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같은 사람을 세상은 ‘무명’이라 부른다. 그렇다. 나는 ‘신인’은 아니지만 ‘무명’이다. 10년 가까이 연기라는 끈을 이어온, 사실 연기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는 무명 배우 말이다. 끼도, 재능도, 인맥도, 비빌 언덕도 없어 매번 맨땅에 헤딩을 하며 머리가 동강 날 지경이지만, 포기할 생각은 없다. --- p.17
나를 사랑해 주는 이들의 칭찬과 응원보다 나를 비난하고 무시했던 말들이 오히려 더 오래 내 안에 남아 나를 갉아 먹었다. 하지만 그런 모난 말들을 던졌던 이들은 알고 있을까. 그렇게 쉽게 속단하고 평가했던 말로 인해 지금의 나는 더 단단해졌다는 것을. 그들이 주었던 상처들이 여기저기 다양한 자국으로 남은 것을 보여 주며 말해 주고 싶다. 난 괜찮다고. 상처 주셔서 감사하다고. 덕분에 멈추지 않았고 그로 인해 더 강해졌다고. --- p.18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만나면 1년에 네 작품 하게 해 줄게.” 지금이라면 이렇게 반문했을 거다. 정확히 몇 번, 몇 시간 동안, 당신과 무엇을 하면, 어떤 급의 작품의 어떤 역할을 하게 해 줄 수 있냐고. 하지만 그 당시 나는 어리바리했고, 소개해 주신 분을 생각한다는 명목으로 그러지 못했다. 나를 위해 힘겹게 만든 자리라고 생각했으므로. 아니 사실 그런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무서웠다. 뭐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냥 모르는 게 나을 것 같았다. --- p.32
‘버티다’의 전제는 바로 현재 어렵거나 힘든 상황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주는 어감이 긍정적이지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냥 내가 주는 느낌이 긍정적이지 않았거나. 그런데 내 머리가 크긴 컸나 보다. 이제 연기가 아닌 나만의 가치관이나 철학이 부정당하는 상황에서는 마냥 고개를 끄덕일 수가 없다. 그것이 잘 보여야 하는 감독님이나 관계자의 말이라도. 오늘 이들은 나를 떨어뜨려 버리겠지만, 나는 이 사람들보다 더 오래오래 버티고 버텨서 내 존재를 증명해 버리고 말 거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존버’한다, 고로 ‘존재’한다. --- p.169
쓰면서 다짐한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인정해 주는 사람을 상대하며 나 또한 그런 사람이 되자. 상대의 상처는 보듬어 주고 장점을 찾아 주는 사람이 되자. 내 주변을 그런 사람들로 채우자. 아침부터 좋지 않은 일들이 연달아 일어나 하루 종일 삐걱댔지만 이런 깨달음을 얻다니. 결국은 운 좋은 하루다. --- p.243
“다 잘될 거야, 힘내, 파이팅!” 가끔은 이런 말보다, “까짓거 안 되면 어때, 괜찮아!” 라는 말이 더 위로가 될 때가 있다. “난 또 누구 죽은 줄 알았네. 얼른 들어가서 밥 먹어!” 엄마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리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 이까짓 일이 뭐라고. 개운해진 눈가와 함께 씻겨 내려간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