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게임」을 통해서 우리는 이미 일상화된 또 다른 형태의 폭력을 목격한다. 이 시리즈는 한 그룹의 다른 그룹에 대한 승리와 지배가 아니라, 마지막까지 죽지 않고 오직 한 사람만 살아남는 세상의 규칙을 받아들이기 위해 게임에 참여한다는 점이 중요하다. 모든 사람이 아이들 게임의 규칙에 동의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시리즈물의 매력으로 인해 야기될 내용이 무엇인지 자문해보고, 이 시리즈물이 우리가 영위하는 현대 세계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지 더 잘 이해해보고 싶은 욕구가 생겼다. 「오징어 게임」을 본 프랑스 청소년들에게 이 시리즈물에 대해 질문하자, 「오징어 게임」이 묘사한 세계가 자신들을 전혀 놀라게 하지 않았다는 듯이 내용이 그렇게 폭력적이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 때문에 나는 이런 책을 쓰고 싶다는 욕구가 더욱 강해졌다.
---「한국 독자에게 보내는 서문」중에서
「오징어 게임」은 예속, 폭력의 수용, 잔인함과 죽음 등이 민주주의의 결정과 동의, 투표의 결과물인 세계다. 그렇다고 그것이 민주주의일까? ‘동의’가 민주주의를 정의하는 데에 충분할까?
「오징어 게임」은 폭력적인 세계에서 밀려난 개인들에게 똑같이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다룬 세계다. 그곳에서는 평등이 불공정을 대신한다. 그러나 정의가 평등일까?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에 맞서 사형집행인이나 희생자 중 어느 존재가 되는 것이 더 나을까? 불공정을 감내하는 것과 그걸 저지르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나을까?
---「머리글」중에서
한쪽은 어떤 사람에게 자기 목숨을 처분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 그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다른 쪽은 자기 몸을 팔거나 스스로 파괴하는 자를 자기 욕망의 노예이며, 정의상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한쪽은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1938~2002) 같은 사상가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자유지상주의 관점이고, 다른 쪽은 이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 1804) 같은 철학자가 견지하는 휴머니스트의 관점이다. 그렇다면 노직일까 칸트일까?
---「제1장 인간 존재의 가치는 무엇일까?」중에서
이 게임에서 4명의 게임 참가자는 죽을 위기를 겪는다. 1명의 참가자를 희생시키면 나머지 세 사람은 확실히 살아남는다. 결정은 가장 많은 사람의 이익에 근거한 계산과 연결돼 있다. “가장 많은 숫자의 가장 큰 행복이 정의로운 것과 불공정한 것의 척도다.” 그것이 ‘공리주의utilitarisme’라 명명한 사상의 원칙이다. 훌륭한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모든 이익을 합산하고, 거기에서 비용을 빼고, 어떤 행동의 결과를 평가하는 일이다. 이런 관점은 이기적이지 않다. 개인의 행복에 근거를 두고 있지 않은 대신, 공동체의 행복에 근거를 두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원칙을 확장할 수 있을까?
---「제1장 인간 존재의 가치는 무엇일까?」중에서
동의, 공동의 규칙을 중심으로 한 참여, 모두의 평등에 근거한 정치체제가 있다. 바로 민주주의다. 생각지도 못하겠지만, 「오징어 게임」의 세계가 수용소 세계의 형태를 많이 띤 민주주의적 세계라고 말한다면 충격적일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지원자들은 게임에 참가하기를 결정했고, 게임으로부터 빠져나오는 일을 투표에 부쳤으며, 계약 내용을 알고 계약을 받아들이면서 게임으로 되돌아오기를 동의했다. 또 똑같은 규칙을 따른다는 의미에서 그들은 평등한 입장이었다. 그렇다면 이는 현대의 모든 민주주의 원칙에 따른 것이 아닐까? 그것은 민주주의일까?
---「제2장 민주주의란 무엇일까?」중에서
「오징어 게임」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광경은 세상의 폭력, 민주주의가 최악의 결점들을 드러내는 마지막 단계 등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게임 참가자나 교도관 할 것 없이 각자가 동의한다는 담론으로 형성된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1844~1900)의 말처럼, 개인들이 그런 공포에 동의했다고 해도 새삼스럽지 않다. 기껏해야 사람들은 그들이 동의했다는 점을 그들에게 반복해서 말할 것이다. “당신들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게임을 떠나는 것을 ‘민주적으로’ 결정할 가능성이 늘 열려 있습니다.” 투표하기 때문에, 선택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안전의 추구에 무엇보다도 몰두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최악의 체제를 향해 달려간다. 우리에게 반복되는 표현은 다음과 같다. “당신들이 선택했습니다. 민중이 선택했습니다. 당신들이 복종하는 권력기관은 민중입니다.” 조작의 정점은 당신이 당신에게 일어난 일을 책임지고 있고, 그 책임을 담당해야 한다는 점을 믿게 하는 것이다.
