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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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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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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 예정일 미정
쪽수, 무게, 크기 596쪽 | 896g | 153*224*35mm
ISBN13 9788958623014
ISBN10 8958623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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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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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실린 글들은 상이한 시기에 상이한 계기에 의해서 쓰인 것들이다. 그래서 다루는 주제나 글의 성격, 심지어 글의 길이나 스타일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르다. 진지하고 무거운 학술 논문에서 강의나 강연을 위한 원고, 그리고 정세 분석적인 글에서 칼럼 같은 글들이, 상이한 상황에서 상이한 독자나 청중을 대상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글들의 요철이 매우 큰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들을 하나의 책으로 모으게 했던 것은 일단은 모두 한국의 과거나 현재에 대한 글이라는 아주 평범한 ‘공통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공통성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모은다는 것에 의해 만들어지는 어떤 ‘공동성’이다. 이 이질적인 글들을, 그 요철마저도 그대로 둔 채 하나로 모음으로써, 그 글들이 함께 모여서 만들어내는 어떤 공동의 것이 있을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글을 쓰거나 모으는 것 이외에 읽는 독자의 행위가 또한 함께 모이면서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읽는 방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임이 분명하지만 말이다.
그 공동의 것이 무엇인가를 미리 정할 수는 없을 테지만, 아마도 거기에는 몇 가지 성분이 포함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역사, 시간, 정치, 소수자, 타자성, 외부성 등등이 그것일 것이다. 결국 ‘공동의 것’이란 아마도 이런 개념들로 표현되는 사유의 공간일 것이고, 그리고 그로부터 나름의 색깔을 갖고 나름의 선을 그리는 상이한 사유들이 그려지는 공간일 것이다. 역사를 통해서 외부성과 소수성, 타자성을 사유하는 그런 공간. 나는 그 공간이 흔히 말하는 역사, 대문자 ‘역사’에 의해 지워지거나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된 것들에 눈을 돌리고 그것들을 볼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 그래서 들리지 않는 목소리를 듣고, 생각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생각하며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역사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이런저런 주제들에 반복하여 소수자나 외부성, 타자성이라는 개념을 끼워 넣고 그 안에서 작동하게 하고자 했던 시도가 읽는 이들과 함께 새로운 공동성을 생산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럼으로써 역사의 공간이 비가시적인 것이 가시화되고, 자격 없는 자들이 말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럼으로써 역사의 공간은, 혹은 역사 자체는 비로소 정치적인 것이 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 pp.11-12

이주자들을 받아들이면서도 제한된 공간 안에 가두는 방식으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그러한 공간적 제한을 통해 만들어지는 시간의 차이를 착취하기 위한 것이다. 시간이란 시계로 표상되는, 이미 주어져 있고 무얼 하든 동일하게 ‘흘러가는’ 자연적 사실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의 리듬을 통해서, 혹은 동조된 리듬을 통해서 구성되는 것이다. 공동성이란 서로의 신체적인 움직임을 맞추어가는 리듬의 구성을, 그것을 통해 만들어지는 시간적 동조를 포함한다. 그렇기에 구성되는 리듬의 차이마다 다른 시간들이 존재한다.
맑스에 따르면 자본의 착취는 무엇보다 이런 시간의 차이를 착취하는 것이다. 화폐자본에서 상품자본, 생산자본을 거쳐 다시 화폐자본으로 돌아가는 자본의 순환은 자본의 생존의 리듬을 갖는다. 이 순환의 리듬을 맞추지 못하면 자본은 흑자상태에서도 파산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자본의 순환에 부분적으로 맞물려 있지만 이와 전혀 다른 노동력의 재생산의 리듬이 있다. 노동력을 제공하고 임금을 받아 그것으로 생활수단을 구매하여 소비하며 다시 이에 필요한 돈을 벌기 위해 노동력을 팔러 자본가에게 가야 하는 노동력의 순환이. 이 순환의 리듬을 맞추지 못하면 노동력은 재생산되지 못하고, 노동자는 죽는다. 자본의 시간과 노동력의 시간, 이 상이한 시간의 차이를 자본은 착취한다. 노동력의 순환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최소치와 자본의 순환에 필요한 노동시간의 최대치의 차이를 맑스는 잉여가치라는 개념으로 정의한 바 있다. 역으로 잉여가치란 이러한 시간의 차이를 착취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pp.14-15

