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롤모델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다. 일에 대한 욕구는 점점 다변화되는데, 그 길을 먼저 걸은 사람은 잘 보이지 않아 스스로 길을 개척해야 하는 상황이다. 가만히 서서 중심을 잡는 것만도 쉽지 않은데 방향을 잡고 어디론가 나아가야 한다. 심지어 일을 하면서 원래의 자신을 점점 잃어버리기도 한다.
나는 본능적인 욕구 충족을 넘어, 일에서 재미와 의미도 함께 느끼고 싶었다. 누군가는 너무 낭만만 좇는다 할 수도 있겠지만 내 마음이 그랬다. 그 결과, 지금의 일을 찾아 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일에 대한 나의 고민은 이제 종착역에 다다른 걸까? 아니다. 여전히 진행 중이다. 일희일비하는 일상은 늘 곁에 있다. 후회하는 순간이 한 차례도 없었다면 명백한 거짓말이다. 과거의 선택을 수시로 반추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과정에서 스스로가 어떤 목소리를 내는지 들으며 움직였다는 점이다.
--- 「프롤로그」중에서
두 번째로, 아무도 걷지 않았던 길을 걸을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무에서 유, 즉 0에서 1을 만드는 일은 무척 어렵다. 1에서 2, 혹은 1에서 10까지 만드는 일도 쉽지는 않지만 선례가 있으니 도전하는 마음이 덜 막막하다. 하지만 니플리스는 새롭게 만들어낸 시장이었다. 시장은 타인이 아닌 내 욕구를 통해서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더불어 용기 있게 밀어붙이는 뚝심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까지.
--- 「1부, 내 일을 찾다」중에서
오이스터 루지(Oyster Luge)라고도 불리는, 스모키하고 짠내 짙은 아일라 위스키와 조합해서 먹는 것이다. 아무리 굴을 어려워하는 사람이라도 이 조합은 꼭 도전해야 했다. 숙소 근처 레스토랑으로 달려가 굴과 위스키를 주문했다. 혹시나 이번에도 안 좋은 기억으로 남는다면 앞으로 평생 굴을 먹지 말아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들었던 대로 반깐굴을 껍질째 집어들고, 위스키를 부은 뒤, 훅 들이켰다.
오…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독특한 풍미였다. 굴의 비릿함을 아일라 위스키의 스모키함이 적절하게 잡아주면서 개성과 균형을 모두 갖춘 향이 만들어졌다. 탱탱하게 부풀어오른 살을 씹으니 위스키의 쓰고 짠맛이 배어나왔다. 쉬지 않고 5개를 먹었다. 아일라의 바다에서 탄생한 두 창조물을 제대로 정복한 셈이다.
그렇게 약 열흘 동안 스코틀랜드의 위스키 증류소와 각종 바 문화를 경험했다. 진을 71가지 구비하여 진토닉과 마티니의 조합만으로 100가지가 넘는 메뉴를 갖춰놓은 바, 킬트를 입은 채 선반 사다리를 성큼성큼 올라가서 위스키를 꺼내주는 주인장의 바, 한국에서 마셨던 기네스를 부정하게 만드는 에든버러 공항의 어느 펍까지. 쉴 새 없이 먹고 마시기만 했지만 하나하나가 피가 되고 살이 된 순간들이었다. 그때의 경험은 아직도 생생해서, 책바 손님에게 술을 설명해드리거나 외부에서 위스키 테이스팅 클래스를 진행할 때 큰 도움이 됐다. 역시 직접 경험하는 것 이상의 배움은 없다.
--- 「1부, 내 일을 찾다」중에서
내가 자주 가고 싶었던 바는 위치가 좋다거나 유명한 바텐더가 있다거나 ‘힙한’ 바가 아니었다. 오히려 스타벅스처럼 언제든 편하게 머물다 가는 곳에 가까웠다. 물론 사람마다 좋아하는 바는 다르고, 그저 내 취향이 이럴 뿐이다. 덕분에 책바는 혼자 오는 손님 비중이 월등하게 높다. 나도 한 팀에 3명이 넘는 손님은 받지 않고 바에서 큰 매출을 담당하는 보틀 판매도 안 하면서 각자가 자신과의 시간에 집중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려고 한다. 어쩌면 또 다른 나일지도 모를 이 손님들은 책바에서 읽고, 쓰고, 생각하며 자신만의 호사스러운 시간을 보낸다.
시간이 지나면서 책바의 결에 동조하는 공간들이 하나둘 생겨났다(심지어 스스로 책바라고 칭하기도 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책과 술의 조화에 의문을 품는 사람도, 혼술에 부정적인 사람도 여전히 있지만 점차 새로운 음주문화가 만들어지고 있는 셈이다. 여러 바에서 술을 즐기는 ‘바 호퍼’들도 책바에 처음 오면 이런 바가 있는 줄 몰랐다며 말을 건네곤 한다. 첫마디는 보통 이렇다.
“어떻게 이렇게 만들 생각을 하셨어요?”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제가 매일 가고 싶은 바를 만들었어요.”
