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은 혁명보다 어렵다. 반대하는 자들을 일소하는 대신 설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나만 옳고, 따라서 나만 할 수 있다고 고집을 부리는 순간 개혁은 명분을 잃은 채 이권 다툼이 되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그라쿠스 형제의 실수였다.
---「1장 선견지명의 함정」중에서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힘으로 상대를 억누르면 당장이라도 내 뜻을 실현하고 사회 안정을 이룰 것처럼 보이지만, 그 힘 자체가 영원할 수 없다. 내가 힘을 잃는 순간 상대가 발톱을 드러낼 것이고, 평화는 깨진다. 그런즉 복수의 연쇄를 끊는 지도자, 자신을 핍박한 상대를 용서하는 지도자는 위대하다.
술라의 조치가 로마 사회에 미친 영향은 무시할 수 없었다. …… 술라는 로마가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장악하며 맞닥뜨린 새로운 사회 문제와 얽히고설킨 이해관계 그리고 일인자를 꿈꾸는 군인 정치가들의 권력욕이 얼마나 거대한지 보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시대착오적인 조치들이었고, 실제로 기원전 70년 집정관으로 취임한 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와 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호민관의 권한을 부활시킴으로써 상당 부분 철폐되었다. 한마디로 술라는 근시안적이었다. 무엇보다 유사시 원로원이 특정인에게 비상 대권을 줄 수 있게 한 것이 크나큰 패착이었다. 이렇게 권력을 쥔 장군들은 독자적인 사병 집단을 키웠고, 결국 군대의 정치화가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2장 피를 부른 지도자의 근시안」중에서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처럼, 카이사르도 최고의 자리에 오른 순간 권력욕에 사로잡혔다. 공화정을 위한다며 자기 자신을 왕의 자리에 올려놓았다. 따라서 우리는 시시각각 변하는 지도자의 모습을 늘 경계해야 한다. 인권 변호사 카이사르와 종신독재관 카이사르는 종이 한 장 차이일 뿐이므로.
---「3장 인민을 위한다는 명분, 또는 핑계」중에서
사실 안토니우스는 악티움해전의 패배를 만회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로마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이집트 여왕과 손잡고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연 것만도 괘씸한 상태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배하기까지 했으니, 로마인들은 그에 대한 신임을 완전히 거두었다. 이를 생각지 못했을 만큼 안토니우스는 너무나 안일했다. 이후 알렉산드리아에서 다시 한번 옥타비아누스와 맞붙었지만, 완전히 패배해 클레오파트라의 품에서 숨을 거두었다.
---「로마의 길 4 악티움해전과 알렉산드리아전투」중에서
아우구스투스는 제정이라는 로마사의 새로운 장을 연 위대한 지도자였다. 카이사르 사후 19세의 어린 나이로 별다른 경험도, 배경도, 재산도 없이 냉혹한 정치 무대에 내던져져, 안개 같은 정국을 헤쳐나간 끝에 결국 최후의 승자가 되었고, 77세로 죽기까지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해 제국의 기틀을 닦았다. 그가 즐겨 사용하던 “천천히 서둘러라!”, “대담한 장군보다 신중한 장군이 더 낫다”라는 말은 서서히 그러나 집요하고 정확하게 자신의 목표를 성취하고야 마는 야심가, 또는 지도자로서의 탁월한 품성을 잘 보여준다.
---「5장 굴욕을 대하는 태도」중에서
지도자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그 말이 어떤 행동으로 이어지는지, 그래서 어떤 시스템으로 구체화하는지다. 트라야누스가 위대한 황제로 평가받는 것은 그 개인이 정의로워서이기도 하지만, 제도적 차원에서 정의로운 사회의 기틀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6장 완벽한 통치의 비밀」중에서
모든 과오에도 하드리아누스가 오현제에 드는 것은 순행으로 보여준 지도력 덕분이다. 광대한 제국의 국경을 지키기 위한 그의 노력은, 유대 반란 정도를 제외한다면, 로마의 평화에 크게 이바지했음이 틀림없다. 그의 순행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후임 황제들의 사례를 보면 잘 드러난다. 다음 황제인 안토니누스 피우스는 곧바로 순행을 중단했는데, 그러면서 발생한 크고 작은 문제들이 쌓여 그다음 황제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때 폭발했다. 이로써 전쟁과 소요가 끊이지 않다가 결국 오현제 시대가 저물었으니, 하드리아누스의 지도력과 뚝심은 충분히 재평가받을 만하다.
---「7장 뚝심과 아집의 차이」중에서
공동체가 위기를 겪고 있을 때 지도자는 어떻게 통치해야 할까. 그런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기대하듯이 놀라운 카리스마를 발휘할 수도 있겠지만, 권력을 나눠 다른 훌륭한 이들과 함께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공동체가 겪는 문제는 대부분 너무나 복잡해 혼자 해결할 수 없는 경우가 많고, 그러다 보면 결국 ‘식물 지도자’가 되기에 십상이다. 권력은 나눌수록 커진다. 지도자에게 함께하는 지혜가 필요한 이유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많은 공과 치명적인 과를 남겼지만, 이는 모두 후대의 평가이고, 당시 가장 주목받았던 점은 그가 박수 칠 때 떠났다는 것이다. 그는 권력에서 물러날 때를 아는 지도자였다. 제위에 오르고 21년째이자 60세가 된 305년 니코메디아의 황궁에서 황제의 직을 내려놓고 공식적으로 은퇴했다. 생전 스스로 제위에서 물러난 로마사 유일의 황제였다. 스스로를 신격화하고, 동방식 전제 군주제를 도입해 전제정을 출범시킨 그가 은퇴하다니!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8장 함께 통치하는 지혜」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