……좋고 우수하다는 생각의 계몽이나 확산이 그것을 실제로 사용하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방식으로 근대적인 시간성의 영역과 만나고 그것을 자신들의 삶의 조건으로, 일상생활의 일부로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일까?
이에 대한 우리의 가설적인 대답은 신문이 거기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물론 학교나 교회가 그러한 역할을 했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근대적인 시간관을 갖는다는 것, 혹은 근대적인 시간을 일상생활에서 수용한다는 것은 단지 양력에 따라 날짜를 매기고 시간을 지키는 훈련을 한다는 것 이상의 좀 더 근본적인 사고방식의 변환을 요구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하나의 시간을 다양하고 이질적인 사건이나 영역들에 대해 단일한 기준 내지 척도로 적용하는 능력과 사고방식, 혹은 태도와 습속을 요구한다. 이를 통해 이질적인 삶의 요소들을 하나의 시간적인 좌표계 안에서 통일하고 통합하여 파악하는 능력이 획득된다. 그것이 없다면, 양력은 달력을 볼 때나 날짜 계산하는 데 사용되곤 그만일 것이고, 시계는 학교나 교회 등의 매우 제한된 영역에서 사용되곤 그만일 것이다. 그러한 국지적 사용으론 근대의 시간적 생활방식은 물론 근대적 시간관 또한 실질적으로 습득하여 사용한다고 말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근대적 시간관을 형성하는 데서 정작 중요한 것은 달력을 보지 않을 때도, 시간 약속을 하거나 지키지 않을 때도, 하나의 단일한 시간적 좌표계 안에서 다양한 사건들을 포착하고 배열하며 관련짓는 것이고, 그러한 관련에 따라 개개의 사건이나 사실이라는 부분을 전체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 통합하여 사고하고 행동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신문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것이 새로운 시간관이나 시간 개념을 계몽하고 그것의 사용을 적극 주장했다는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그러한 생각에 적극 동조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런 종류의 시간관을 사용하고 다양한 사건을 하나의 시간적 좌표계 안에 통합하여 사고하고 행동할 수 있다고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치 수학이 중요하며 그것을 잘해야 한다고 적극 동조한다고 해서 수학을 실제로 잘하는 것은 아닌 것처럼. 반면 그런 생각을 명시적으로 하지 않아도, 실제 수와 계산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사는 사람은 수학을 실질적으로 이용하는 데 근접하게 된다. 신문이 근대적 시간관을 습득하여 사용하는 실제적인, 그리고 핵심적인 조건이 되었다는 것은, 무엇보다 우선 그것이 근대적인 시간성이 작동하는 실질적인 장(場)을 형성했다는 이유 때문이다.
--- pp.187-1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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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인터뷰
역사의 공간』의 저자 이진경 선생님은 2009년 3월부터 1년 동안 일본 히토츠바시 대학에서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2010년 3월 말경 한국으로 돌아올 예정이다. 2010년 1월 초 10여 일간의 일정으로 잠시 귀국하여 '수유너머 N'에서 강의하였고, 『역사의 공간』 출간을 기념하여 휴머니스트에서 강의를 하였다. 책 출간에 즈음하여 1월 23일 이진경 선생님과 이메일로 인터뷰를 하였다.(편집자주)

▶ 『역사의 공간』이 출간되었습니다. 그 동안 많은 작품을 집필하였는데, 이전의 책들과는 상당히 다릅니다. 이 책이 이전의 책들과 다르다는 것을 선생님은 어떻게 말하고 싶으신지요?