--- 「2부, 책바를 소개합니다」중에서
한 달에 한 번, 책바는 공간 한 편에 놓인 빌보드 차트를 통해 주제를 알린다. 주제는 이상형, 봄, 거짓말, 우리 동네 등 가급적 사람에 따라 다양한 생각을 펼칠 수 있는 단어로 선정한다. (아마도 적당히 알코올에 물들었을) 손님들은 각자의 내밀한 생각과 감정을 담아 글을 써서 붙인다. 그 후 다른 손님들이 오가며 글을 읽고 마음에 드는 작품에 투표한다. 한 달 뒤, 책바는 가장 많이 득표한 3명에게 원 프리 드링크를
제공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글을 쓰고 공짜 술도 마실 수 있는 일석이조 이벤트다.
일종의 가설에서 시작된 빌보드 차트는 시간이 흐르며 점점 자신의 잠재능력을 드러내는 채널이 됐다. 주제도 일견 사소해 보이는 데다 몇 문장 적지 못할 작은 종이에 쓰였지만 단단하고 힘 있는 글들이 속속 탄생했다. 같은 주제인데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경험했는지 엿볼 수 있다는 건 빌보드 차트가 주는 큰 매력이었다.
빌보드 차트는 공간의 결에 어울리는 커뮤니티 역할도 해냈다. 기본적으로 책바는 조용한 분위기를 지향하기에 일반적인 카페나 바에서 이루어지는 낯선 이와의 소통이 쉽지 않다. 그런데 차트에 써놓은 글을 통해 지금 이 순간뿐 아니라 과거와 미래에 방문하는 누군가와도 대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2부, 책바를 소개합니다」중에서
공간은 하나의 유기체다. 공간을 이루는 수많은 구성요소는 마치 세포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지속적으로 변한다. 때문에 공간 운영자는 뼈대를 이루는 본질은 지키되, 부차적인 요소들이 점차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다면 책바의 본질은 무엇일까? 두 가지 축이 있는데, 하나는 공간 운영자고 다른 하나는 고유한 분위기다. 앞서 말했듯 책바는 책과 술의 공감각을 구현하는 공간으로, 방문하는 이들이 온전히 자신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디자인했다. 그러다 보니 다른 곳에는 없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 예를 들어 ‘소곤소곤 대화하기’가 그렇다. 이 분위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책바를 찾는다.
이를 위해서는 공간 운영자의 세심함이 필수다. 한결같은 분위기를 내려면 운영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쉴 새 없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더불어 책과 술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다. 그래야 술도 맛있게 만들 수 있고 책도 적절하게 권할 수 있으니까. 이렇게 운영자와 분위기는 상호작용하며, 한 축이 삐끗하면 공간이 지닌 매력은 퇴색할 수밖에 없다.
--- 「2부, 책바를 소개합니다」중에서
“그런데 책과 술이 어울린다고 생각해?”
책바가 몇몇 기사를 통해 소개됐을 때도 비슷한 댓글이 많았다. 술은 취하기 위해 마시는 거다, 술을 마시면 책이 눈에 안 들어온다, 술 마시면 졸립다 등등. 모두 존중한다. 우리는 다양성을 보장하는 사회에 살고 있으니까. 하지만 이런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취하지 않게 적당히 술을 마시는 사람, 술 마시면 책이 눈에 더 잘 들어오는 사람, 술 마셔도 졸리지 않는 사람. 절대다수는 아닐 수 있어도 책바는 이런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다.
--- 「3부, 나답게 일하다」중에서
누군가는 일하면서 행복을 찾는 것이 허황된 꿈이라고 말한다. 일은 단순히 돈을 버는 수단이거나 자신의 지위를 표현하는 방식이라고 한다. 하지만 돈과 지위는 결국 남과 비교하게 되는 매개체라, 이걸로만 일에 접근한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타인과의 차이 때문에 불만족에 빠질 확률만 점점 높아질 뿐이다.
반면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내 경우는 신속한 피드백, 그리고 정신과 육체노동의 조화다. 이 두 가지는 지금 하는 일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상 그대로일 것이다. 말하자면 내가 일터에서 찾은 ‘변하지 않는 나만의 행복’이다. 일하는 각자가 이런 행복을 찾는 것이, 오랫동안 할 수밖에 없는 일을 꾸준히 잘하도록 만드는 방법 중 하나다.
--- 「3부, 나답게 일하다」중에서
책바는 내 일의 종착지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앞으로 몇 년, 몇 십 년을 더 할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형태로든 다음 단계가 있으리라고 확신한다. 일찍 성공해서 은퇴하지 않는 한 오랫동안 일해야 할 운명이니까.
돌이켜보니, 서른 이전에는 거의 계획했던 대로 이루는 삶을 살았다. 연초에 목표를 세우고 한 해 동안 실천한 다음 연말에 점검하는 식이었다. 그런데 서른이 넘고 나니 계획은 연초의 마음가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게 되었다. 예측하지 못한 수많은 상황이 나타나 나를 어디론가 이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아야 한다. 상황에 휩쓸리지 않고 솔직하게 선택할 수 있으려면 자신을 잘 알고 스스로 단단해져야 한다.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이유 또한 모두 나를 알기 위한 노력 덕분이었다.
--- 「4부, 고민과 성찰은 계속됩니다」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