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에게 결여된 것은 아마도 유전과 변화에 대한 헤라클레이토스적 감각일 것이다. 그는 세계라는 활동사진을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는 그림으로 만들려고 애를 썼다. 그는 다른 소심한 철학자들처럼 오직 질서만을 사랑했고, 아테네 민주정치의 소란에 놀라서 개인의 가치를 극단적으로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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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누엘 칸트의 사상이 19세기 사상을 지배한 것처럼 한 사상 체계가 한 시대를 지배한 일은 일찍이 없었다. 거의 60년 동안 조용히 연구에 몰두한 다음 쾨니히스베르크의 무시무시한 스코틀랜드인은 1781년 유명한 『순수이성비판』으로 온 세계를 '독단의 잠'으로부터 깨웠고, 그 해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비판철학'은 유럽의 사변을 지배해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뜸 칸트주의자가 되기로 하자. 그러나 분명히 대뜸 칸트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어렵다. 철학에 있어서도 정치학처럼 두 점 사이의 최장 거리는 직선이기 때문이다. 칸트에 대해 알려면 결국 우리는 칸트의 저서를 읽어야 한다. 우리 철학자는 여호와와 비슷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그는 실례나 구체적 사실을 가볍게 보고, 실례나 구체적 사실은 그의 저서를 너무 방대하게 만들 것이라고 말했다(『순수이성비판』서설)(이렇게 압축했어도 이 책은 약 8백 페이지나 된다). 전문적 철학자만이 그의 저서를 읽을 것이다. 전문적 철학자에게는 예는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원고를 사변에 능한 그의 친구 헤르츠에게 보였을 때, 헤르츠는 반쯤 읽고 계속해 읽으면 미칠 것 같다고 말하며 되돌려주었다. 이런 철학자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우선 상당한 거리를 두고 안전하게 출발해서 조심스럽게 우회해 접근하기로 하자. 이 책의 주제와 관련되는 주변의 여러 가지 문제들부터 고찰하고 그 다음에 모든 철학 중에서 가장 난해한 철학의 비밀과 보고가 있는 미묘한 중심으로 통하는 길을 찾아보기로 하자.
---p. 283-284
고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흉상으로 판단하건데, 소크라테스는 아무리 철학자라고는 하지만 너무나 못생겼다. 대머리에 크고 둥근 얼굴, 깊숙하고 쏘아보는 듯한 눈, 많은 연회에 참석했다는 역력한 증거인 빨간 납작코-가장 유명한 철학자의 얼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짐꾼의 얼굴이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자세히 보면 거친 돌을 통해 못생긴 사상가를 아테네의 가장 우수한 청년들의 사랑을 받는 교사로 만든 인간적인 자애와 소박함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소크라테스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귀족적인 플라톤이나 말이 없고 학자적인 아리스토텔레스보다 소크라테스를 더욱 친숙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2천3백 년의 세월을 가로질러서, 언제나 구겨진 튜니카을 입고 한가하게 광장을 걸어가며 소란스러운 정치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우연히 마주친 사람과 긴 이야기를 나누며, 청년들과 학자들을 모이게 한 다음 그들을 사원 주랑의 그늘진 구석으로 끌고 가서 그들의 용어를 정의하라고 요구하는 그의 모습을 눈앞에 그릴 수 있다.
그의 주위에 몰려 들어 그가 유럽 철학을 창조하는 것은 도와준 청년들-그들은 잡다한 군중이었다. 그 중에는 아테네의 민주주의에 대한 그의 풍자적인 분석을 즐기던 플라톤과 알키비아데스 같은 부잣집 청년도 있었고, 가난을 개의치 않는 스승의 태도에 반해 이를 종교로 삼았던 안티스테네스 같은 사회주의자들도 있었다.
또한 그 중에는 아리스티포스처럼 주인도 노예도 없다고 하며 모든 사람이 소크라테스처럼 태평하고 자유로울 수 있는 세계를 갈망하는 한두 명의 무정부주의자도 있었다. 오늘날 인간 사회를 뒤흔들고 청년들의 무한한 토론의 재료가 되고 있는 온갖 문제들이 스승과 마찬가지로 토론 없는 삶은 인간답지 못하다고 느끼고 있던 사상가와 변론가 소집단을 선동했던 것이다. 사회 사상의 모든 학파는 여기에서 그 대표자를 찾을 수 있고 아마도 그 기원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 pp.2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