좋지 않나요? 아주 색다른 책, 뜻하지 않은 책을 낸다는 게?*^^* 사실 책을 많이 쓰다보면, 비슷한 책을 양산할 위험이 있는데, 그걸 생각하면 허구헌 날 같은 책만 쓰고 있는 건 아니라는 게 다행이란 생각이 들어요. 사실 이 책에 실린 많은 글들은 뜻하지 않게 쓰여진 글들입니다. 그 동안 여러 가지 공부를 하고, 여러 책을 냈지만, 대개는 이론적 성격을 갖는 것이거나 서구에서 근대성에 대한 것이었지요. 이번 책은 한국에서의 역사, 그저 근대성에 대한 것이라고만은 할 수 없는 다양한 주제의 역사에 대한 것이란 점에서 이전의 책과 많이 다르지요. 더구나 ‘조선세시기’나 ‘독립신문’, ‘대한매일신보’ 같은 것에 대한 것은, 저를 아는 분들로선 의외일 것 같아요. 그래서 'The Other Side of Yi-Jinkyung'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에요. 하지만 지금까지 쓴 책들과 그저 다르다고만은 할 수 없는 어떤 일관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가령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 등을 다루려는 관점이 그렇겠지요. 다른 것들, 이질적인 것들을, 그 이질성을 제거하지 않으면서 하나로 관통하는 것, 저는 사실 그것은 어떤 개념이나 이론들보다는 하나의 질문이라고 생각해요. 아주 다른 영역들을 횡단하게 만드는 것도 그 질문이었고, 그렇게 넘나들면서도 호사가적 취미나 박학을 자랑하려는 것과는 다르다고 스스로 믿는 것 역시 그 질문이었다고 생각해요. 저는 제 책들 속에서 그 질문을 읽어주시길 부탁드리고 싶어요.

▶ 역사란 시간적인 구성물이다. 그것은 구성되는 지대, 구성되는 양상마다 다른 시간을 갖는다고 하셨습니다. 어려운 질문입니다만, 선생님께서는 역사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책에서 명시적으로 다루고 있는 주제인데, 제가 잘 드러나게 말하지 못한 듯 하군요. 역사란 사실들의 계열화를 통해 만들어지는 하나의 이야기지요. 그것은 통상 시간적인 순서를 따라 계열화되기에 시간적인 구성물의 형태를 취하지만, 바로 그렇기에 그렇게 만들어지는 시간, 시간적인 구성물은 어떤 경우든 같을 수 없지요. 모두 다른 시간, 다른 양상의 시간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역사는 그것이 기록되기 시작한 때부터 사실은 모두 제국이나 국가, 왕조와 관련되어 있었고, 근대에 이르러서는 민족 내지 국가단위의 역사, 이른바 ‘국사’라는 형태로 만들어졌지요. 그래서 역사란 대개 대문자 '역사', 지배자나 지배적인 척도에 의해 만들어진 역사인 셈입니다. 그것은 다른 이야기들, 다른 역사들을 지우거나 배제하는 방식으로, 혹은 포섭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집니다. 이는 다른 시간들을 하나의 지배적 시간 안에 통합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로써 시간의 차이가 착취되는 거지요.

▶ 2002년 『노마디즘』과 『철학의 외부』 출간 이후 선생님의 연구 방향과 관심사가 어디로 향해 있었는가? 하는 점이 『역사의 공간』에서 드러나는 것 같아요. ‘역사를 통해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을 사유한다’ ‘소수성, 타자성, 외부성에 대한 사건적 사유’라는 문장으로 표현하셨는데요. 책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었는지요?

