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대통령의 취임식 때는 이야기를 헤피엔드로 끝낼 수 도 있겠다고 여겼다. 그러나 2003년 봄 퇴고를 하는 동안 소설은 점점 어두워만 갔다.
눈 밝은 독자라면 알겠지만, 나는 1998년 『불멸』부터 현재까지 발표한 역사 소설에서 '지금, 여기'에 대한 정치적 견해를 밝혀왔다. 소설이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다루는 예술이라면 여기에 정치가 빠질 수 없다. 그러나 『방각본 살인 사건』처럼 여러모로 마음이 복잡하고 감정의 기복이 심한 적은 없었다. 1778년 겨울과 1779년 봄, 백탑파의 규장각 진출을 놓고 벌어진 보수와 진보의 암투는 참여정부 수립 후 몇 달 동안 벌어진 정쟁을 떠올리게 한다. 특히 정치 일선에 나선 386세대의 부침을 접하며 무엇인가 타산지석이 될 말한 문장을 쓰고 싶었다. 연쇄 살인범이 잡힌 순간 소설을 끝내지 않고 그 정치적 배후를 추적한 것도 이 안타까움 때문이다.
나는 백탑 아래 모여 북학을 갈망한 서생들의 꿈과 야망을 충실히 재현하려고 노력했다. 실학은 무조건 옳다는 관점에서 한발 물러나 백탑파의 규장각 진출이 지닌 객관적 의미와 정치적 한계 등도 그려 보고 싶었다. 아울러 그 당시 조정을 주도하던 홍국영과 채제공 등을 통해 백탑파에게 부족했던 정치적 감각과 연륜도 음미하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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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방각본 살인 사건』이 정치 소설인 것은 아니다. 두 가지 '살아 숨쉬는 교양'을 최초로 독자들에게 선물한다. 먼저 필사 소설에서 방각 소설로 넘어오는 과정을 『방각본 살인 사건』에 담고자 했다. 나는 이미 2002년 겨울 『서러워라, 잊혀진다는 것은』에서 필사 소설의 유통 과정과 작품세계를 서포 김만중을 중심으로 복원한 바 있다. '소설로 쓰는 소설사'는 앞으로 조선 후기 대하 소설과 구활자 소설에 관한 탐색으로 이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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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백탑파의 실체를 담으려고 했다. 지금까지 연암이나 다산 등 실학자 개개인에 대한 소설은 있었지만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모였고 무슨 책을 보며 삶을 노래했는가를 하나의 정치적 문화적 세력으로 형상화한 적은 없다. 박지원, 횽대용,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백동수, 김홍도 등을 한 자라에 모은 것도 당시 백탑파의 넓고 깊은 교유를 드러내기 위함이다.
나는 이 작품을 추리 소설로 썼다. 독자들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서고 싶은 욕심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백탑파의 삶과 사상이 추리에 썩 잘 어울렸다. 일찍이 압록강을 건너 연경을 여행하고, 과학을 신봉했으며, 꽃 새 물고기 나비 등등에 백과사전적 지식을 가졌던 그들에에게 추리는 가장 잘 어울리는 소설적 옷이다.
앞으로도 김진과 이명방을 등장시켜 백탑파의 활약을 소설로 옮길 예정이다. 정조 시대에는 너무나 멋진 인물과 기이한 사건이 많기에, 길게 보고 다양한 관점과 새로운 형식으로 접근하는 쪽을 택했다. 『방각본 살인 사건』에서 소홀하게 다룬 백탑 서생과 무인의 삶은 다른 장편 소설로 탐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