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성유전epigenetic이란 DNA 서열 자체를 바꾸지는 않으면서도 장기적으로 DNA에 변화를 일으키는 현상을 말한다. (…) 벌거벗은 상태의 유전자는 그 유명한 이중나선 형태의 DNA다. 그러나 우리 세포 속 유전자들은 벌거벗은 상태일 때가 거의 없다. 유전자들은 다른 다양한 유기 분자들로 이루어진 옷을 입고 있다. 달리 말해, 그 분자들은 유전자와 화학결합을 하고 있다. 이런 화학적 부착물들은 왜 중요할까? 그것들이 자신이 결합한 유전자의 행동을 바꾸어, 유전자의 활성을 더 높이거나 낮출 수 있기 때문이다. 부착물들은 오랫동안 붙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더 중요한데, 심지어 평생 붙어 있는 경우도 있다. 후성유전학은 이렇게 장기적으로 유전자를 조절하는 부착물들이 어떻게 붙고 떨어지는지를 연구한다. 후성유전적 부착과 분리가 돌연변이처럼 대체로 무작위로 벌어질 때도 있지만, 후성유전적 변화는 우리의 환경, 우리가 먹는 음식, 우리가 노출된 오염물질, 심지어 우리의 사회적 상호작용에 대한 반응으로서 벌어질 때가 더 많다. 후성유전적 과정은 환경과 유전자의 접점에서 벌어지는 것이다. ? 서문 pp.07~08
후성유전학에서 일반적으로 화제가 되는 주제는 우리를 아프게 만드는 질병의 문제지만, 생물학자들은 그와는 다른 종류의 후성유전적 과정들을 더 근본적인 문제로 여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어떻게 수정란이 나나 당신과 같은 성체로 자라는가 하는 발생의 문제다. 발생의 문제는 몇 가지 하위 문제들로 더 나뉘는데, 그중 하나인 세포 분화의 문제에 관해서는 후성유전학이 이미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 모든 인간은 한때 줄기세포stem cell라는 일반적인 세포(여기에서 ‘일반적인generic’이란 어떤 구체적인 세포 종류의 성격도 띠지 않는다는 뜻이다?옮긴이)로 만들어진 속 빈 공의 단계를 거친다. 줄기세포들은 유전적으로 서로 같을 뿐만 아니라, 물리적으로도 구별이 불가능할 만큼 같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가 피부세포, 혈액세포, 뉴런, 근육세포, 뼈세포 등 다양한 세포들을 갖게 될까? 게다가 이 세포들은 유전적으로는 여전히 모두 같지 않은가? 후성유전학은 이 수수께끼를 풀 열쇠를 쥐고 있다. ? 서문 pp.09~10
우리의 외부 환경이 우리의 유전자 활동을 조정함으로써 우리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말하면, 많은 독자는 놀랄 것이다. 환경이 유전자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환경은 유전자가 담겨 있는 세포의 변화를 매개로 삼아 유전자에 영향을 미친다. 서로 다른 세포들은 동일한 환경적 요인에 대해 서로 다른 반응을 보인다. 사회적 스트레스든 태내에서의 식량 결핍이든 마찬가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몸의 세포들은 모두 동일한 유전자를 갖고 있지만, 환경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은 늘 세포 특정적이다. 영양 부족에 대해서 간세포는 이렇게 반응하고, 뉴런은 저렇게 반응하고, 다른 종류의 세포들은 아예 반응하지 않는 식이다. 따라서 어떤 환경적 요인이 유전자 활동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싶다면, 우리는 특정 세포 집단을 겨냥하여 살펴보아야 한다. 이를테면 뇌의 특정 부분에 있는 뉴런들을 보거나, 간세포들을 보거나, 이자세포들을 봐야 한다.
네덜란드 기근을 겪은 사람들은 분명 여러 종류의 세포들에 영향을 받았다. 뇌세포의 일부도, 심장세포의 일부도, 간세포의 일부도, 이자세포의 일부도, 그 밖의 세포들도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네덜란드 기근 코호트의 간세포를 기근을 겪지 않은 사람들의 간세포와 비교한다면, 아마도 유전자 활동의 패턴이 다른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영향을 받은 사람들의 간세포에서 어떤 유전자는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들의 유전자보다 더 활성화된 상태일 것이고, 또 다른 어떤 유전자는 덜 활성화된 상태일 것이다. 이때 과학자들의 첫 번째 목표는 간세포의 유전자들 중에서 태내 영양 결핍 때문에 활동성에 변화가 생긴 유전자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다음은 간세포의 유전자 활동 변화와 당뇨든 뭐든 우리가 설명하고자 하는 모종의 상태 사이에서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험난한 단계다. ? 1장 환경이 어떻게 유전자를 바꾸는가 pp.24~25
후성유전적 유전자 조절은 많은 경우, 어쩌면 거의 대부분, 엄밀한 의미에서의 유전자에 속하지 않는 바깥쪽의 부착물을 매개로 하여 벌어진다. 유전자성의 정의를 위와 같이 확장한 경우에도 말이다. 달리 말해, 후성유전적 조절을 일으키는 화학적 부착물이 그 조절을 받는 유전자 자체가 아니라 DNA의 다른 지점에 가서 붙는 것이다. 실제로 후성유전적 부착물은 부착된 지점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곳의 유전자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므로 후성유전적 과정은 개별 유전자만이 아니라 DNA 전체를 변형시키는 과정이라고 보아야 한다.
