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을 찾아 떠나는 일곱 살 소년, 그리고 소년을 지키기 위해 필요했던 이야기들
삶을 견디려면 이야기들을 지어내야 해?
프랑스 도서관 및 청소년 도서전이 주목하는 작가 안 로르 봉두의 장편소설 『기적의 시간』은 소비에트연방이 붕괴된 후 혼란스러웠던 캅카스 지역을 배경으로, 역경 속에서도 결코 절망하지 않는 일곱 살 소년 쿠마일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쿠마일은 친엄마처럼 자신을 보살피는 글로리아와 함께한 5년여에 걸친 피난길에서, 소중한 인연들과 만남과 이별을 거듭하며 사랑과 우정, 무엇보다 ‘삶의 우여곡절’을 헤쳐나가는 법을 배운다. 고된 피난길에는 언제나 주저앉고 싶은 순간이 찾아오지만 글로리아가 들려주는 찬란하도록 아름다운 이야기는 쿠마일을 일으켜세우는 힘이 된다. 그루지야에서 수마술라, 압하지야, 우크라이나, 몰도바, 루마니아, 헝가리를 거쳐 인권과 샤를 보들레르의 나라 프랑스를 향해 가는 동안 소년 쿠마일의 마음의 키는 한 뼘씩 성장해나간다.
삶을 견디기 위해 시작된 찬란한 이야기……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는 어린아이의 순수한 낙관과 뜨거운 모성애가 빛나는 소설
“내 이름은 블레즈 포르튄이고, 나는 프랑스 공화국 국민입니다. 이것은 거짓 없는 진실입니다.” 프랑스 국경 근처에서 발견되었을 당시, 혼자 남겨진 쿠마일은 이 말만 반복하고 있었다. 프랑스를 향해 긴 여정을 함께해온 글로리아는 어디로 간 것일까. 이제 쿠마일이 기억을 더듬어 자신의 삶을 지탱해준 희망 가득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내 옆에 꼭 붙어 있으면 절대 절망에 걸리지 않을 거야. 오케?”
“오케.” ─ 본문 13쪽.
난민들이 모여 사는 트빌리시의 어느 허름한 건물에 쿠마일과 그를 친아들처럼 보살피는 글로리아가 살고 있다. 언제 다시 피난길에 올라야 할지 모르는 위태롭고 가난한 삶이지만, 지친 쿠마일을 일으켜세우는 것은 글로리아가 들려주는 이야기다. 글로리아가 어렸을 적 살던 과수원의 이야기, 아버지인 바실리 할아버지를 비롯한 다섯 형제 이야기, 첫사랑 젬젬과의 에피소드, 그리고 열차 사고…… 글로리아가 젬젬과 산책을 하다가 우연히 열차 사고를 목격했고, 젊은 프랑스 여자가 안고 있던 블레즈 포르튄이라는 아이를 구출해냈다는 것, 그리고 그 아이가 바로 쿠마일이라는 것, 쿠마일의 엄마는 병원으로 옮겨진 후 연락이 두절되었지만 프랑스로 가면 분명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글로리아의 이야기는 쿠마일이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다. 같은 이야기를 듣고 또 들어도 질리지 않는 이유, 단 한 번 본 적도 없으면서 머릿속에 생생하게 그려지는 이유, 그것은 글로리아의 이야기가 어린 쿠마일의 삶을 지탱해주는 버팀목이기 때문이다.
평화로웠던 생활도 잠시, 글로리아와 쿠마일은 민병대를 피해 피난길에 오른다. 호신술을 가르쳐주었던 압델말리크와 학교 선생님을 자처하던 한스카 부인, 함께 뛰어놀던 단짝 친구들과의 추억도 뒤로한 채 매일 백만 킬로미터를 걷는 듯한 힘겨운 여정이 이어진다. 그들은 생계유지를 위해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맨손으로 폐전구 더미를 뒤지며 니켈선을 수거하는 수마술라라는 마을에 도착한다. 새로운 정착지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우정을 쌓고 ‘사랑’을 느끼기도 하지만 유리 먼지와 화학물질 중독으로 글로리아의 건강은 악화되고, 이제 쇠약해진 글로리아를 챙기는 것은 쿠마일이다. 글로리아의 가슴 속에는 컹컹 짖어대는 개가 사는 듯하다. 글로리아는 날마다 기침이 심해진다. 수마술라 근처 호숫가에 퍼진 중금속 오염 때문이었을까, 수마술라에 ‘괴물 아기’들이 태어났다는 흉흉한 소문이 떠돌고, 사람들은 모두 하나둘 다른 곳으로 떠나기 시작한다.
“절망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약은 말이지, 그건 바로 희망이야!” ─ 본문 95쪽.
프랑스를 향해 또다시 길을 나서는 쿠마일과 글로리아 앞에는 새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 긴 여정 속에서 쿠마일은 수많은 사람들과 새로운 인연을 만들며 많은 것을 새로 배우고 더 성장할 것이다. 고된 피난길에서 지친 쿠마일에게 용기를 심어주기 위해, “삶을 견디기 위해” 글로리아가 앞으로 들려주는 이야기는 또 무엇일까. 그리고 무엇보다, 프랑스에 도착한 쿠마일은 엄마를 다시 찾을 수 있을까.