소수적인 것이란 마이너한 것을 뜻하는데, 주류적인 것(major)에 반대되는 것이지요. 지배적인 척도에 반하는 것, 그와 다른 척도를 창안하는 것, 혹은 그 지배적 척도를 전복하는 것이 소수적인 것입니다. 그것은 지배적 척도에서 요구되는 것의 단순한 결여나 부재를 뜻하는 ‘주변적인 것’과 다릅니다. 그것은 긍정적인 무언가를 창조하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 지금 지배적인 것을 와해시키는 것입니다. 타자성이란 동일자에 반하는 것이지요. 동일자란 어떤 것들을 동일화하는 것이고, 그 동일한 것의 지배에 포섭하는 것이며, 그것에 동일화되는 방식의 삶을 강제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필경 자신과 이질적인 것들을 따로 분리하거나 배제하는 방식으로 작동합니다. 이를 ‘타자화’라고 하지요. 사실은 그런 타자화되는 것을 통해 동일자의 경계가 구획되지요. 이 경계를 만들어내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권력이 작동합니다. 그것은 주류적인 것의 척도가 작동시키는 권력과 동형적인 그런 권력입니다. 소수성을 사유한다는 것은 이런 권력과 대결하면서 거기서 벗어난 새로운 삶의 지대, 삶의 방식을 창안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동일자의 내부에 그것의 외부를 끌어들이는 것이고, 그 외부를 가동시켜 내부의 ‘질서’를 와해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은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고, 새로운 역사를 만드는 것이지요. 역사가 사유의 공간이 될 수 있다면, 지배적인 이야기들을 입증하고 가르치고 배우는 영역이 아니라, 이처럼 소수적인 것, 타자적인 것, 외부적인 것이 지배적인 것, 동일자와 대결하는 장이 될 수 있을 때라는 생각, 이런 걸 말하고 싶었어요.

▶ 이진경 선생님은 80년대에는 맑스와 더불어서 공부하고 사유하고 살았고, 90년대 들어서는 푸코, 들뢰즈/가타리 등과 함께 철학과 삶 등을 나누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2000년대에 들어서서는 이러한 탈주의 철학을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형태로 밀고 나가 『노마디즘』이라는 새로운 생성을 낳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후 ‘외부’라는 개념으로 사유를 전개하고 펴고 있습니다. 『역사의 공간』은 어떤 면에서는 역사라고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이진경: 그것은 좋든 싫든, 뜻밖에 쓰여진 것들을 하나로 모으는 행위를 통해, 어떤 새로운 계열화를 시도하는 것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매끄럽게 이어지는 역사는 결코 아니지만, 울퉁불퉁한 채 그대로 하나로 이어지면서 만들어지는 어떤 하나의 이야기일 것이고, 그런 점에서 하나의 역사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울퉁불퉁한 것은 역사란 본래 그렇게 울퉁불퉁한 것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역사가 울퉁불퉁하다는 것은 그것은 언제나 생각지 않았던 것, 우발적인 것, '역사' 안에 담기 힘든 것 등과 같은 ‘외부’를 담아야 하기 때문이고, 그런 외부적인 것들, ‘사건’이라고 부르는 것들로 가득하기 때문일 겁니다. 어쩌면 '역사'란 이 울퉁불퉁한 것을 하나의 ‘멋지고’ 매끈하게 이어지는 통 안에 담으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을 수도 있을 거 같습니다. 반면 그런 하나의 매끈하게 이어진 선들 밑에 눌려 있는 것, 그 매끄러움을 위해 제거되거나 배제된 것, 혹은 거세된 것으로 하여금 그 매끈하고 멋진 껍질을 뚫고 솟아나게 만드는 것, 우아하고 깔끔한 분위기를 위해 침묵해야 했던 것들이 다시 소리나게 하고 웅성거리게 하는 것이야말로 ‘다른 역사’, 소수적인 역사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요. 그게 역사에서 외부라는 것이 작동하게 하는 것인 셈이지요. 역사란 이런 점에서 대결의 공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물론 그것이 지배적인 '역사'와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교차하며 대결하게 될 지는 제가 결정하는 것이 아닐 것이고, 제가 원하는 대로 되는 것도 아닐 겁니다. 그것은 이 책이 불러들일 수 있는 어떤 또 다른 외부들과 만나서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의 것이겠지요.

