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튼 저녁을 라면으로 때우고 침대에서 뒹굴던 나는 벌떡 일어나서 벌써 삼십 분이 넘도록 중환이가 보낸 카톡을 곱씹고 있었다.
- 선생님이 불쌍해.
- 그놈들이 오늘도 선생님 묘를 찍어 갔어.
그 카톡을 처음 확인했을 때는 “얘가 지금 무슨 장난치는 거야!” 하고 휴대전화를 팽개쳤다가, 중환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해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우여곡절 끝에 선생님의 장례식이 마무리되었고, 이제는 더 이상 다른 문제가 없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그랬기 때문에 중환이에게서 날아온 카톡을 보고 더욱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 p.38~39
길가에 늘어서 있는 건물 중 절반은 부동산 사무실이다. 저 많은 부동산 사무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다 먹고 살 만하다는 것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부동산 사무실이 많아진다는 것은 그만큼 땅값이 올라가고 있다는 뜻인데 원주민인 우리 집은 왜 부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잠깐 했다. --- p.53
“얼마 전에 수종이가 그런 말 했잖아? 선생님한테 옛날 부채를 받은 사람 있냐고? 산신령님이 들고 있는 그런 부채 말야. 그 이야기를 아빠한테 했더니, 그건 부채가 아니고 청동 거울일 것이라고 하는 거야. 아빠도 우리 문중에 그런 물건이 전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대. 자그마한 청동 거울인데 한쪽에는 호랑이가, 다른 쪽에는 산신령이 새겨져 있대. 아무튼 그것을 물려받은 사람은 요즘으로 치면 숲 지킴이 노릇을 해야 한대. 아빠 말로는 산신령 할아버지라고 불렀던 그분이 그걸 가지고 있었을 것이고, 그 뒤에는 선생님한테 물려줬을 거래.”
“그런 이야기를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들이 하신다는 게 더 황당해.”
나는 별로 관심이 없다는 투로 말했다.
주울이가 옆으로 몸을 돌리더니 내 손을 잡았다.
“아무튼 그런 것이 있다고 치고. 지민아, 만약에 선생님이 그걸 우리 중 누군가에게 줬다면, 누구한테 줬을까?” --- p.60~61
한참 만에 수종이는 그렇게 흘러가는 시간의 지배를 받는 자신이 두렵다고 했다.
“우리 친구들은 어떻게 변해갈지, 난 또 어떻게 변해갈지, 진짜 의대에 가서 의사가 될지, 아니면 또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게 될지……. 지민아, 난 진짜 두려워. 지금 어른들을 보면, 엄마 아빠 말야. 두려워. (…) 나무에 올라가면 얼마나 좋은지 아니? 처음에는 약간 무섭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는데, 나무랑 한몸이라고 생각한 순간부터 어찌나 편해지던지. 생각해봐. 나무는 썩어서 부러지거나 태풍에 뿌리가 뽑히기 전에는 넘어지지 않잖아? 그러니 나무는 땅이나 마찬가지야. 내가 나무에 올라가지 않는 것은 다시 내려오고 싶지 않기 때문이야. 근데 요즘 들어서 그런 생각이 더 많이 들어. 나무에 올라가서 나만의 시간으로 살고 싶다고.”
“에구, 난 니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네.” --- p.93~94
다음 날 오후에 선생님은 처참하게 부서진 까치집을 확인했다. 우린 잠깐 선생님 눈을 피했다. 선생님은 땅에 떨어져서 죽은 새끼들까지 보았는데도 우리를 꾸짖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말했다.
“양쪽이 피해가 엄청 컸구나! 까치들이 많이 깨달았겠지?”
