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로 태어난 백성이다. 이 말의 의미는,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 행동의 산물이지,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선교로 규정되어야지, 그 반대가 아니다. 이 구원의 선교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도 여정 중에 있다. 우리들은 전에 쓴 책에서, 기독론(우리의 원초적 신학)이 선교론(우리의 목적과 기능)을 결정하고, 이것이 연이어 교회론(교회의 표현 형식)을 결정한다고 말한 바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명을 받은 백성이며, 오직 예수님의 백성인 우리만이 실현할 수 있는 과제를 안고 있다.
--- p.29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적 안전이라는 잘못된 기대에 안주하지 말고, 예수님을 믿고 신뢰함으로써 밀려오는 사건들에 대응하며 우리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지상의 위대한 모험가들이며, 우리의 삶은 진정한 모험이라는 특성으로 말미암아 어디서나 동분서주하게 되어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우리는 사실상 우리 자신 안에 갇혀있는 문제들보다 더욱 크고 중요한 일에 우리가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사건이 일어나야 이 사실을 인식하게 된다. 그때서야 비로소 ‘모험’중에 있는 우리의 존재감이 떠오르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의식하든 못하든 늘 인생은 이렇게 존재해왔으며, 이것을 ‘파악할’ 수 있는 우리의 역량이 우리가 신실한 삶을 살 수 있고 없는 차이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 p.47
적어도 우리가 판단하기에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조물에게 부여하시는 자유와 우연성에는 어떻게든 위험이 내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자유라는 개념 안에 있는 실체와 의미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랑한다는 말은 그 자체의 의미로 보자면 어떤 의미로든 고통이나 상실을 겪을 수 있는 상태를 선택한다는 의미이고, 따라서 위험이 따른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에서 묘사하는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이런 방식으로 사랑을 보여주신다. 그분께서는 피조세계를 잃으신 일을 매우 심각하게 느끼고 계신다. 또한 성육신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인성에 수반되는 중대한 위험을 감수하셔야 했다. 왜냐하면 진정으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어떤 유한한 형상을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하며, 위험하지 않은 선택을 하기 위해 필요한 총체적 안목과 능력, 그리고 지식이 결여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의 진정한 인성을 약화시키려는 모든 시도들(예를 들어 가현설이나 영지주의등)을 이단으로 판정했으며, 그 판정은 정당했다.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서 성육신과 구원에 대해 이해하는 바도 바로 여기에 근거를 두고 있다.
--- p.52
이스라엘이 없이는 유대인이라는 실체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교회 없이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실체도 없다(고전 12장 13절).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우리의 정체성은 에클레시아(ecclesia: 신약성경에서 교회를 뜻하는 헬라어?역주)를 이룸으로써 공동의 정체성으로 묶이게 된다. 에클레시아란 예수님께서 부르시고, 지명해주시고, 구속해주시고, 다스리시고, 사랑해주시는 사람들의 집단이다(롬 1장 1∼3절, 엡 4장, 골 1장 1∼3절, 벧전 2장 9, 10절, 계 1∼3장). 우리가 공동체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면 결코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가 되지 못할 것이다.