▶ 앞에서 이전의 책들과 매우 다른 책이라고 하셨는데요. 매우 유크한 책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14개의 장으로 구성된 『역사의 공간』에서 그러한 면모가 잘 드러나고 있는 장은 어디라고 생각하시나요?

글쎄요. 제가 자기 책을 두고 스스로 유니크하다고 말할 정도로 나르시시스트는 아니라고 생각되는데……. 그보다는 제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대신 답해야 할 듯 하네요. 역사가 대결의 장, 혹은 계급투쟁의 장이라는 생각은 하나의 보편적 역사를, 역사법칙을 말하던 맑스주의의 공식적 역사관에서조차 말하던 것이지요. 그러나 '역사'와 역사들 사이에, 단지 상대적인 관점의 차이의 대결이라는 생각을 넘어서, 어떤 근본적인 대립과 대결이 있음을, 그런 점에서 주류적이고 다수적인 역사와 소수적인 역사의 대결을 부각시킨 경우는 그리 많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더욱 곤란한 것은 ‘소수적인 역사’의 가능성인데요, 왜냐하면 그것은 역사화되는 순간 '역사'의 일부로 편입되고 포섭된다는 딜레마를 안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딜레마 속에서 역사의 공간을 '역사'에 떠넘겨주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 '역사'의 일부를 이루는 방식으로 사로잡히지 않는 역사가 어떻게 가능한가를 질문했던 것, 대답이 아니라 그런 질문이 중요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역사 안에 외부성이 가동할 수 있는 여백과 공백을 만들어내는 것, 역사라는 장을 외부적인 사건, 소수적인 목소리가 튀어나오는 장으로 만드는 것, 이를 위해 '역사'를 반복하여 ‘탈영토화’하고 ‘해체’하고 전복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주류적인 사고방식, 주류적인 표상의 방식이 어떻게 우리 안에 자리잡게 되었는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 등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은 이런 이유에서겠지요. 그것을 통해 우리 자신을, 익숙해져 있는 자신의 모습을 끊임없이 낯선 것으로 볼 수 있게 만드는 것, 자신의 사고방식 안에서 작동하는 주류적 사고의 끔찍한 양상을 눈돌리지 않고 직시하는 것, 그리하여 자신이 사는 세계 안에서 이방인이 되는 것, 외부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겠지요. 이 책의 에필로그를 ‘역사’라는 제목을 단 책과는 어울리지 않게 '도그빌'이란 영화에 대한 글, 이주자들, 외부자들을 착취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 안에서 뜻밖의 역할을 찾고자 했던 글을 넣었던 것은 이런 관점에서 아주 적절했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이런 면에서 이 책에 ‘유니크한 면’이라는 게 있다면, 이런 글로 책의 ‘결론’을 삼고자 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합니다.

▶ 편집자가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글은 2장 '소수적인 역사는 어떻게 가능한가?'였습니다.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과 자이니치의 관계, 자이니치와 한국의 진보적 지식인 사이의 관계에 대한 문제의식을 느꼈습니다. 한편 무척 어려운 글도 있었는데, 8장'근대 초기 역사 관련 용어들의 용법'이었어요. '대한매일신보'에서 역사 관련 개념들의 인접성과 비대칭성을 이야기하는 글입니다. ‘상대빈도’ ‘상대빈도계수’등 수학 용어와 수식이 등장하여 좀 ‘거시기’했습니다. 인접성, 비대칭성, 상대빈도, 상대빈도계수 등을 사용하여서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인지요?

