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통일이 당나라의 외세를 빌려 이룬것이라면 고려의 통일은 민족 대화합적 차원의 자주적 민족통일이었다. 이 민족통일의 주도 세력은 왕건을 중심으로 한 고려 건국 세력이었다. 하지만 통일전쟁이 지속되면서 926년에 거란에게 멸망당한 발해 유민이 합세했고, 또한 신라 왕실과 백성들도 이에 호응하여 연합군에 가담했으며, 후백제를 세운 견훤까지 끌어 안음으로써 명실공히 민족 대화합을 이룬 가운데 통일을 성사시켰다. 고려는 이처럼 한반도에서 우리민족이 자주적으로 일궈낸 최초의 통일국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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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돈의 개혁당은 이렇게 집권 6년만에 몰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가 설치한 전민변정도감을 통하여 많은 양민들이 노비에서 환원되었고, 권세가들이 부당하게 빼앗은 토지의 상당 부분이 원주인에게 되돌려지거나 국가에 환속됨으로써 고려는 경제적 안정을 꾀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또한 성균관을 중영하여 유학자들이 대거 배출됨으로써 조선 개국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신진사대부층의 성장을 촉진케 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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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왕건은 어떤 방법으로든 이들과 공조해야했고, 그 결과물이 호족연합체였다. 왕건의 지지기반은 개성을 중심으로 한 경기도와 황주 중심의 황해도, 그리고 나주와 충주 지역이었다. 개성은 자신의 출신지였고, 황주와 나주, 충주는 정벌 과정에서 형성한 주요 거점이었다. 그리고 이 네 지역은 그의 처가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제1비 신혜왕후가 경기도 정주의 호족 유천궁의 딸이었고, 제2비 장화왕후가 전라도 나주의 오다련의 딸이었으며, 제3비 신명순성왕후는 충주의 유력가 유긍달의 딸이었다. 또한 제4비 신정왕후는 황주를 대표하는 황보씨 가문 제공의 딸이었으며, 제6비 정덕왕후는 경기도 정주 호족 유덕영의 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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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본적으로 보면 균여의 성상융회사상은 화엄종과 법상종을 하나의 사상으로 이끌어내자는 논리였다. 당시 화엄종과 법상종을 신봉하고 있던 사람들은 대개 중소호족이나 평민들이었는데, 대호족을 경계하던 광종은 중소호족의 힘을 키울 요량으로 이 두 종파의 융회를 시도했던 것이다. 이 결과 광종 4년에는 화엄종 승려 겸신이 국사로 봉해지기도 한다. 광종의 이 같은 화엄종, 법상종 융회정책은 곧 중소호족들의 지지를 얻게 되고, 반대로 대부호들의 불교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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