프랑스 도서관 및 청소년 도서전이 주목한 작가
〈리르〉지 선정 청소년문학 부문 2009 최우수 도서
2009년 프랑스 출간 후 청소년 독자뿐만 아니라 성인 독자들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던 『기적의 시간』은 같은 해 프랑스 대표 문학전문 월간지 〈리르〉가 선정하는 청소년문학 부문 최우수 도서에 선정되었다. 『살인자의 눈물』을 통해 이미 프랑스 도서관 협회와 청소년 전문서점 협회에서 수여하는 소르시에르 상(J. K. 롤링의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 다니엘 페낙의 『소설처럼뮡도 이 상을 수상했다)을 수상한 바 있는 안 로르 봉두는 『기적의 시간』을 통해 다시 한 번 평단과 대중의 호평을 받게 된다. 『기적의 시간』은 또한 평론가가 선별한 후보작품에 청소년 독자가 직접 투표를 해서 수상작이 결정되는 탕탕 상과 세잠 상 등을 수상하는가 하면, 여러 도서관의 청소년문학 상을 수상함으로써 작품성은 물론 대상 독자의 사랑까지 거머쥔 행복한 작품이 된다. 캅카스 지역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 한국어판 『기적의 시간』에는 캅카스 지역의 지도와 프랑스에 도착하기까지의 쿠마일의 여정을 표시한 지도를 수록했다.
블레즈 상드라르에 대한 오마주 : 쿠마일의 ‘진짜’ 이름 블레즈는 어떻게 탄생되었나
「노브고도르의 전설」 「에펠탑」 『절단된 손』 등 20세기 초반 기념비적인 작품을 남긴 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블레즈 상드라르, 작가는 어렸을 적 부모님이 읽어준 블레즈 상드라르의 시에 깊은 인상을 받아 블레즈 상드라르에 대한 글을 쓰고 싶었다고 한다. 방황하던 청소년기, 여행을 일삼고 러시아에서 시계공으로 일을 하다 프랑스에서 양봉가가 된 일화, 뉴욕으로 떠나기 전까지 런던에서 곡예사가 되었던 이야기,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가 오른쪽 팔을 잃어버린 이야기까지 상드라르의 삶 자체가 소설적이었기 때문이다. 『기적의 시간』을 구상하며 작가 안 로르 봉두는 상드라르에 대한 글쓰기는 접었지만, 여전히 소설 속에는 블레즈 상드라르에 관한 수많은 흔적들이 남아 있다고 스스로 밝혔다. 국경을 넘으며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는 쿠마일의 유년기 또한 상드라르의 실제 삶과 비슷하고, 글로리아의 다섯 형제는 시 「파나마 또는 일곱 삼촌들의 모험」에 등장하는 일곱 삼촌들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드라르의 시「시베리아 철도(시베리아 철도와 어린 소녀 잔 드 프랑스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탈선사고를 일으킨 급행열차로 변했고, 쿠마일의 프랑스 이름 블레즈 역시 이 시에 등장하는 ‘블레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기적의 시간』 마지막 부분에서 쿠마일이 상드라르의 시의 한 대목 “말해줘요, 블레즈, 몽마르트르까지는 아직 멀었어요?”를 읽는 장면은 지난했던 여정을 한마디로 압축하는 듯, 코끝이 시큰거리게 만든다.
가상의 공간 수마술라를 통한 아동 인권에 대한 조명
수마술라는 작가가 프랑스 주간지 〈쿠리에르 앵테르나시오날〉에 실린 키르기지야(키르기스스탄)의 매루우수우Mailouou-souou에 대한 기사를 보고 창조해낸 가상의 도시다. 소비에트연방 시절 전구 공장과 우라늄 광산이 있던 곳으로, 지금은 유리 야적장만이 남아 있다. 그러나 아직도 그곳에서는 여자들과 아이들이 전구 베이스에 붙은 니켈선을 모으기 위해 맨손으로 일을 한다. 보잘것없는 임금을 받으며 방사능에 그대로 노출되는 것은 차치하고서도, 유리 가루를 들이마시기도 하는데, 이런 내용은 수마술라의 폐전구 더미에서 일하는 쿠마일과 글로리아를 통해 자세히 묘사된다.
“국경을 만든 게 하느님인지 알라신인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주 몹쓸 생각인 것 같았다.” ─ 본문 130쪽.
이 소설을 통해 작가는 프랑스 자국에 대한 이미지를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보고 싶었다고 한다. 쿠마일이 프랑스 국경 근처에 도착한 이후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인권과 자유의 나라’라는 국가 이미지와는 달리 갈수록 높은 담장을 쌓아가는 프랑스 이민법에 대한 예리한 시선을 드러낸다. 특히 매일 지도책을 펴놓고 자유와 평화 그리고 엄마가 있는 프랑스에 대해 막연한 환상을 품었던 쿠마일의 천진함이, 국경을 넘었지만 기대와 전혀 다른 차가운 현실 앞에서 어린아이가 느꼈을 감정과 대비된다. 작품의 성공 후 작가가 만든 작품 홈페이지(http://letempsdesmiracles.bondoux.net/)에는 아동 인권에 관한 국제 협약문을 비롯해 ‘미성년 외국인 미아’에 관한 프랑스 헌법이 수록되어 있어 이야기에 연결된 현실적 문제를 고찰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