---「제2장 민주주의란 무엇일까?」중에서
따라서 절대권과 같은 유혹적인 용어들에 속아서는 안 된다. 복원해야 할 민중의 절대권이란 개념은 대개 민중에 대한 지배를 치장하는 단어에 불과하다. 민중이 원할 수 있다는 착각을 과시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민중은 원하지 않는다. 민중은 주체도 아니고 개인도 아니다. 공적 토론과 공동의 행동 속에서만 민중이 구축될 수 있다. 「오징어 게임」 속의 모든 참가자가 박탈당하고 있는 것은 이런 토론이다. 게임이 계속될지를 알기 위한 투표는 자신들과의 투쟁 속에 갇힌 개인들의 욕망에 휘둘릴 뿐이다. 그런 개인들은 타인들 앞에서 그 어떤 순간에도 자신을 정당화할 수 없다. 제1회 ‘무궁화꽃이 피던 날’이 끝날 때 각자는 고독 속에서 자신이 내린 선택을 알리기 위해 앞으로 나간다. 게임이 계속돼야 하는지, 아닌지, 결정할 때다. 절대권의 항구적인 복원에 대한 요청은 우리의 눈에 자유를 회복할 수단처럼 보이기에 종종 열광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그러한 요청은 민중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믿게 하면서 지배 논리로 변질할 위험을 늘 안고 있다. 자유롭게 해주는 것은 절대권이 아니라 협의를 거친 행동이다.
---「제2장 민주주의란 무엇일까?」중에서
경제, 사회, 영토의 불평등이 게임 참가자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고 그들이 타인들과의 ‘죽음의 게임’ 속으로 들어가도록 떠민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게임 참가자, 교도관, 주최 측 관계자 등 참가자들 모두의 동의를 전제로 한다. 비록 동기는 다 다르지만, 소비 논리에 대한 총체적인 수락이 있었다. 하지만 그 수락은 서로 다른 형태를 취한다. 한쪽에는 부정을 감내하는 자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부정을 저지르는 자들이 있다. 한쪽에는 약자들이 있고, 다른 쪽에는 강자들이 있다. 어느 쪽이 가장 좋을까? 희생자가 되는 것이 나을까 아니면 사형집행인이 되는 것이 나을까?
---「제2장 민주주의란 무엇일까?」중에서
각자가 똑같은 권리, 똑같은 기회를 가진 사회가 정의롭다고 규정한다면, 「오징어 게임」에서 부당한 것은 정말 아무것도 없다. 개인이 선택할 여지가 없는 타인들의 삶을 가지고 게임을 할지라도 그렇다. 무엇보다도 불공정은 참가자들에게 참여하도록 강요하는 조건의 불평등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경제적, 사회적 조건의 평등화가 모든 결정과 모든 참여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게 된다. 안락한 삶을 영위한다면 그 누구도 이런 살육 게임에 참가하는 위험을 겪으려 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건의 평등화는 언제든지 자유를 희생시킬 위험이 크다. 이런 토론은 우리가 ‘권리-자유[droits-libertes]’와 ‘권리-신용[droits-creances]’이라고 명명한 것들 사이의 대립에 관한 토론이다.
---「제3장 정의」중에서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1953~)이 『능력의 폭정The Tyranny of Merit』에서 강조했듯이 이런 현상은 성공을 맛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안겨준다. 다른 방법을 쓰지 못했다는 감정과 선택받지 못한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이 더해진 감정이다. “원할 때 행할 수 있었기에”, 게임에서 진 참가자들은 게임에 참여하게 해줘서 고맙다는 인사까지 한다. 상황이 어려운 사람들에게는 기회조차 없기 때문이다. 샌델이 강조하는 것처럼, 그러한 수치심이 모종의 포퓰리즘 형태로 표현할 수 있는 원한을 생산한다는 측면에서 위험이 따른다.
---「제3장 정의」중에서
정의는 기회의 평등 속에 있을까? 「오징어 게임」이 제기한 문제가 바로 이 문제다. 현실 상황을 탈출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자, 그동안 기회를 얻지 못한 사람들, 그 기회를 활용할 줄 몰랐던 사람들을 포함해 누구에게나 똑같이 제공된 기회다. 출생의 우연성과 기회의 자리를 전제로 해 재능이 없는 불평등에 대한 보상의 기회를 평등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징어 게임」에서 게임의 규칙은 이런 제안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인다. 그러나 그 아이디어는 기회의 평등이 정의롭다는 사실을 확인해준다. 우리가 책임질 수 없는 실패를 보상해주기 때문이다. 또 기회를 얻지 못했기에 가난한 자들에게 도움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매력적인 이런 제안은 존재의 우연에서 기인하는 불평등을 지워버리려고 시도한다. 출생에 상관없이 누구든 성공에 대한 똑같은 기회를 부여받아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선택에 관련된 것과 기회에 관련된 것은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사실, 좋은 선택을 한 자들만이 성공을 누릴 수 있다.
