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의 내 꿈은 이런 것이었다. 동사무소의 하급 공무원이나 하면서 아침 아홉시에 출근하고 오후 다섯시에 퇴근하여 집에 돌아와 발 씻고 침대에 드러누워 새벽 두시까지 책을 읽는 것... 내가 읽지 않은 책은 세상에 없는 책이다,....내가 한 권의 낯선 책을 읽는 행위는 곧 한 권의 새로운 책을 쓰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내가 읽고 있는 모든 책의 양부가 되고 의사저자가 된다.
--- p.머리말
'문화적인 것이기만 하면 무조건 좋은' 이 반성없는 문화주의자들로부터 가장 잔인한 대접을 받은 부류는 경제적. 시간적. 교육적 등등의 여러가지 제한된 사정으로 주류문화의 혜택을 받지못한 부류들이다. 이 부류들은 문화를 모른다는 이유로 잔뜩 비난을 받은 다음. 그들이 사랑하는 문화의 질이 낮다고 다시 비난받는다. 정신성을 선호하는 주류 문화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인정하지않는 문화, 예를 들면 수석수집이나 스포츠 같은 비주류 문화에 대해 경멸을 품으며 '뉴키즈온더블록'과 같은 새로운 세대의 문화와 새로운 문화가 갖고있는 대중성에 대해 고압적인 자세를 취한다. 그들의 눈으로 보자면 돌멩이를 주으러 다니거나 프로야구에 물든 하층민들은 계몽되어야할 문화의 타자들이다. 아, 문화주의자의 자화자찬은 3류 수필집을 만들어놓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른다.
--- p.178
막연하나마 어린시절부터 지극한 마음으로 꿈꾼 것이 바로 이것이다. 정선해서 골라 든 책을 안고 침대에 푹 파묻혀, 밑줄을 긋거나 느낌표 또는 물음표를 치면서 나 아닌 타자의 동일성에 간섭하고 침잠하는 일. 한권의 책 읽기가 끝나면 뒷장에 내 나름의 '저자 후기'를 주서하는 일. 나는 그런 '행복한 저자'가 되고 싶다.
--- 머리말 중에서
3.15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를 읽다. 오문과 악문으로 가득한 책. 여성적 글쓰기에 대한 형식적인 전략이 전혀 배려되지 않는 엉터리 페미니즘 소설. 노회한 김수현이 도리어 '언니'라고 불러야 할 만큼 닳고 닳은 상투. (p.19)
몇 해 전에 어떤 허풍선이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참칭하며 그 '슬픔'을 가장한 바 있으나 그것은 유치원생의 작문처럼 유치찬란한 것이었다. 그런 우스개가 모모한 문학상을 받고 나오는 난장 같은 한국 문단에, 살아남은 자들의 진정한 슬픔을 엿보게 하는, 유서로의 <지극히 작은 자 하나>가 선보이게 된 것은 너무 감격스럽다. (p. 97)
낙원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기에 애써 위대한 개인주의자가 되려 했고, 위대한 개인 노릇이 너무 고통스럽기에 근친상간적 연애놀음에 몰두했던 그들. 팽개치고 싶던 이 엉터리 소설은, 알고나면 너무 슬프다(그래서 납득하기 어려운 몇 개의 흠은 더 적지 않기로 한다). 20대 때 시를 쓰던 나의 주변에도 얼마나 많은 고아와 같은 존재들이 있었으며, 그 근친 속의 홍일점을 향해 덤블링하듯 몇 겹의 상간을 만들지 않았던가? (p. 133)
나는 늘 공지영과 신경숙에 대해 이렇게 말해왔다. 이번 소설의 여주인공 은림과 같이 공지영은 '난 참 귀여웠었던 것 같아'. 또는 폐병으로 죽어가는 은림이 명우의 애인인 여경을 향해 '처음 보는 순간 예전의 나를 보는 것만 같았어. [---] 세상에 대한 무모한 용맹성, 역경에 대한 도전력, 무조건 씩씩해지기로 결정하기. [---] 그래서 참 예뻐 보였어요.' 등등에서처럼, 항상 '나는 아름답다'고 말하는 작가이다. 반면 신경숙은 '그녀는 아름답다, 나도 그녀처럼 되고 싶다'고 말한다. 둘 다 나르시시즘이지만, 전자는 허영이자 단순한 자기도취이며 후자는 여성성에 대한 매료와 자매애의 표출. (p. 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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