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과 곰인형의 밤] 조예은
살아 있는 것은 부드럽고 말랑하며 따뜻하다. 그 부드럽고 말랑하고 따뜻한 살이 나를 감싸자 죽을 것 같았다. 힘은 또 어찌나 센지 숨까지 막혔다. 나는 은성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 곰인형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배고픈 몽마일 뿐이니까.인간들은 나를 통해서 가장 피하고 싶은 것을 본다. 이 시스템에는 오류가 없다. 내가 곰인형으로 변했다는 건, 은성이 가장 피하고 싶은 게 이 곰인형이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지금 은성은 무서워하기는커녕 환하게 웃고만 있다. 이래서는 내가 배를 채울 수가 없다. 나는 뭐라도 하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방방 뛰든, 괴성을 지르든, 공포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무슨 짓이라도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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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러볼 케이크] 은모든
그냥 그런 거 있잖아요. 가끔은 작은 조각 말고 홀케이크를 사고 싶은 기분이요. 아니, 그보다는 쇼케이스에 홀케이크를 그대로 내어놓고 싶은 기분이라는 게 더 잘 맞을지도 모르겠네요.”물론 큼지막한 케이크는 자칫 잘못하면 처치 곤란이 되기 십상이라는 점은 그도 잘 알고 있었다. 여러 조각으로 나누는 편이 더 잘 팔리고 더 많은 사람을 기쁘게 할 거라는 사실을 누가 부인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조각조각 내는 게 당연한 일이지만 때로는 잘리지 않은 모습, 처음에 빚어진 원래의 모습 그대로 두고 보고 싶은 기분이 드는 것 역시 아주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고 그는 되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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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둘기가 길을 건너는 1분 동안] 김종완
나는 허리를 세우고 운전대를 잡고 있는 인경을 봤다. 인경이 크크 깍깍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이 섬뜩해 보였다. 인경은 속력을 더 냈고, 그럴수록 더 크크 깍깍 웃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던 풍경에 무슨일이든 일어날 것만 같았다. 어딜 가는 걸까? 왜 웃고 있지? 점점 불안해졌고, 나는 소리쳤다. “왜 웃어!”인경이 말했다.“뭐야, 꿈꿨어? 놀랐잖아.”인경이 나를 흘겨보며 말했다. 인경은 무언가에 집중하고있었던 것 같다. 나는 안경을 똑바로 썼다. 잠시 숨을 고르며, 롤러코스터를 타고 내려와 지면에 발을 디딘 것처럼 꿈과 현실의 낙차에 적응했다. 현실에서는 여전히 싸라기눈이 내리고 있었다. 인경은 웃고 있지 않았다. 인경이 차창 유리 너머에 시선을 두고 속삭였다. “저기 좀 봐.”나는 인경이 보고 있는 곳을 바라봤다.
[꿈의 기원] 최유수
꿈에서는 누구나 혼자일 수밖에 없었다. 밤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추위는 날마다 점점 더 깊어졌다. 멍하니 줄지어 서서 몸을 떨었다.우리는 한 편의 단편소설처럼 각자의 플롯 속에서 조용히 나아갔다. 손에는 오래된 지도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무수히 펼쳐진 밤들 중 하나로 저마다 조금씩 가까워지고 있었다. 익숙한 궤도를 돌고 돌아서 차원의 중심을 향하여. 그러는 동안 차마 버리지 못한 감정들이 제자리를 찾아갔다. 먼 곳의 별들이 거세게 타올랐다. 우리는 꿈속에서 끝없는 어둠을 더듬거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도 갈팡질팡하지 않았다. 신에게 기도하듯이 자기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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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전에 하는 말] 김은지
내가 이제 쓰려고 하는 건 아침의 말이 아니라 밤의 말. 베개를 베고 누워 잠이 들기를 기다리면서 하는 말이다.눈을 감으면 뭔가를 말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 이건 낮에 사람들과 나누는 말과는 조금 다르다. 상대가 날 이해해줄 필요도 없고중얼거리는 혼잣말에 가깝다.떠오른 것들을 말로 풀어보고 싶은 것이다. 때로는 ‘이 얘길 왜 하지’라는 생각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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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허밍을 한다] 강혜빈
잔은 어릴 적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꿈을 꿨다. 컬러와 소음들로 이루어진 꿈. 때로는 액자식 구성으로 한 개의 꿈속에 또 다른 꿈들이 상영된다. 이전에 가 보았던 동네나 골목을 다시 가기도 하고, 이름 모를 얼굴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들은 또렷하게 그곳에 있다. 꿈속에서 잔은 불에 타 죽기도 하고, 낯선 이와 입을 맞추기도 하고, 물 위를 걷기도 하고, 흰 저고리를 입고 전쟁에 뛰어들기도 한다. 잔은 태어나는 날에도 꿈을 꾸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아니, 어쩌면 더 이전의, 더 작은 존재일 때부터.
