인가며 확실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21세기가 우리에게 무언의 힘으로 위력을 과시하며 커다란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그것은 여성시대의 여명을 알리는 것이며 그 부과된 과업으로 다가오는 여성의 모습은 이런 모양이어야 할 것이다.
어느 하늘 아래서나 부당과 굴종의 삶이라면 당당하게 아니요 라고 말할 수 있는 여자.
웃는 모습 밝은 얼굴을 가지고 긍정적인 사고와 적극적인 자세로 세상에 다가가는 여자.
전통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이상적인 가정, 평화로운 세상을 지우고 또 지우며 설계해 보는 여자.
그리고 자식에게 젖을 물린 어머니의 자비처럼 마음속에 잠자고 있는 대비의 그릇을 닦아나가는 여자.
그런 여성은 어디서나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게 될 것이다.
--- 「제1장. 여성은 무엇을 위해 존재하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