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영고 학생들은 대개 그렇게 세 부류로 나뉘었다. 제트스트림파, 사라사파, 시그노나 주스업 같은 세필 수성 펜파. (…) 태경은, 그 세 부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어쩌면 신영고에 한 명밖에 없을지도 모르는, 모리스파였다.
--- p.12 「올리브색이 없으면 민트색도 괜찮아」 중에서
엄마의 혼잣말을 들었을 때, 태경은 그날로 올리브색을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다. 엄마의 결정은 하나라도 잘못된 게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엄마의 회사인 모리스가 만든 건 뭐든 누군가가 사랑하는 물건이 될 수 있도록. (…) 태경의 필통에는 늘 모리스가 있었다. 엄마의 펜이 있었다.
--- p.20~21 「올리브색이 없으면 민트색도 괜찮아」 중에서
세상에 강선호가 하나 더 있는 게 아닐까. (…) 맨날 나한테 지우개를 빌려 가는 너는, 빌려 간 지우개 모서리를 함부로 닳게 하지 않고 더러운 부분을 손으로 닦아서 돌려주는 너는, 지우개 가루가 쌓이면 잘 모아서 휴지로 싸 뒀다가 버리는 너는, 다른 애들이 말하는 강선호와는 다른 사람 같았어.
--- p.155~156 「중요한 노트는 반드시 복사를 해 둘 것」 중에서
펜을 받고 조심스럽게 똑같은 식으로 선을 그어 보았다. 미끄럽지 않게 종이 위에 글씨가 쓰이는 느낌이 손으로 전해졌다. 아, 이게 확실히 아까 것보다 좋아. 속으로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더니 이연서와 이모가 웃고 있었다.
--- p.95 「시와 수필과 나와 만년필 세 자루」 중에서
“글 쓰는 게 좋아, 엄마. 펜글씨 배울 때처럼 정해진 글씨 쓰는 거 말고, 머릿속에서 나온 글을 종이에 쓰는 게 좋아. 똑같이 만년필로 써도, 내 글을 쓰면 내가 종이 위를 걷고 있는 것 같아. 종이랑 나랑 펜이 하나가 돼서, 내 이야기가 그 사이에 나타나. 그 기분이 너무 좋아.”
--- p.98 「시와 수필과 나와 만년필 세 자루」 중에서
배우지 않아도 아는 거야, 그런 건. 난 어쩐지 새로운 일이 시작되는 것 같은…… 어떻게 비유하면 좋을까. 그냥 볼펜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내가 지워지는 볼펜이었다는 비밀을 깨달은 기분. 사람들처럼 비유하자면 처음 줄넘기를 성공한 순간의 기분.
--- p.186 「스테이플러가 있으면 무섭지 않아」 중에서
나는 어쩐지 소명이가 학예제에서 날 보고 관심을 갖게 된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소명이도 축구를 그만큼 열심히 해 온 거다. 그래서 알아보는 거야. 어떻게든 최선을 다하려고 애쓰는 얼굴을. 시합에서 내 눈에 채소명밖에 보이지 않았던 건 소명이가 축구를 제일 잘하는 선수여서가 아니라, 한순간 한순간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열심히 해 온 사람은 알 수 있다. 그 순간에 온 힘을 다하는 사람의 얼굴을, 모를 수가 없다.
--- p.205 「흔들리는 것보다는 부러지는 게 낫다」 중에서
소명이의 말에 나는 활짝 웃어 보였다. 아무도 이상하다는 말을 안 믿어 줘서 나는 내가 이상한 줄 알았는데. 이야기한 적도 없는데 소명이가 내 마음을 알아줬다는 게 좋았다.
--- p.209 「흔들리는 것보다는 부러지는 게 낫다」 중에서
“너는 흔들리지 않는 애니까, 너한테는 부러지지 않는 샤프보단 흔들리지 않는 샤프가 어울린다. 그래.”
(…) 나는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니까. 권민주의 동생이지만 권민주의 도움으로 살지 않을 거니까.
“안 챙겨 줘도 돼, 언니. 나, 잘할게.”
--- p.210~211 「흔들리는 것보다는 부러지는 게 낫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