---「제3장 정의」중에서
외부의 조건들이 개인이 결정한 바로 그곳에서 그의 책임을 확인하고, 또 동의가 만들어낸 결과인 바로 그곳에서 동의에 대해 말하면서 사람들은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게임의 승자와 패자로 나뉘는 세계를 생산해낸다. 이기는 것은 노동과 노력, 재능을 통해 보상받는 것을 의미한다. 이기는 것은 무엇보다도 부를 축적하는 일이다. 천장에 매달려 있는 유리 저금통은 우리에게 그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준다. 승리는 타인들과의 경쟁 속에서만 획득된다. 게임 참가자들은 ‘노동자’로, 교도관들은 ‘매니저’로 불린다. 「오징어 게임」이 우리에게 불공정한 사회의 완성을 묘사해주고 있고, 노동의 가치화가 우리를 뛰어넘는 논리에 귀속되어 있다면 노동에 대한 모든 가치를 부정해야 하지 않을까?
---「제3장 정의」중에서
처음부터 조직적이지는 않았지만 「오징어 게임」이 그려낸 게임의 세계는 학살로 이어지는 노동 수용소 양상을 하고 있다. 아우슈비츠수용소는 ‘노동이 자유롭게 한다’라고 주장한다. 반면 「오징어 게임」 시리즈 속에서의 유일한 해방은 게임을 통해 이루어지는 해방이다. 그 해방은 단 1명의 승자에게만 돌아간다. 「오징어 게임」의 세계는 장난감 가게 색깔을 한 무미건조한 환경 속에서 재현된다. 경쟁이 난무한 세상의 폭력 속에서 개인들은 계산하고, 투쟁하며, 도박을 걸고, 승자가 되기 위해 움직인다. 성인이 된 참가자들은 자신들을 만들어낸 가해자를 위해 임무를 완수한다. 사회에서 탈출하는 일이다.
---「제4장 노동」중에서
목숨을 부지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생산하지 않는 활동들을 완수하기 위해 「오징어 게임」 시리즈 속 곳곳에서 탄압이 등장한다. 게임 참가자들, 교도관들, 주최 측 관계자들 각자가 규칙을 받아들이며, 각자가 명령에 복종한다. 이런 예속에 대한 수락은 소외이자 비인간화다. 그러나 노동이라는 가치로 우리 사회에서 생산할 수 있는 것을 섬이라는 장소에 옮겼지만, 그것은 노동 자체보다 노동의 조직화와 훨씬 더 관련이 있다. 이런 조직화는 곳곳에서 등장한다. 각자는 잘 정의된 자신의 역할을 갖고 있다. 교도관들은 서로 다른 계급상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벨 소리는 활동에 리듬을 부여하고, 시계 속의 카운트다운은 박자를 부여하면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더 강해져야 한다고 느낄 수밖에 없는 스트레스를 준다. 이런 조건에서 노동은 어떻게 모든 개인을 해방시킬 수 있을까?
---「제4장 노동」중에서
게임이라는 간접적인 수단을 통해 「오징어 게임」이 우리에게 묘사하고 있는 바는 내부에서 바라본 노동의 현실이다. 수용소 이미지를 통해 극단적인 형태로 우리에게 그려진다. 시몬 베유는 공장에서 직접 체험한 노동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나는 경험을 통해 두 가지 교훈을 끌어낼 수 있었다. 첫 번째 교훈은 가장 쓰라리고도 예기치 않았던 것인데, 탄압이 일정한 강도에서 출발하여 반항에 대한 성향을 낳는 것이 아니라 가장 완벽한 예속에 대한, 거의 저항 불가능한 성향을 낳는다는 사실이다.”
---「제4장 노동」중에서
「오징어 게임」에서 돈은 타인들의 죽음으로 영양분을 공급받는 토템이다. 우리가 그런 모습을 끊임없이 목격한 것처럼, 상황들이 우리를 도덕적으로 막다른 골목에까지 인도한다면 유일한 답은 정치적인 성격을 띠게 된다. 우리가 「오징어 게임」의 세계 속에서 살기를 원할까? 아마 그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로 제기될 것이다. 보다 일반적으로 그 질문은 우리가 공동으로 어떤 삶을 누리고 싶은지 자문해보면 안다. 시즌1이 끝나면서, 기훈이 게임에서 승리해 구한 목숨을 자신이 원치 않는다는 점에 주목하자. 그러나 그런 질문을 집단으로 제기하는 것은 우리가 그 문제를 토론할 수 있고, 집단적 선택에 따라 한계를 두는 제도들을 가동할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돈에 대해 비판할 수는 있다. 하지만 돈이 재정은 아니다. 돈의 과다, 돈의 치명적인 사용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가동 중인 제도들이 그것들을 허용하기 때문이다.
---「결론 돈은 토템일까 터부일까?」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