우리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어젯밤에는 몰랐는데 소나무 밑에 흩어진 까치집의 잔해를 보자 우리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개미들이 엉겨 붙어 있는 어린 새끼의 시체를 보자 뭔가 큰 잘못을 한 것만 같았다. 더구나 나무 위에서 계속 새끼들을 불러대는 까치를 보자 더욱 마음이 아팠다. 우린 순간적으로 서로의 눈빛을 주고받았다. 말은 하지 않아도 우리가 너무했다는 것을 인정했고, 어서 새끼들을 묻어주자는 뜻이었다. 우리는 모두 네 마리의 어린 시체를 찾아서 나무 밑에다 나란히 묻어주었고, 각자 작은 꽃다발을 만들어서 그 앞에다 놓았다. 어느새 선생님도 와서 꽃다발을 놓았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언젠가는 죽는다는 뜻이란다. 근데 죽을 때가 되지 않아서 죽는 것은 이렇게 슬픈 거야. 우리가 이렇게 해줬으니까, 저기 나무 위에서 보고 있는 까치들도 다시 기운을 내서 살아갈 수 있을 거야.” --- p.81~82
“요새는 다들 좋은 차도 굴리고, 대학 안 나온 사람은 거의 없고, 걸핏하면 해외여행 갈 정도로 잘살지. 그래도 난 산신령이랑 삼신할미 믿던 그 시절이 더 좋았던 것 같아. 사방에 교회나 절은 많아졌지만서두 옛날만큼 신을 믿는 사람은 드물어. 신이 사라져버린 세상에서 사람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아. 저런 산 하나 밀어버리는 것도 순식간이고, 아무도 죄의식을 갖지 않잖아? 만약 신이 있었다면 절대로 그러지 못하겠지. 옛날에는 말이다. 적어도 살아 있는 목숨을 지금처럼 함부로 죽이지는 않았지. 요즘은 무서워서 뉴스를 못 보겠어. 나이든 사람이나 어린것들이나 개구리 잡듯이 생명을 죽이고, 그러잖아? 그래서 난 산신령 같은 신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단다. 그래야 우리한테 희망이 있는 것이지.” --- p.134~135
- 어떤 일이 있더라도 산을 매각하지 않겠다는 약속, 이거 꿈 아니지?
- 교상아, 너도 그런 꿈 꿨니?
- 주울이 너도? 어른들이 자랑스러운 군민상을 받고 마을 잔치를 하는 꿈! 아니 꿈이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말야.
- 중환아, 너도?
- 어엉, 내가 엄마한테 가서 엄마 하고 불렀는데, 엄마는 내 말을 못 들어. 그게 너무 재밌어. 그런 꿈 날마다 꾸고 싶어.
다섯 명의 친구들은 그 신기한 꿈, 아니 어쩌면 꿈이 아닐지도 모르는 그 기억을 끄집어내서 신나게 떠벌렸다. 수종이는 거듭 꿈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어른들의 과거 속으로 시간 이동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게 꿈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우리를 과거 속으로 끌어들인 거지? --- p.168~169
내가 화장실에 갔다 오자 엄마는 누군가랑 통화하고 있었다.
“난 진짜 몰랐어. 아무리 사정이 어렵다고 해도…… 다들…… 이제 어쩌지? 애들 보기 쪽팔리고 민망하고 부끄러워서……. 먼저 가신 분이야 그렇다 쳐도…… 난 애들한테 가 장…… 근데 애란아! 여기서 더 큰 무슨 일이 터질까 봐 겁난다. 제발 무슨 일이 터지지 않고 잘 마무리되었으면 좋겠는데…….”
애란이라면 중환이 엄마였다. 엄마는 당장 내일이라도 친구들 모임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절대 수종이 아빠를 무슨 역모자로 몰아세워서는 안 된다고 했다. 중환이 엄마도 같은 의견인 듯했다. 그러면서 엄마는 자책하듯이 당신에게도 책임이 크다고 했다.
“어쨌든 나도 돈 때문에…… 그래, 그 돈이면 미국에 있는 내 새끼한테도 훨씬 여유롭게 보내줄 수 있고, 남편 강사 일도 막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아니 그런 구실로…… 산이 매각되기를 가장 바란 사람은 나일지도 몰라. 그런데 누굴 욕하고 누굴 탓하고…… 그러니 총무랑 김 사장을 몰아붙이면 큰일 나. 그건 정말 조심해야 해.”
그렇게 한참 통화를 하던 엄마는 알았다면서 전화를 끊었다.
--- p.268~2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