독립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에서 ‘역사’ 개념의 탄생과정을 다루면서 느꼈던 약간의 아쉬움이 그런 ‘아카데믹한’ 글을 쓰게 했던 것 같네요. 그 신문들에서 역사와 관련된 개념들을 선별하여 그것이 어떻게 다루어지고 이해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려 했지만, 그런 개념의 선별이나 그런 개념들에 대한 이해의 방식이 너무 자의적인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한편 있었거든요. 도대체 이런 개념들이 얼마나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지, 그것이 그 시대의 역사 개념을 다루는데 어떤 ‘일반성’이나 타당성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건지 하는 일종이 자의식이었는지도 모르겠어요. 그래서 일단 그 개념들의 출현빈도를 추적했는데, 양적인 사용빈도만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너무 적었어요. 개념들의 의미라는 건, 말하는 사람이 부여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연관된 개념들의 관계들을 통해 만들어지고 작동하는 것이기에, 그런 개념들의 연관을, 계열화되는 양상, 혹은 ‘배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그런 배치를 특정 인용문을 넘어서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예전에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에서 공간들의 배치를 단위공간들의 위상학적 관계를 통해 분석했던 적이 있었지요. 거기서는 영국의 힐리어와 핸슨이 사용했던 공간의 통합성(비대칭성)과 응집성을 분석하는 방법을 사용했는데, 이 글의 경우에는 비대칭성과 인접성을 통해서 개념들의 연관양상에 대한 위상학적 분석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실제로 그것을 분석하는 기술적인 방법은, 그렇게 누가 한 적이 없기 때문에 없었고, 적어도 사용할 수 있는 수학적 방법을 알고 있지 못했어요. 다만 관련된 개념들의 양적인 연관들의 분포를 놓고 이리저리 생각해보다가, 나름대로 그것을 분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셈이지요. 그리고 그것에 어떤 수학적 형식을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저는 그런 수학적 형식의 일반성을 증명하거나 하는데는 특별한 관심이 없었어요. 다만 개념들의 실제적 연관양상을 늘어놓고 이리저리 뜯어보고 생각하며 직관적으로 찾아낸 분석의 방법을 일반적인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 분석을 진행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그렇게 분석되어 나온 결과가, 그 앞의 논문에 썼던, 신문의 내용에 대한 분석을 통해 찾아낸 것과 동형적인 양상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매우 기뻤어요. 이런 과정을 통해 개념적 배치를 분석할 수 있는 일반적 방법을 스스로 찾아냈다는 것도 매우 기뻤구요. 물론 수학적 기법에 대해 잘 아시는 분이라면 ‘아, 그거 이런 방법이 있어요’라고 말할 지도 모르지요. 요즘은 수학적 기법의 발전이 워낙 다양하니까 말예요. 그렇지만 그것이 제가 옛날 신문에 나오는 개념들의 연관들을 뒤져서 그런 일반적 방법을 찾아냈을 때의 기쁨을 무화시키진 못할 것 같아요.


▶ 모든 글이 중요하겠지만, 선생님께서 나름 애착을 가지고 많은 함께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싶은 글이 있다면 이야기해주세요.