후성유전학은 염기 서열을 넘어 DNA 전체를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본다. 선형의 염기 서열은 유전자라는 물리적 실체의 1차원일 뿐이다. 물론 그 차원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DNA는 사실 3차원 분자이다. 후성유전학은 유전자 연구를 1차원에서 3차원으로 넓히는 과학이고, 그 추가의 차원들은 우리가 후성유전적 유전자 조절을 이해하려고 할 때 특히나 중요하다. ? 2장 유전학이란 무엇인가 pp.46~47
유전자의 활동성, 즉 유전자가 밝게 빛나는 정도를 가리켜 유전자 발현gene expression이라고 한다. 유전자 발현을 제어하는 작업이 곧 유전자 조절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유전자 조절을 순전히 세포 차원에서만 생각했다. 물론 유전자가 가장 직접적으로 조절되는 차원은 세포 차원이지만, 세포의 환경은 세포가 직접 상호작용하는 주변 다른 세포들의 영향을 받는 데다가 혈액을 통해 소통하는 더 먼 세포들의 영향도 받는다. 그렇기 때문에 유전자 조절은 멀리서 온 자극으로 시작될 때도 있다. 일례로 근육세포에 있는 남성호르몬 민감 유전자들은 고환에서 생성된 남성호르몬에 의해 조절된다.
어떤 유전자 조절은 환상적이게도 아예 몸 밖에서 시작된다. 특히 사회적 상호작용은 유전자 조절의 근원으로서 중요하다. 물고기에서 인간까지 많은 동물은 경쟁적 상호작용을 할 때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달라지고, 그에 따라 유전자 활동이 변한다. 경쟁이 아닌 다른 사회적 상호작용들도 영향을 미친다. 칸세코가 대기타석에서 트레이드 소식을 들었을 때, 그의 테스토스테론 수치는 약간 낮아졌을 것이다. 공이 글러브를 빗나가서 자신의 머리에 맞고 담장을 넘겼을 때, 그래서 홈런이 되었을 때,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보였을지라도 그의 몸속은 그렇지 않았을 것이다. 당황스러운 사건 때문에 남성 호르몬에 민감한 유전자들뿐 아니라 수많은 유전자의 활동이 일시적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이런 외상적 사건에 대한 정신과 치료가 실제로 충격을 완화시키는 효과가 있다면, 틀림없이 그 치료는 뇌에서 유전자 조절을 변화시켰을 것이다. 경기 중에 벌어진 사건이든 아니든 사회적 상호작용으로 인해 칸세코의 남성호르몬 수치가 달라졌다면, 변화는 언제나 몇몇 뇌세포에서 유전자 조절이 달라진 데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대체 어떻게 사회적 상호작용이 뇌세포들의 유전자 발현을 조절함으로써 남성호르몬 수치를 바꿀까? ? 3장 유전자 조절에 관해 p.55~57
일찍이 과학자들은 새끼 쥐를 어미의 보금자리에서 오랫동안 떨어뜨려 두면 새끼가 평생 스트레스를 받는다는 것을 관찰했다. 새끼를 짧게 정기적으로 어미에게서 떼어내는 대신 사람이 세심하게 돌보면, 이 새끼의 스트레스 반응은 돌봄을 받지 못한 형제들에 비해 조금 줄었다. 분리 후에 어미가 보이는 반응도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다. 짧은 분리 후에는 어미가 돌아온 새끼를 철저하게 핥아주었지만, 오랜 분리 후에는 어미가 새끼를 낯선 상대처럼 취급하며 핥아주지 않았다. 어미가 핥으면서 털을 손질해주는 촉각적 자극은 새끼의 스트레스 반응을 평생 누그러뜨리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다음으로 과학자들은 어미가 새끼를 핥아주는 정도에 타고난 편차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어떤 어미는 다른 어미보다 더 잘 핥아주었다. 잘 핥아주거나 많이 핥아주는 어미가 돌본 새끼들은 못 핥아주거나 인색하게 핥아주는 어미에게서 자란 새끼들보다 스트레스 반응이 더 누그러졌다. 게다가 못 핥아주는 어미에게서 새끼를 떼어내어 잘 핥아주는 어미에게 두면, 새끼의 스트레스 반응은 생물학적 친모보다 양모의 수준에 더 비슷해졌다. ? 4장 사회화한 유전자 pp.80~81
GR 유전자 발현과 대사 증후군의 관계가 밝혀지자, 일부 연구자들은 자궁에서의 영양 부족이 일종의 스트레스 인자로 작용하는 게 아닐까, 그래서 그 영향을 조절하고자 스트레스 반응이 동원되는 게 아닐까 하고 추측했다. 정말로 그렇다면, 태아가 자궁에서 영양 부족이 아닌 다른 스트레스를 겪어서 코르티솔 수치가 높아진 경우에도 영양 부족과 비슷한 효과가 나타나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 산모가 사회적 스트레스를 겪으면 자식의 대사 증후군 확률이 높아진다는 증거가 있다. (…)
산모의 스트레스는 비만 전염병을 또 다른 차원에서 논할 여지를 준다. 어떤 연구자들은 스트레스가 심한 서구 생활양식, 특히 도시 환경이 오늘날의 비만율 증가에 부분적으로나마 기여한다고 주장한다. 그 스트레스가 태반을 통해 태아에게 전달되고, 그리하여 비만이나 당뇨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파라돈은 어머니가 임신 중에 스트레스를 받았기 때문에 과체중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물론 스트레스의 근원은 여러 가지다. 가난일 수도 있고, 사회적 환경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녀는 시골인 이산 지방에서 살다가 더 나은 삶을 위해 가족을 떠나 붐비는 방콕으로 왔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당연히 심각한 문화 충격이었으려니와, 전통적인 시골 가정이 제공하는 사회적 지원 없이 혼자 고립되는 결과였을 것이다. 스트레스의 근원이 무엇이든, 그것은 파라돈의 몸무게와 스트레스 반응에 모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 5장 태내 환경과 비만의 상관성 pp.1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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