--- p.80
안전 집착증이 인생의 어느 시점에서 충실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방해할 수 있다. 두려움은 우리가 한때 당연하게 여겼던, 좋은 생명력이 있는 많은 활동들, 즉 숲속을 산책한다든지, 햇빛을 받으며 뛰노는 일, 또는 너른 바다에서 헤엄치는 일 등을 못하게 만든다. 우리가 두려움으로 육아를 할 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우리는 무엇을 격려하고 발전시켜야 할지보다 무엇을 예방하고 피해야 할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아이들을 안전하게 지키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부모들은 아이들이 성장하고 배우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탐구하며 심지어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우리는 아이들이 두려움 많고 옹색한 사람이 아니라, 포용력 있고 관용적인 성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 p.131
성경의 대부분을 중대한 위험과 혼란에 처한 사람들이 기록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실제로 그러한 사실들은 성경 전체에 걸쳐 가득하기 때문에, 목록들을 대충 살펴보기만 해도 예사로 등장한다. 이스라엘의 고유한 역사는, 자신의 고향을 버리고 환영받지 못하는 장소로 멀리 여정을 떠나라는 소명을 받은 한 가족으로부터 시작된다. 성경에는 이집트로 비참하게 노예로 팔려갔다가 나중에 이집트 치하에서 온 민족을 섬긴 요셉의 경험도 실려있다. 비슷한 역사를 전사이자 모험가인 다윗, 불행한 모험가 욥, 도망자 요나, 해외이주자 룻, 우울한 예레미야가 기록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 위협받고, 침략당하며, 유배지로 끌려가고, 멸망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여기에서는 전쟁과 억압, 굶주림, 홍수, 그리고 제국의 흥망성쇠가 등장한다. 또한 신약성경은 모험가이자 선교사인 바울과 베드로 및 그들의 동료들이 살아가는 현장 속에서 기록되었다. 이 모든 것의 기반은, 핍박당하시고 고난당하신 그리스도의 삶이었다. 실제로 성경 가운데 안정적이고 안전한 상황에서 기록된 내용은 극히 적다.
--- p.203-204
사람들은 자신들이 제자훈련을 덜 받았다는 이유로 선교에 동참하기를 꺼려한다. 그러나 그들이 제자화가 덜 된 것은 선교적 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지하게 의문을 제기한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선교하는 삶으로 보내지기 전에, 과연 더 많은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할까? 대부분의 교회 구성원들은 넘치도록 성경을 배워왔다. 그런데도 그들이 충분한 훈련을 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이유는, 선교적 상황 속에서 그 배운 바를 검증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을 선교지로 보내라고 말한다. 그들이 경건한 섬김의 위험을 감수하게 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들이 삶을 바라보는 성경의 관점을 더욱더 갈급해하리라 장담한다.
--- p.220
이쯤 되면 교회를 분명히 진정한 코뮤니타스로 존재하게 하는 최선의 방법은, 지속적으로 선교가 제 위치를 찾는 것이다. 선교는 교회가 지속적으로 경계적 경험을 하게 한다. 왜냐하면 선교는 죄로 물든 현실의 상태에 거룩한 불만을 품고 하나님 나라의 목적을 표현하면서, 언제나 우리가 더욱 신실하며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한 미래를 추구하도록 격려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선교로 새롭게 단장해야 한다. 선교에는 하나님의 독특한 형상이 서려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선교적이시기 때문에, 우리도 선교적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어떻게 달리 존재할 수 있겠는가(엡 5장 1절)? 위에서 말한 깡통따개 은유에 근거해서 볼 때, 우리는 선교가 제 위치를 잃을 경우 그런 교회를 교회로 여길 수 없다. 또는 적어도 한동안은 ‘교회’가 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우리 저자들이 선교적 대화, 즉 선교를 교회의 제 위치에 되돌려놓으려는 이 대화가 우리의 시대와 장소에서 기독교를 위한 진정성과 갱신의 씨앗을 품고 있다고 널리 주장하는 이유다.
--- p.250
교회가 선교의 소명을 끌어안을 때, 그 교회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연쇄작용이 일어날 것이다. 모든 것은 우리의 선교적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선교적 대의를 향하여 형성되고 방향을 정립할 것이다. 선교적 기독교는 하나님을 우리의 삶에 맞추려 하기보다는, 우리의 삶(개인적이거나 집단적인 삶 모두)을 하나님의 선교의 어디에 맞추어야 하는지를 질문한다. 선교적 교회들은 복음을 현대에 의미 있는 것으로 만들어내는 방법을 찾으려 하기보다, 세상을 복음의 요구에 부응하도록 변화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에 협력할 것이다. 교회의 선교에 무엇이 포함되고 무엇은 포함되지 않는지를 논쟁하신 대신에, 선교적 교회들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교를 위해서 빚어내기를 바라시는 교회가 어떤 모습인가를 질문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분의 선교를 위해 어떠한 교회를 원하시는지를 물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의 교회’를 위해 어떠한 종류의 선교적 소명을 부여하셨는지가 궁금해질 것이다.
--- p.2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