글쎄요. 책을 만든 편집자로선 하기 힘든 질문인 듯하네요. 책을 쓴 저자로선 대답하기 힘든 질문이구요. 그보다는 제가 글을 쓰고서 기쁨을 느꼈던 양상들, 지금도 기억나는 기쁨의 감응에 대해, 혹은 그와 약간은 다른 감응에 대해 몇 개 선별해서 말하는 게 나을 거 같네요. 먼저 소수적인 역사에 대한 문제의식을 다룬 글인데요, 그 글은 이 책의 기본적인 관점을 명시하는 글이란 점에서 주장이 선명하고 목소리가 강한 글이지만, 서문에 썼던 것처럼 거기에는 안타까움과 미안함 같은 감정이 섞여있어서, 단지 거기서 말하고 있는 제 목소리를 강조하는 것 역시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동반하는 듯 해요. 한편 글을 쓰면서 자기 생각이 크게 달라지는 경험은 그리 흔하지 않은데, 그런 글은 그런 만큼 애정을 갖게 되지요. 조선조 『세시기』에서 시간구조를 분석한 글이 그런 흔치 않은 경우에 속했어요. 시간의식이나 시간구조에 대한 관심에서 쉽게 생각하고 시작했던 것인데, 공부하고 쓰면서 근대 이전의 삶의 방식이나 사고방식에 대해 많은 것을 다시 생각하게 해준 글이예요. ‘귀신’이라고 불리는 존재자에 대해, 그것들이 사는 세계에 대해, 그리고 그것과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만드는 관계에 대해, 그 두 세계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에 대해, 지금은 ‘미신’이나 ‘옛날 얘기’의 이름 아래 지워져버린 관계에 대해 크게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으니까요. 반대로, 쓰고 나서 예상했던 결론을 얻었지만 그렇기에 기뻤던 것은 앞서 말했던 역사 용어들의 사용양상에 대한 수학적인 글이예요. 생각지 않았던 방법을 찾아낼 수 있었는데, 그것이 나름대로 타당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식민지 인민은 말할 수 없는가??는 다른 이유에서 기쁨을 느꼈던 글이에요. 그것은 식민지 시기 역사에서 무언가 적극적인 어떤 인물이나 사유를 찾아내야 했는데-.-;;, 솔직히 찾기가 매우 어려워서 한참을 헤멨어요. 같이 세미나를 하던 후배들과 이리저리 헤매다가 말할 수 있는 어떤 출구를 어렵게 찾아냈고, 그런 점에서 보이지 않던 출구를 발견했을 때의 기쁨 같은 것을 주었던 글이예요. 가족계획사업에 대한 글은 제가 살았고 제가 직접 경험했지만, 어렸기에 당대적인 현실감 속에서 분석하지 못했던 것을 제가 공부한 것을 통해 분석하여 이론적인 이해를 하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이론적 사유의 기쁨을 주었던 글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 글은 제가 당대적인 시제 속에서 이론적으로 사고하며 대면했던, 그리고 당대적으로 분석적으로 대면했던 노무현이나 이명박 정권에 대한 글과는 다른 어떤 것이었어요.

▶ 이 책에서 어쩌면 쉽게 오해될 수 있는 부분들이 있지 않나 싶어요. 가령 3부에 있는 ‘대중의 개념’과 ‘흐름으로서의 대중’에 대한 설명이 그렇지 않은가 싶은데, 약간의 설명을 덧붙인다면 어떨까요?

오해하기 쉽다는 말은 제가 얘기한 것보다는 ‘흐름으로서의 대중’이라는 현상에 대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싶네요. 대중이 하나의 흐름이라는 것은 『노마디즘』의 여러 곳에서 반복하여 강조했던 것이고, 나름대로 현재적인 의미로 끌어들이고자 애를 썼던 것이기도 합니다. 『노마디즘』이 출판된 해가 월드컵과 여중생 추모 반미시위가 있었던 시기기도 했고, ‘안티조선’이나 ‘노사모’ 같은 새로운 양상의 대중운동이 출현한 시기기도 했으며, 그 책의 출판 직후에는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그것이 갖는 현실성을 극적으로 보여주기도 했지요. 흐름으로서의 대중이란 개념은 들뢰즈/가타리가 『천의 고원』에서 사용한 것입니다만, 저로서는 이런 현재적이고 현행적인 사건으로서 대면했기에 그들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강한 의미로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것은 알다시피 그후에도 반복적으로 등장했고, 급기야 2008년에는 일년의 거의 반을 차지하는 거대한 사건으로까지 나아갔지요. 그러나 이러한 대중운동의 새로운 양상은, 대중의 흐름이란 현상 자체가 이미 오래전에 시작된 것이고 맑스주의자들로선 항상 다루어야 했던 중요한 주제였기 때문에, 오히려 제대로 이해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2000년대 들어와서 출현한 새로운 양상이 과거의 전통적인 대중의 개념에 묻혀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가령 2008년 그 거대한 대중운동이 아무런 성과 없이 끝났다는 생각, 그래서 그런 대중에 대한 관념마저 비난하는 생각을 잘 보여주는 것은 당비기획위원회 이름으로 출판된 『그대는 왜 촛불을 끄셨나요』의 대부분의 글들입니다. 반면 실제로 그 거대한 운동에 5개월 이상의 인생을 털어넣었던 대중들은 그런 ‘무소득’의 결과에 별로 니힐한 생각도 없고 패배주의적인 분위기도 없는 것 같습니다. 이는 동일한 사건에 대해 느끼는 감응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는 한 측면일 겁니다. 대중들과 구좌파들의 이런 감각의 차이를 좁힐 수 없다면, 구좌파들이 대중운동에 개입하고 영향력을 행사할 가능성은 더욱더 작아질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더욱더 깊이 있는 분석이 필요한 문제가 아닌가 생각이고, 개인적으로는 여러 가지로 더욱더 천착하고 싶은 주제입니다.