--- p. 103
[받침에 관하여] 오종길
놀란 토끼 눈으로 욕실 밖을 내다보면 엄마는 없었다. 치, 거짓말쟁이. 분명 부엌에서 설거지하고 있겠지. 그렇다. 엄마의 공간, 부엌의 “ㅋ” 받침은 아련한 구석이 있다. 해 질 녘의 “ㅋ”은 또 어떻고. 연필로 이런 단어들을 써내려갈 적이면 “ㅋ”의 끝자락에서 힘주어 멈추게 된다. 끝에서 잠시 멈춰보는 자세는 무언가의 구석에서 남몰래 눈물짓는 이들이 숨 고를 틈을 주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다. “녘”의 받침은? 주황색 물감을 푸는 사이 보랏빛으로 변하는 노을을 발견한 저녁, 걸음을 멈추고 사위가 어둑해질 때까지 색의 변화를 넋 놓고 보던 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 p. 120
[이미 기록된 미래] 서이제
너는 작았고, 너는 너만큼 작은 몰티즈를 데리고 다녔다.몰티즈의 이름, 코코. 우리는 어렸고, 매일 코코와 함께 뛰어다녔다. 온종일 동네를 뛰다 보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넘어졌다. 반바지 아래로 드러난 무릎. 너의 무릎에는 반창고가 붙어 있었고, 너는 때때로 반창고를 조금 떼어 상처를 내게 보여주기도 했다. 이거 봐. 나도 있어. 우리는 서로에게 상처를 보여줬다. 상처 위에 피딱지가 생기면, 우리는 그것을 손가락으로 긁어 떼어냈다. 아팠고, 아팠지만?떼어냈고. 딱지를 떼어내다가 종종 눈이 마주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을 보고 괜히 웃곤 했다.
--- p. 135
[새벽 세 시에 떠올리는 얼굴들] 김현경
당신은 꿈을 많이 꾸는 편인가요?한번은 “꿈 없이 잠들길” 하는 밤인사를 받은 적이 있어요. 또 내가 좋아하던 이에게 “좋은 꿈 꾸길” 하는 인사를 받은 적도 있지요. 꿈 없는 잠을 자는 것이 좋을까요, 좋은 꿈을 꾸는 게 좋을까요? 당신은 어떤가요? 꿈 없는 잠은 정말로 푹 잔다는 말일 테죠. 하지만 나는 좋은 꿈을 꾸는 편이 더 좋아요. 좋은 꿈에서만큼은 내가 가고 싶은 곳,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가끔은 어떤 꿈을 꾸었는지 기억나지 않아도 따듯한 마음으로 깨어날 때도 있어요.
--- p. 158
[잠이 오지 않았고 생애 두 번째 소설] 태재
두 개는 좀 어렵지만 그래도 한 개 반 정도는 가능해 보였기에 그 냄비를 집어서 정수기에 물을 받았다. 이 녀석, 혼자 살면서 정수기를 쓰다니. 방심하기는 어려운 남자라는 생각을 하면서 라면 봉지를 뜯었다. 라면을 끓일 때 사람마다 요령이 있겠지만 나는 수프보다 면을 먼저 넣는 쪽이다. 면이 익으면서 기름이 물에 풀리는 그때 수프를 넣어야 맛있다고 믿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의 믿음, 그리고 이렇게 끓여서 맛을 본 사람들의 믿음일 것이다. 반대의 믿음도 마찬가지고.
--- p. 170
[오늘 밤의 플레이리스트] 임진아
그는 어두운 방에 작은 조명을 켜두고 편안한 복장으로 카메라 앞에 앉아 묵묵히 노래를 불렀다. 기타 하나만 슬며시 껴안고 부르는 노래와 잔잔한 멘트가 내 컴퓨터에 흘러나오던 아직은 추운 날. 책이 가득해서 쏟아질 것 같은 책장 앞에 앉아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그제야 일전에 던진 연필을 다시금 잡기 위해 손을 더듬거렸는지도 모르겠다. 노래를 부르는 곁에는 뜨거운 전기스토브가 이글거리고 있었고, 내 방도 마침 함께 추웠다. 어떤 곡을 라이브로 부른다는 건 사실 곡의 민낯을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진다. 무엇보다 이 노래를 처음 흥얼거렸을 음악가의 어떤 날을 괜히 상상해보게 되면서 감상의 폭이 괜한 쪽으로 확대된다. 내가 사는 마을에서 그가 사는 마을로. 내 방과 그의 방이, 함께 보는 모든 이의 방이 환해진다. 조용히 흐르는 노래를 곁에 둔 모두가, 아무도 모르게 이어진 밤이었다.
--- p. 183
[진부한 꿈의 미로들] 듀나
가장 자주 쓰는 건 벽 속으로 들어가는 초능력이다. 이 능력의?기원은 마르셀 에메의 단편 「벽 속으로 들어가는 남자」임이 확실하다. 재빨리 변장하는 능력도 있는데, 이럴 때 내 모습은 거의 10여 분마다 바뀐다. 바뀔 때마다 늘 성을 바꾸는 경향이 있고 변장하는 곳은 늘 공중 화장실이다. 책이나 영화를 통해 공간 도약의 개념을 감각적으로 익혔지만 거기까지는 도달하지 못했다.하늘을 나는 꿈만큼 자주 꾸지는 않았지만 이 꿈은 지금까지도 살아남았다. 그리고 하늘을 나는 꿈과는 달리 대부분 뒷맛이 별로다. 그래도 도주의 쾌락이 없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이 꿈을 어떻게 써먹을지는 결정하지 못했다. 이런 건 모두 슈퍼히어로 장르 클리셰인데, 지금 이 장르의 글을 쓰는 건 좀 피곤한 일이다.
--- p. 199
[긴밤의 단상] 손현녕
누가 우리 주치의처럼 나에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사람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너에게 관심 없는 사람이 있듯, 너에게 관심이 가득한 사람도 있다고. 아직 나타나지 않았을 뿐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으며 널 만나기 위해 달려오는 중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서로를 향해 마주 보고 천천히 걸어가고 있는 중이니 당장 눈앞에 보이지 않아도, 당장 주변에 널 괴롭게 하는 사람들밖에 없더라도 조금만 기다리라고. 너의 의미를 읽어줄 사람은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으라고 확신을 주는 말이 필요했다.
--- p. 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