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는 이야기를 만드는 작업의 시작이고, 또 가장 중요한 요소다. 개인적으로 만약 작가가 이것을 갖고 있지 않다면 굳이 자신이 창작한 이야기를 세상에 내놓을 이유가 있을까 생각한다. 주제는 이야기를 만드는 목적이다. 우리는 국어 시험에서 ‘이 글의 주제를 찾으시오’ 같은 문제를 많이 보아 왔다. 그래서 이야기를 주제를 찾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혹은 ‘뭐, 사랑 우정 그런 게 주제지’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창작자 역시 “나는 이번에 사랑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한번 해 보려고 해”라고 간단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랑’은 ‘주제어’이다. 주제 단어이다. 주제 단어는 주제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주제는 작가가 이야기를 통해서 증명하고 싶은 가치이다. 주제어가 가진 추상적 가치에 방향성이 제시되어야 주제로서 기능하게 된다. 세상 누군가에게, 그것도 어디서 살다 온지 모르는 불특정 다수, 내가 얼굴을 볼 수 없고 직접 만날 수 없는 누군가에게 나의 이야기를 할 때 ‘내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는가’ 하는 이야기의 목적에 해당하는 것이 ‘주제’이다. 주제는 이야기의 척추라고 할 수 있다. 척추는 몸 안에서 여러 가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내 눈에 보이거나 다른 사람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 경추, 척추, 요추가 비틀려 있으면 굉장히 힘든 상황을 겪는다.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척추인 주제가 정확하게 세워져 있지 않으면 인물 관계, 사건, 플롯을 잡기가 어려워진다.
이야기를 설계하는 첫 단계에서 나는 이 이야기를 왜 하고 싶은 것인가에 관해 분명하게 세워 두어야 한다. 가능하다면 문장으로 만들도록 하자. 주제는 겉으로 드러나는 메시지와는 다르다. 메시지는 한 작품 안에 여러 개가 담길 수도 있고, 주인공의 대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전달되기도 한다. 영화 포스터의 홍보 문구로 쓰일 수도 있다. (주제가 메시지와 동일할 수도 있으나, 더 깊이 들어가면 차이를 보이는 경우가 많다.) 증명하고 싶은 가치, ‘내가 동시대의 많은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 가치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야’라고 말할 수 있는, 방향성을 분명하게 가진 주제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보자.
“나는 정의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라고 감독이 이야기한다. 작가가 “나도 요즘 시대에 정의에 관한 이야기는 우리가 꼭 한번 다뤄 볼 만하다고 생각해. 정의에 관한 영화를 한번 얘기해 볼까”라고 응답했다고 가정하자. 감독은 정의에 대해 이런 생각을 갖고 있다. ‘정의는 시대에 따라 계속 바뀌어 왔다. 많은 사람이 동의하는 방향으로 정의에 대한 담론이 바뀌어 왔기 때문에, 다수가 옳다는 쪽으로 사회는 발전될 수밖에 없고 정의는 그렇게 움직여 가야 한다. 시대에 따라서, 문화에 따라서 바뀌어 가야 한다.’ 작가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렇게 많은 사람에 의해 움직인다면, 그것은 정의라고 할 수 없다. 다수가 언제나 옳은 선택을 하는 것은 아니다. 히틀러도 투표에 의해서 뽑혔다. 그러므로 정의는 절대적 가치에 근거한다. 즉 시대와 문화와 대중의 흐름과 상관없이 인간에게 내재된 정의가 있다. 쉽게 타협되지 않고 다수의 목소리에 굴복하지 않는 내재된 정의를 따라갈 때, 비로소 사회 정의가 구현된다.’
작가와 감독이 ‘정의’라는 키워드에 의기투합해 만났어도, 둘이 함께 하나의 영화를 완성하기란 불가능하다. 사랑 가운데 에로스를 특정하여 생각해 보자. 아가페나 필로스와는 다른 사랑이다. 육체적인 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에로스에 대해 감독은 이렇게 생각한다. ‘에로스는 번식기가 아닌 때에도 성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인간만이 추구할 수 있는 사랑이다. 평생에 걸쳐서 에로스의 절대적인 상대를 만나는 것이 운명이며, 인간이 추구해야 할 가장 높은 가치 중의 하나다.’ 반면 ‘에로스라고 하는 것은 호르몬의 미친 작용으로 약 3개월이 지나고 나면 눈에 콩깍지가 떨어지면서 내가 도대체 이 짓을 왜 하고 있나, 이 번거롭고 귀찮은 관계를 왜 지속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쉽사리 관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굉장히 골치 아픈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감정 중의 하나야’라고 생각하는 작가가 있다고 한다면, 이 감독과 작가 역시 이야기를 함께 만들어 나가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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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구체화에 대한 방법을 알아보자. 주제를 잘 전달할 수 있는 인물을 창작할 때 가치관을 포함한 내면적 부분이 설계됐다면 능력, 신체적 특징과 같은 외형적 부분도 설계돼야 한다. 막막할 수도 있으나 인물의 히스토리로 들어가 상상하는 방법이 유용하다.〈실미도〉에서 소대를 이끌었던 대장(안성기 선생님이 맡으셨던 ‘최재현’)을 예로 들어 보자.이 인물에 대해서는 이 사람을 대장으로 임명한 사람에 관한 상상으로부터 시작됐다. ‘내가 중정 김형욱 부장이라면, 사건 사고가 많을 인물들을 통솔해야 하는 특수 부대의 대장을 맡길 인물로 어떤 사람을 선택할 것인가?’ 가장 먼저는 부대 창설의 목적에 맞아야 하니 북한에 여러 번 침투해 본 사람이어야 했다. 북한에 관한 경험이 있어야 어떤 사람들을 뽑아 어떻게 훈련시켜야 할지 알 수 있을 테니까. 그러면 어떤 체격 조건을 갖고 있을까? 수영을 잘할 수 있는은 다부진 몸일 것 같았다. ‘그런 사람이 과연 음성이 클까? 아니야. 어떤 순간에도 자기 자신의 감정을 함부로 드러내거나 표현하지 않는 사람일 것 같아.’ 이렇게 요소별로 가정하고 검증하며 인물을 구체화했다. 영화가 세상에 나온 후, 실존 인물들의 증언을 추가로 들을 수 있었는데, 실제로 그분들의 대장이었던 분이 그런 성격을 갖고 계셨다고 했다.
인물에게 부여한 성장 환경,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의 시간에 어떤 삶을 살아왔을 것인지 유추해 나가다 보면 여러 특질이 구체화된다. 특히 말투가 상상되면 대사를 쓸 때 큰 도움이 된다. 인물은 집필에 들어가기 전에 구체화되어야 한다. 작가의 머릿속에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어야 캐릭터가 사람답게 반응하고, 사람답게 선택한다. 그러지 않으면 작가의 인위적 조작에 의 움직이는 인물이 만들어진다. 어떤 속도로 걷고,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옷을 입고, 어떤 음악을 듣는지 등 가족과 친구에 대해 상상할 수 있듯 이야기 속 인물을 알 수 있어야 한다. 캐스팅하듯 역할에 어울릴 것 같은 배우를 설정하고 상상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실미도〉에서 코믹 릴리프 역할이 있었는데, 감독께서 배우 임원희 씨를 캐스팅한 상태여서 캐릭터 이름을 ‘원희’로 정하고 집필했다. 어떻게 연기하는지 아는 배우들을 나의 캐릭터 이름으로 잡고 써 나가면 배우들의 움직임이 머릿속에 연상되면서 액션과 대사가 조금씩 구체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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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