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가 대국大國과 정면으로 맞서 이길 수 있는가? 백제 사람들 처지도 딱하게 되었다. 백제를 멸망시킨 원수들인 저 당과 신라가 저희끼리 맞붙어 싸움을 벌이면, 그러잖아도 당이 세운 도독부를 따르네 마네 하며 쪼개진 백성들은 어느 편에 서야 목숨을 부지할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이 판에 고구려군까지 나타나 성을 점령했으니, 정말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가늠하기 힘들다. 고구려 사람들 눈으로 보면, 도독부의 벼슬아치인 형은 당나라 사람과 한 족속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핏줄과 사는 땅을 가지고 네 편과 내 편, 네 나라 내 나라를 가르던 시절은 지나갔다.
---「첫째 날―새벽 2 홀뫼」중에서
지금 당군의 주력부대는 사비성과 웅진성에 웅크리고 앉아 여간해서 나오지 않는다. 그러니 이 전쟁은 알고 보면 삼한에서 태어나 서로 통하는 말을 쓰며 비슷하게 사는 족속끼리의 싸움질인 셈이다. 나라 잃은 백성, 주인 노릇 못 하는 족속의 꼴이 이토록 어지럽고 어리석다. 백제 사람은 말할 것 없고, 삼한 사람 모두한테 정말 수치스럽기 짝이 없는 게 이 나당전쟁이다. 삼한 땅에 당을 끌어들인 신라가 참으로 원망스럽다. 이 땅에서 10년 넘게 계속되는 이 한심한 싸움은 도대체 언제나 끝날까?
---「첫째 날―아침 큰내 골짜기」중에서
짐승이라니, 아아 짐승만도 못하다! 물참은 비로소 전쟁이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패배가 또 얼마나 처참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뼈저리게 느꼈다. 슬픔이 비수처럼 가슴을 찔렀다. 사람의 목숨이 이토록 약하고 값어치 없는가? 사람이 사람을 이래도 되는가? 그저 숨이 막힐 따름이었다. 아무리 전쟁이라도 칼과 창 따위로 이토록 많은 장정을 살육했다는 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물참은 그 광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첫째 날―어머니」중에서
하지만 임존성 전투 얼마 후 의자왕과 왕족, 신하와 백성, 도합 1만 2천여 명이 당에 포로로 끌려갔다. 노예 신세로 당의 군선에 실려 타국으로 떠나는 이들을 보러 백성들이 백강 가의 산마루마다 지천으로 깔렸다. 〔……〕포로 가운데는 물참의 아버지와 형, 큰집 식구들도 들어 있었다. 물참은 그들이 실린 배가 멀어질 때까지 백강을 따라 말을 달리며 울었다. 강폭이 넓어지고 바다가 가까워지자 배들은 점점 시야에서 사라졌다. 사람이 이렇게 다른 족속의 노예가 되어 말과 풍속이 다른 만리타국으로 끌려가다니…… 물참은 슬픔을 가누지 못한 채 오래도록 강가에 서 있었다. 전쟁에 패한 족속에 관해 글을 읽기는 했으나, 막상 당하고 보니 끌려간 이들처럼 자기도 그제까지의 삶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
---「첫째 날―어머니」중에서
그런 말을 들을 적마다 물참도 슬픔에 빠졌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살기가 죽기보다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은 순간이지만, 삶은 계속되었다. 멀쩡하게 두 눈을 뜬 채 나라와 가족을 빼앗긴 괴로움을 되씹으며, 전쟁과 굶주림에 시달리는 백성들의 애달픈 모습을 날마다 겪어야 했다.
---「첫째 날―어머니」중에서
백제 사람이 고구려 사람과 손잡기를 바란 까닭은, 둘의 적이 당과 신라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구려 부흥군이 일어나기는 했으나 신라와 먼저 손을 잡고 말았다. 당을 물리치기 위해 적과 연합한 것이다. 나당 간의 전쟁은 지금 신라 혼자서만 싸우지도 않는 데다 백강 남쪽에 아울러 요동에서까지 벌어지고 있다. 도독부한테 도독성을 빼앗은 고구려 부흥군도 내일 신라군과 만난다고 한다. 이번 싸움은 어쩐지 나당 간에 땅을 뺏는 국경 분쟁에 그치지 않으며 두 나라만의 이해관계도 넘어서는, 이제껏 일어난 싸움들과는 다른 전쟁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든다. 그렇다면 백제는, 당나라의 도독부 허울을 강제로 뒤집어쓰고 있는 백제 사람은, 지금 어찌해야 마땅한가?
---「둘째 날―낮전 도독성」중에서
스승은 어제 간곡하게 만물은 변한다고 했다. 저 지붕이 내려앉은 집들처럼, 뙤약볕 속에서 썩어 문드러지던 주검처럼. 아니 그 몸뚱이가 살았을 적의 팔팔한 움직임들처럼, 온갖 것은 변하여 다른 게 되고 또 사라진다. 변치 않는 건, 변하는 일 오직 그뿐이다. 그러니 추위가 물러가면 따듯한 봄이 오듯, 사라진 자리에는 다시 새것들이 들어찰 것이다. 때를 잘 탄다면 양지바른 자리에 좋은 집 지어 마을을 이루고, 타고난 수명대로 대를 이어 살 수도 있을 터이다. 끝나는 게 아니라, 다만 그렇게 변할 것이다. 그런 때는 언제, 어떻게 오는 것일까.
---「둘째 날―낮후 시루성」중에서
“우리 처지가 정말 묘하구나! 이번 싸움에 이긴다면 신라군에 섞여 사비성으로 들어갈 텐데, 그러면 우리는 나라가 망할 때하고 완전히 뒤바뀐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참으로 그때 옛날을 생각하면, 백제 사람 그 누군들 마음이 아프지 않겠느냐?”
---「둘째 날―낮후 시루성」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