Q: 『역사의 공간』 에필로그가 '도그빌, 이주자들을 착취하는 개 같은 나라'입니다. 앞서 어느 정도 말씀하셨지만, 책의 출구로서 이 글을 배치한 이유에 대해 좀더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이진경: 저는 스스로를 역사가라고 생각한 적이 별로 없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역사란 어떤 의미에서는 집합적인 기억일 뿐 아니라 집합적인 자기의식이기에, 역사를 다룬다는 것은 자기가 속한 역사를 다룬다슴 것을 뜻하고(그래서 저는 서구에서 근대성의 역사를 다루는 글을 많이 썼지만 역사가로 간주되기는커녕 역사와 무관한 사람으로 비난을 받는 경우가 많았지요), 그런 만큼 역사가들은 자기의식이 강한 경우가 많은 것 같아요. 자기의 역사를 본다는 것은 많은 것은 자기의 자랑할 만한 역사를 보는 것이거나, 자랑할 수 있는 역사를 만들기 위해 과거를 보는 것이 대부분이지요. 따라서 이런 자기의식은 솔직히 대단히 허구적입니다. 그리고 그런 허구를 통해 자신을 자랑하고 미화하는 것과 나란히 타자들, 외부적인 것들을 억압하고 지워버린다는 점에서 폭력적입니다. 이런 점에서 자기의식이 갖게 마련인 ‘반성적 사유’의 장점마저도 찾아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지 않나 싶어요. 이주자들, 유민들, 외부자들의 관점에서 자기를 바라보는 그런 ‘자기의식’을 기대하기 가장 어려운 곳이 역사란 생각도 듭니다. 그런 만큼 자기가 ‘민족’이니 ‘국민’이니 하는 하나의 거대한 집합적 주체로서 행하고 있는 것에 대해, 그 이름의 끔찍한 억압과 폭력에 대해 가장 둔감한 곳이 역사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언제나 자기 민족, 자기 국민의 이름으로만 세상을 보기 때문이지요. 역사가 소수적인 것, 외부적인 것, 타자적인 것을 사유하려면 이런 둔감함과 대결해야 하고, 그럼으로써 자기 자신을 외부자의 관점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주자의 관점에서 서는 것, 비정규직의 관점에서 정규직을 보는 것, 이런저런 소수자의 관점에서 자신을 보는 것이 어디보다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자신을 타인으로서 보는 것, 낯선 타인, 당혹스런 타인, 끔찍한 타인으로서 보는 것 말입니다. 그것은 타인이 생각하고 말하는 것을 통해 자신을 보고 쓰는 것이 되겠지요. 저는 이런 점에서 여수 외국인 노동자 수용소 화재사건처럼 극적인 것이 없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 때 잠시 동정의 시선을 유발하곤 잊혀져 버렸지만 말이예요. 그 사건과 '도그빌'의 기이한 평행성을 통해 저는 그 사건의 의미를, 그 끔찍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자 했던 셈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도록 하고 싶었고, 그것이 역사의 공간에서 갖는 결정적인 위치를 강조하고 싶었어요. 그것이 어쩌면 역사라는 말을 할 때 제가 갖게 되는 ‘자기의식’인지도 모르지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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