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유쾌한 상상적 유토피아를 흡인력 있게 그려 낸 블랙 코미디.
- 천희란
성적 판타지에서 비롯된 이 사업은 산업 사회의 거의 모든 빈틈을 건드린다.
- 박민정
훌륭하다. 냉혹하고 광기 어린 유머가 망치처럼 후려친다.
- 뉴요커
더럽게 웃기는 책. 진정으로 탁월한 것은 디윗의 세심한 언어 전개 능력이다. 그 솜씨가 소설 곳곳에서 너무 흔하게 발휘돼서 눈에 띄지도 않을 정도다.
- 제니퍼 잘라이 (뉴욕 타임스 북 리뷰)
로베르토 볼라뇨의 『2666』이 탐정 소설의 형식으로 선보였던 '정직한 수단, 형언 불가능한 결과'라는 주제를 디윗은 풍자 소설의 형식으로 가져온다. 이 소설의 천재성은 디테일에 있다.
- 밀리언스
창업 자기 계발서들과 CEO 자서전들을 풍자한 디윗의 책은 우리를 끊임없이 웃긴다. 비즈니스의 세계를 묘사하는 화법이 너무나 진정성 있어서 일종의 황홀감까지 보여 주지만, 기저에는 경멸이 깔려 있다. 그게 바로 이 소설의 핵심이다.
- 월 스트리트 저널
초현실주의적 상징인 동시에 비즈니스 세계에 대한 패러디로 작용하는 섬세한 이야기.
- 마이클 밀러 (뉴욕 옵서버)
『피뢰침』은 한 남자의 자기기만이 끊임없이 팽창해서 거대한 바로크적 건축물에 이르는 과정을 보여 준다.
- 일라나 테이텔바움 (허핑턴 포스트)
디윗의 사악하도록 영리한 풍자는 고전의 반열에 오를 만하다.
- 론다 리버만 (북포럼)
회사 생활에 대한 통렬한 풍자, 미국의 일터에서 이루어지는 성(性)정치에 대한 엉큼한 시선을 통해 불편한 진실을 노골적으로 파고든다.
- S. J. 컬버 (스타 트리뷴)
가장 현대적인 이슈들을 도마 위에 올리는 근사한 정통 풍자 소설.
- 에코살롱
『피뢰침』은 현대 미국 문학의 성취들 중 상당수를 무색케 하는 작품이다.
- 샘 바이어스 (타임스 리터러리 서플먼트(런던))
충격적이면서도 완벽하게 조율된 풍자. 디윗은 현대 사회의 많은 걱정거리와 불안거리 들을 섬뜩하리만큼 정확히 짚어 낼 줄 안다.
- 오픈 레터스 몬슬리
당신은 왜 웃고 있는가
실패한 한 세일즈맨의 성적 판타지로부터 출발한 피뢰침 사업의 성공 신화의 핵심은 남성의 성적 욕망을 잘 고안된 시스템을 통해 제어하는 것이다. 이는 바꿔 말하면 남성의 성적 욕망이 개인의 의지와 도덕성에 의해서는 제어될 수 없는 동물적 욕구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주인공 조는 끊임없이 여성과 남성이 지닌 성욕의 차이를 주지시킨다. 그리하여 자칫 이 소설은 오랫동안 학습되어 온 성별 간 성욕의 크기에 대한 편견을 강화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업이 무차별적인 소비자를 시장으로 삼는 대신에 기업과 정계를 중심으로 펼쳐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로써 저자는 통제되지 않는 성욕이라는 비이성적 변명이 실제로는 사회적, 신체적 권력의 기반 위에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다.
『피뢰침』은 불유쾌한 상상적 유토피아를 흡인력 있게 그려 낸 블랙 코미디다. 피뢰침 사업이 승승장구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뿐만 아니라, 조가 사업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게 장애인 복지에 기여하고, 고용에서의 인종 차별을 해결하고, 직원들의 불만을 수용하며 윤리적 경영자로 성장하는 모습은 그의 진지한 태도 덕분에 더욱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도발적인만큼 논쟁적이기도 하다. 허구의 바탕이 된 현실의 혹독함은 소설에서 재현되는 세계가 유발하는 웃음을 휘발시키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궤변에 가까워 보이는 조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춰 가는 과정은 때때로 소름 끼치게 다가온다. 그러나 어떤 관점에서 읽든 헬렌 디윗의 자기방어 없는 노골적 서사는 독특한 지적 도전을 불러일으킨다. 이 소설을 읽는 누구라도 자신의 웃음과 분노의 근원이 추궁당하는 일을 면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 천희란 (『영의 기원』의 소설가)
조 슈모가 당신을 의심할 때
세일즈맨은 거절에 익숙한 사람이다. 「안 사요」와 「살게요」 사이의 심연 대신에 「살게요」의 가능성을 먼저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유능한 세일즈맨이다. 세일즈맨의 윤리 감각을 지난하게 고민하던 조는 미증유의 사업 모델을 만들어 내는데, 그것이 바로 「피뢰침」이다. 영어에서 「피뢰침」에는 「비난을 도맡아 받아 주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있다. 그의 성적 판타지에서 비롯된 이 사업은 산업 사회의 거의 모든 빈틈을 건드린다. 요컨대 산업사회와 「민주주의 사회」에서 요구받는 PC함의 문제, 모든 노동자는 본의 아니게 자신이 종사하는 산업을 더욱 반노동적으로 발전시킬 수도 있다는 것, 어떤 산업의 발전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의 반동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는 것. 본질이 섹스 문제에서 출발하듯, 피뢰침을 둘러싼 컨텍스트의 핵심은 바로 그 동물적인 행위라는 것인데, 이는 우리에게 수치심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모든 행위 중 - 그것이 저열하든, 고급하든 - 다른 동물들과 똑같은 방법과 절차로 한다는 것에 일말의 예외도 없는 행위가 바로 섹스 아닌가. 인간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위에 대해서는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다른 동물과 같거나 비슷하다는 점 - 사실상 배설도 그러하다 - 이 인간을 수치스럽게 한다. 작가는 이 지점에서 질문을 던진다. 성폭력은 성욕이 아닌 권력 구조와 위력에서 거개 기인한다는 점에 대해서 인간은 왜 수치스러워하지 않는가? 성욕을 돌파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생물학적 의지가 아닌 성(性)산업과 성노동의 함수 관계에서 해결된다는 것, 이것이 『피뢰침』 특유의 블랙 코미디다. 신원 미상 또는 익명의 남성 조 슈모, 그리고 천 명 중 한 명의 여성, 이것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동물로서의 본능에 자신을 저울질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이다. 이 소설의 독자로서 나는 코카시안의 사회에서 아프리칸 아메리칸의 엉덩이는 신원 미상이 될 수 없다는 통렬한 현실, 그것이 PVC 스타킹의 서사로 나아가는 대목이 백미라 느꼈다. 나는 과연 인간이라 수치스러운가?
- 박민정 (『미스 플라이트』의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