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세와 가이아, 가이아와 인류세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인류세라는 시대 인식은 가이아의 관점에서 인간을 다시 생각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마치 해월이 “하늘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모든 게 서로가 서로를 길러주는 기화(氣化)의 작용이다”라고 설파했듯이, 가이아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야말로 기화의 작용에 가장 큰 역할을 하는 존재이다. 다만 그 기화가 대기의 변화, 즉 ‘기후변화’라는 점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29~30쪽, 제1장 인간의 행위」중에서
인류세란 기학적으로 말하면 인간의 활동운화로 지구의 활동운화가 바뀌기 시작한 시대를 말한다. 그리고 그 변화된 지구의 활동운화가 다시 인간의 활동운화를 제약하는 시대이다. 그렇다면 인간과 자연의 활동운화에 주목한 최한기의 기학이야말로 인류세 시대에 다시 조명되어야 할 한국 철학이 아닐까?
---「53쪽, 제2장 기학의 귀환」중에서
학살, 비애, 울부짖음…. 이 단어들의 공통점은 측은지심이다. 이들은 모두 만물에까지 연민의 정서를 느낀다. 성리학자들이 외쳤던 만물일체의 인을 오늘날의 생태사상가와 환경운동가들이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인은 ‘생태적 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생태적 비애는 ‘지구적/행성적 차원에서 느끼는 비애(planetary grief)’라고 볼 수 있다. 나와는 무관한 듯 보이는,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대상에 대해서까지 아픔을 느끼기 때문이다.
---「68~69쪽, 제3장 유학의 경장」중에서
플럼우드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최상위 포식자’에서 ‘타자의 음식’으로 바꿀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그것을 ‘생태적 관점’이라고 말한다. 아울러 그런 관점에서 인간을 바라볼 때 다른 존재와 연대가 가능해진다고 말한다. 이를 철학적으로 말하면 생태 위기에 대한 ‘인식론적 처방’이라고 할 수 있다.
---「81쪽, 제4장 인간의 위상」중에서
베넷이 인간과 비인간 존재에 공통으로 들어 있다고 본 요소는 ‘힘(power)’이다. 즉 사물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중략) 지금과 같이 과학기술이 발달한 사회에서 사물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우리는 인공 사물에 기대지 않고서는 단 하루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중략) 힘을 가졌다는 것은 그것이 두려워할 만한 존재라는 뜻이다. 고대인이 태양을 경배한 것은 그것이 인간 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제1의 조건’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마찬가지로 오늘날 사물은 인간에게 외경할 만한 존재로 다가오고 있다. 그래서 공자의 ‘후생가외(後生可畏)’라는 표현을 빌리면 ‘사물가외(事物可畏)’라고 할 수 있다. 최시형의 경물(敬物)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재조명될 수 있다. 즉 사물은 힘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외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102~103쪽, 제5장 사물의 위력」중에서
토머스 베리가 인간의 생존 및 지구와의 화해를 위해서 일종의 ‘생명민주주의’를 말했다면, 그리고 라투르와 베넷이 비인간의 ‘행위성’과 ‘힘’ 개념에 주목하여 ‘사물민주주의’를 제안했다면, 김대중은 비인간 존재의 ‘생존권’에 주목하여 ‘지구민주주의’를 제창했다. 그 시기는 베리(1988)와 라투르(1999)의 중간에 위치한다(1993년 전후).
---「129쪽, 제6장 정치의 확장」중에서
글로브에는 인간의 강건함이 묻어난다. ‘글로벌라이제이션’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이 지구를 인간화할 수 있다는 신념이 깔려 있다. 이와 같은 확신은 근대에 대두된 진보(progress)라는 이념과 궤를 같이한다. 반면에 플래닛에는 인간의 취약함이 드러난다. 인간은 행성을 인간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행성은 인간화되지 않는다. 문제는 근대 이후로 진행된 산업화와 글로벌라이제이션으로 인해 인류가 행성이라는 존재를 망각했다는 점이다. 차크라바르티가 행성을 강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행성은 인간의 영역을 벗어난 곳에서 홀로(獨) 존재한다(立). 노자의 개념을 빌리면 ‘자연’이고 ‘독립’이다. 그래서 인간이 개변할 수가 없다. 거주 가능한 임계영역은 과학기술로 개조할 수 있지만, 행성적 차원은 인간이 대면하거나 돌볼 수 없다. 그래서 그것은 무위의 영역이고 불인(不仁)한 존재이다.
