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내자, 말고 힘들지, 라고
잘해라, 말고 잘하자, 라고
안됐다, 말고 어떡해, 라고
잘됐다, 말고 잘했다, 라고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서 미안하다고
곁에 있어줘서 손을 잡아줘서 고맙다고
오백서른일곱 가지 이유로 좋아한다고
어제처럼 오늘도, 오늘처럼 내일도, 난 너의 편이라고.
--- p. 17
감정에 솔직해지는 일.
어렵고 부끄럽고 가끔 무의미해지고 때로 후회하게 되는 일.
그래도 누군가 내게 그래줬으면 하는.
그래도 그럴 수 있는 누군가가 가까이 있어주었으면 하는.
어렵고 부끄럽고 가끔 무의미하고 때로 후회하더라도.
--- p. 24
딱히 안되는 일도 없는데 되는 일도 없고.
딱히 식욕이 없는 것도 아닌데 먹고 싶은 것도 없고.
딱히 외로운 것도 아닌데 혼자 있기 싫고.
딱히 바라는 것도 없는데 모자란 것 같고.
딱히 걸고넘어질 일도 아닌데 거치적거리고.
딱히 움직여야 할 이유도 없는데 마음이 흔들흔들.
나를 달래고 일으켜서 뭔가를 하게 하거나 혹은 하지 않게 하는 일.
수천 번을 겪어도 어렵고 난감한 일.
딱히 하기 싫어 죽겠는 건 아닌데 꼭 이래야 하나 싶어서.
--- p. 87
오랜만에 약속도 없이, 급히 해야 할 일도 없이, 미열이나 통증도 없이, 뒤척이거나 쓸쓸하거나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는 마음도 없이, 마음을 묶어두고 기다리는 것도 없이, 어디론가 가려 하는 의지도 없이, 아마도 무척 오랜만에, 어떤 온기에 담겨, 나의 중심으로부터 무언가 다시 차오르는 것들을 느꼈다. 피고 또 지는 것이 모처럼 두렵지 않아졌다.
--- p. 100
읽고 있던 책에서 접어둔 부분을 펼쳐 굳이 그곳에 사인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글을 보며 상상했던 나와 실제로 만난 내가 다르지 않아 기뻤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도 거의 처음이었다. 호기심과 총기가 어린 눈매, 의지가 강한 입매, 타인의 이야기를 향해 기울이는 귀, 무엇이 될까가 아니라 무엇을 할까 고민하는 스물여섯이 아름다웠다. 홀로 쓴 글들이 어떤 아름다운 존재에게 가 닿는다는 실감이 놀라웠다.
--- p. 105
물을 잡으라는 말이 무슨 은유 같은 건 줄 알았다. 문고리도 아니고, 형태가 없는 것을 잡으라니, 그게 내 손에 잡힌다면 이미 물이 아니잖아, 했다. 손가락을 붙이고, 손바닥을 오므리고, 쭉 뻗은 팔을 배 쪽으로 당기며 팔꿈치를 꺾었다가 힘차게 뻗을 때, 손바닥과 팔의 안쪽에 묵직하게 전해져 오는 물의 근육을 느끼고 약간 감격했다. 물을 잡았다고 하여 그것이 내 손안에 남아 있는 건 아니지만, 잠깐 잡혔다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것이지만, 그 힘으로 나는 앞으로 나아간다는 사실이 왠지 위로가 되었다.
--- p. 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