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가 커질수록, 사람들은 더 외롭다고 느끼게 됩니다. 우리가 외로움을 느낄지라도,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p.3 「아리스토텔레스 루파니스, 작가의 말」 중에서
어린 시절의 아파트는 전부 재개발이 되었다. 5층짜리 단지도 12층짜리 단지도 그렇게 되었다. 슬쩍 찾아가 본 적이 있고 뻔한 섭섭한 마음이 잠시 들었다가 아니다 싶었다. 내가 무슨 권리로 어릴 적 살던 곳이 기억 그대로 남아있길 바란단 말인가. 평생 한두 번이나 갈까 말까 한 주제에. 여기가 내가 빙글빙글 돌던 곳이야, 이 정도 말밖에 못 할 주제에. 위로 솟구치고 싶어 하는 도시의 본능에 무슨 권리로 냉소를 보낸단 말인가. 얄팍한 냉소는 오히려 재개발을 하지 않고 버티고 있는 청소년 시절의 아파트를 향한다. 가장 커다란 가치가 가장 높은 재건축 분 양가를 향해있는 곳. 쥐가 나와도, 7중 주차를 해야 해도, 집값을 위해 쉬 쉬한다는 나의 고향. 그 모습을 보았을 때 나는 12동과 16동 사이에 있었던 일과 마음을 실제의 장소와 분리하기로 했다.
---p.70 오지은, 「그 안에서 아이들도 열심히 자라고 있다」 중에서
한 도시에 내 몸이 닿기 전에 그곳의 공기와 햇빛을 책으로 먼저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행운이다. 도시를 잘 구운 크루아상처럼 겹겹이 맛보기 원한다면 책 속 활자로 그 도시를 먼저 더듬어 보는 게 좋다. 아마 그런 이유로 나는 유럽의 남부 도시들을 오래 흠모하다가 마침내 그곳으로 내 몸을 옮겨놓기에 이르렀는데, 직접 마주한 도시의 풍경이 책으로 봤을 때와 조금 다르다고 해도 그건 또 그것대로 매력적인 덧칠이었다.
---p.74 윤고은, 「레몬이 알전구처럼 총총한 도시」 중에서
도시는 인간의 몸이 만들었다. 인간의 일반적인 키가 건물 한 층의 높이를 결정했을 것이고, 인간의 몸 두께가 마차나 자동차의 크기를 결정했고 그 것이 한 차선 도로 크기를 정했다. 여기에 인간의 욕망과 꿈 그리고 상처 와 좌절이 뒤엉켜 도시는 완성됐다. 도시에는 인간의 역사가 있고 인간의 환희와 눈물이 있다.
---p.79 허연, 「두 도시 이야기」 중에서
독일에서 이 교회는 전쟁의 흉터이고 도시의 흉터였다. 다른 건물로 덮어 지우거나 치워서 추모공원 정도를 조성하는 게 일반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대로, 매일매일 살아가는 자기들의 도시에 흉터로 남겨놓았다. 다른 어떤 것보다 그 감각이 무척 낯설었다. 이들에게 도시란 그야말로 시민들이, 자신들을 위해 살아가는 곳이었다.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곳, 타인이 어떻게 볼지가 먼저인 곳이 아니었다. (…) 흉터가 도시의 풍경일 수 있다. 어쩌면 흉터가 도시 풍경의 일부일 때 도시는 더욱 매력적인지도 모른다. 자기 몸의 흉터를 창피해하지 않는 사람이 매력적인 것처럼.
---p.85 이혁진, 「도시의 진경」 중에서
도시에는 시간의 흐름을 목격할 수 있고 불분명하고 정체된 감정을 흘려보낼 수 있는 장소가 반드시 필요하다. 인간의 통제에서 벗어나 자생하는 미지의 생태계가 있는 곳, 인간이 지구라는 행성, 자연의 일부라는 자각을 일깨워주는 곳, 소유하지는 못해도 공평하게 누릴 수 있고 각자 자신 만의 고유한 이름을 발견할 수 있는 그런 곳 말이다. 재앙과 고통이 이 세계를 흠집 내고 할퀴어도 희망이 멸종위기의 감정으로 여겨진다 해도 그런 장소 가까이에 있다면 사람은 일종의 견인력을 얻을 수 있다. 삶을 환한 빛 가까이로 끌어당기는 사소하지만 위대한 힘을.
---p.93 안윤, 「헤매도 길을 잃지 않는」 중에서
최용준의 사진은 부분과 부분을 더해도, 파사드와 파사드를 연결해도 한 건물이나 도시의 시공간이 특정되지 않는다. 프레임 밖의 세계와 연결되지 않는 정교한 프레임, 현실감과 생활감의 흔적이 표백된 파스텔톤 색감은 사진 속의 건물과 도시를 무국적, 무장소, 무시간으로 탈바꿈시킨다. 그 안의 모든 대상들은 실시간 피드만 소비되는 SNS 공간처럼 선형적인 역사를 잃어버린 채 표면의 디테일만 빛날 뿐이다. 그 반짝임에서 어떤 건물이나 한 도시의 이력과 문맥과 의미를 읽어낼 수 있을까, 그 시공간을 특정해낼 수 있을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읽을 만한 이력과 문맥과 의미가 없음, 하나로 특정되는 시공간이 아님, 그것은 우리가 지금 생활하고 살아가는 건물과 도시의 가장 뚜렷한 특성이 아닐까.
---p.106 박지수, 「최용준, 로케이션 / 엘레먼트」 중에서
이 이미지를 보면서 왜 마음이 흔들릴까? 무엇이 마음을 건드리는 걸까? 이러한 현상에서 일어나는 힘의 행방을 탐구하고 싶다.
---p.121 「이타미 고, 작가의 말」 중에서
차이밍량과 봉준호는 모두 이와 관련해 동일한 메타포에 매달리는 이들이라는 점에서 흥미롭다. 그건 바로 집이다. 가옥으로서의 집(house)과 가정으로서의 집(home)이라는 뜻을 모두 고려해서 말이다. 영화의 가족, 영화의 거처, 영화의 집이라는 것이 대체 오늘날 어떻게 가능한가? 혹은 과연 가능한가? 차이밍량과 봉준호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동일한 문제에 집착하고 있다.
---p.158 유운성, 「영화의 집을 떠나며」 중에서
인물 사진이 할 수 있는 말은 많다. 인물사진은 증명, 분류, 기록, 보고 그리고 인스타그램의 ‘셀피’가 입증하듯 완벽히 물화된 페르소나 같은 것을 말해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오랜 동안 인물사진에서 기대했던 것은 여기에 없는 인물이 내 눈앞에 현존함으로써 발생하는 그 인물에 대한 기억이다. 그것은 내가 인물사진 속의 그/그녀를 직접 만나고 겪지 않았더라도 완강히 내 시선을 파고들게 한다. 인물사진 속의 인물은 짐작 못 한 방식으로, 그를 보는 내게 자신의 삶에 관해 진술한다.
---p.165 서동진, 「이미지 생성 AI의 사진적 리얼리즘」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