---「147쪽, 제7장 행성의 대두」중에서
차크라바르티는 이와 같은 과학적 성과에서 통찰을 얻어 ‘지속가능성(sustainability)’과 ‘거주가능성(habitability)’을 대비시킨다. (중략) 즉 거주가능성은 행성의 영역이고, 지속가능성은 글로브의 영역이라는 것이다. 이 점은 ‘지속가능’ 뒤에 ‘발전(develoment)’이라는 말이 따라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중략) ‘지속가능성’ 개념은 (중략) 인간의 개발에 ‘지구가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는가’에 관한 물음이다. 주어진 화석연료를 인류가 언제까지 사용할 수 있는가를 둘러싼 논의도 이에 해당한다. 이처럼 지속가능성은 인간의 지속가능성을 문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중심적 개념이다. (중략) 반면에 지속가능성과 대비되는 ‘거주가능성’은 인간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 이외 생명의 생존 조건을 묻기 때문이다.
---「165~167쪽, 제8장 근대의 종언」중에서
자유는 서구적인 것, 근대적인 것을 대변한다. 반면에 자연은 그런 자유를 억압하는 전통적인 것, 동양적인 것으로 간주된다. 그래서 자연은 발전이 없고 정체되어 있으며, 자유는 진보적이고 발전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중략) 사실 동아시아에서 자연이라는 말은 ‘스스로 그러하다’는 술어로 쓰였고, 그 의미도 억압보다는 오히려 해방이나 자율에 가까웠다. 왜냐하면 어떤 사태의 원인은 처음부터 만물에 내재해 있고, 따라서 그 처음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그것다움의 표출이라는 것이 ‘자연’이 의미하는 바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자연=nature’에 해당하는 말은 천지(天地)였다. ‘천지’는 만물을 위와 아래에서 덮어주고 실어주는 집과 같은 존재로 여겼다. 따라서 천지도 억압적이기보다 은혜로운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중략) 지난 1세기 넘게 서구화가 진행되는 동안, 천지는 자연으로 대체되었다. 그렇다면 동아시아에도 ‘자연(nature)=전근대’와 같은 생각이 수용되었을 것이다.
---「192~193쪽, 제10장 자연의 변화」중에서
‘인류세’ 개념이 등장한 2000년에 한국에서는 ‘생명평화’라는 말이 탄생했다. 따라서 나이로 치면 생명평화와 인류세는 동갑이 된다. 생명평화 개념이 탄생한 해가 인류세 개념이 주창된 해와 일치한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마치 인류세 시대의 윤리를 ‘생명평화’로 제안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다. 실제로 생명평화에서 ‘생명’은 인간의 생명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모든 생명을 아우른다. 그래서 생명평화는 ‘모든 생명의 평화’라는 뜻이다. 종래에는 인간에게만 적용되었던 평화 개념을 인간 이외의 존재에까지 확장한 것이다. 마치 김대중이 1994년에 민주주의의 대상을 인간 이외의 존재에까지 확장하여 ‘지구민주주의’를 주창한 것과 유사하다.
---「210쪽, 제11장 생명의 평화」중에서
여기에서는 가이아, 한울, 생명이 동일한 층위에서 논의된다. 한울이건 가이아건 모두 지구를 하나의 생명체로 본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울은 동학의 가이아이고, 가이아는 서양의 한울인 셈이다. 이처럼 〈한살림선언〉은 한울을 지구학적으로도 해석한다. 결국 〈한살림선언〉에는 생명학과 지구학이라는 두 가지 차원이 공존하고 있다. 그래서 〈한살림선언〉은 동학을 생명학으로 현대화하고, 이를 다시 서구의 지구학과 대화하는 일종의 ‘지구지역학’ 텍스트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239~240쪽, 제12장 철학의 회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