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어떤 순간이나 잃어버린 무언가를 기억하려고 할 때, 대개 흐릿한 이미지가 떠올라요. 그때 느꼈던 감정이 분명한데도 말이죠. 그건 순간 포착으로도 선명하게 담을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렇게 희미하지만 여전히 제 게 남아 있는 느낌을 사진에 담아 보려고 해요.”
---「킨 코어델, 작가의 말」 중에서
얼마간의 가정으로 마무리되었지만, 며칠이나마 빛을 잃을지도 모를 미래를 생각했던 것은 그 전과 후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내게 큰 영향을 끼쳤다. 전에는 지나쳤던 빛의 알갱이들을 하나하나 곱씹으며 눈길을 내어주게 되는 행위도, 기호를 떠나 내게 반사되는 그 어떤 색에도 먼저 감사를 보내게 되는 마음도, 눈부심과 캄캄함 사이의 세세한 스펙트럼을 헤아리는 감각도 그 시절에 빚을 졌다. 빛은 내게 고이지 않고 나를 통과해 사진으로 수록된다. 나라는 투과체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 어떤 질감인지, 무슨 시간을 보냈는지를 지금도 빛은 그려내는 중이다. 그 그림을 탁본하며 얇은 빛의 기록이 쌓여 간다. 내가 없을 날짜에도 남겨질 조용한 이야기들이.
---p.134 이옥토 「얇은 빛」 중에서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면, 이따금 하늘을 보듯 고개를 들어본다. 위 올려다본다. 뒤를 돌아본다. 영사실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본다. 관객 머리 위로 지나가는 빛을 본다. 스크린에 부딪친 빛을 본다. 끊임없이 움직이는 빛을 보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여전히 영화가 좋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미 오래전 손으로 만질 수도 없고 끌어안을 수도 없는 존재에 매혹되었다.
---p.138 서이제 「움직이는 빛」 중에서
시를 쓰려고 책상에 앉으면 왜 이 두 이미지가 어김없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나의 시 쓰기를 지탱하는 두 개의 근원적 뿌리라는 생각도 든다. 폭죽공장 사장은 빛에 관여하고 흰 방에서 덧칠하는 사람은 색에 관여하는 인물이라는 차이는 있으나 내 안에서 둘은 사실 한 사람이다. 그들은 때로는 폭죽공장 사장으로 때로는 덧칠하는 사람으로 동전의 앞뒷면처럼 뒤집히며 나의 쓰기를 추동한다.
---p.142 안희연 「시를 쓸 때만 발생하는 빛과 색에 대하여」 중에서
모든 것이 그리 명료하게 요약 가능하다면 사는 게 조금 더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라이트룸 안에서 빛을 만지며 생각한다. 라이트룸은 사진을 정리하고 보정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름도 ‘빛의 방’ 아닌가. 거기서 빛은 다섯 단계로 나뉜다. … 그러다 어느 날 생각한다. 빛을 이리 간략하게만 인지하며 살아도 괜찮을까. 오래된 이 감각을 대체하고 싶었다. 뉴런처럼 각인된 다섯 이름의 빛을 개인적이고 특수한 장면으로 바꾸고 싶었다. 정보 값 이상으로 빛을 다시 감각하고 싶었다.
---p.147 이훤 「개인적이고 특수한 빛의 이름들」 중에서
로베르 브레송의 짧은 단상과 경구를 모은 저서 『시네마토그래프에 대한 노트』에는 “유성영화가 발명한 것은 침묵”이라는 언급이 나온다.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전환되면서 영화가 획득한 것은 영상의 기본적인 조건으로 주어지는 소리가 아니라, 침묵이라는 고유한 표현이다. 필름에 소리가 입혀지면서 역설적으로 영화는 모든 소리로부터 독립된 침묵의 순간을 발명하게 된다. 영화적 사운드에 관한 브레송의 날카로운 통찰을 이미지의 차원에 이식해 본다면, 우리는 “컬러영화가 발명한 것은 검은색”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p.153 김병규 「검은 옷의 추방자들」 중에서
관광이라는 현대의 특유한 장소 경험은 장소를 경험한다는 것을 풍경을 시각적으로 소비하는 것으로 환원한다는 이야기에 익숙할 것이다. 이는 여행을 곧장 풍경을 보러 가는 것과 동일시하는 우리의 태도를 가리킨다. 그런 관광 여행이 어쩐지 부박하고 상투적인 것처럼 보여 체험으로서의 여행을 장려하든 ‘다크투어’를 선호하든, 어쨌든 여행지는 풍경이라는 명소들로 가득 찬 곳을 관람하려는 이들을 맹렬히 꼬드긴다. 멸균 처리된 것 같은 풍경을 인공적으로 조성한 정원이나 공원을 앞세운 쇼핑몰들이 인스타그램의 ‘인생 샷’을 위한 배경을 제공하며 방문객들을 동원한다는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인간이 바라보는 위치로부터 달아난 채 오직 외부 세계의 공간을 보기 좋은 시각적 오브젝트로 축소 조정하는 추세는, 우리를 더욱 심란하게 한다.
---p.160 서동진 「풍경과 이미지: 다시 풍경론을 생각한다」 중에서
지난겨울에는 흰 털을 가진 개 연두와 처음으로 눈이 쌓인 길을 산책했다. 간밤에 쌓인 눈이 풍경의 모서리를 온통 둥글게 무너뜨리고 있었고 개는 깨끗한 눈 위를 조심스레 지나며 눈 속에 파묻힌 냄새를 궁금해했다. 아침 햇빛 아래에서 거의 빛을 발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흰, 눈의 빛 위에서 연두는 흰 털과 갈색 털이 두루 섞인 개가 아니라 연미색 털과 갈색 털이 두루 섞인 개였다. 눈의 빛깔을 흰색이라고 부른다면 연두의 털은 흰색이라고 부를 수 없을 것 같았다. 새하얗다는 말은 나눠 가질 수 없어서, 새하얀 눈 위에서는 새하얗다는 말보다는 덜 흰 것, 눈과 구별되는 흰색을 가진 것을 부를 다른 말을 찾아야 했다.
---p.203 김리윤 「Lappi · A book of light & snow」 중에서
어둠을 머금은 이 빛깔은 깊이를 알 수 없는 심해에 뿌리를 내리고 피어난다. 이를 깨닫게 되면 깊은 바닷속의 먹먹한 어둠이 사진 밖으로 서서히 번져온다. 점점 어두워지는 푸른 목소리로 부르는 단조의 노래가 사진 밖으로 천천히 흘러온다. 제 숨을 다하는 듯한 빛깔과 소리가 내 주위를 감싸고 나서야 문득 외로운 물음들이 아프게 돋아난다. 얼마나 오랫동안 어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일까, 얼마나 오랫동안 어둠 속에 있었던 것일까. 얼마나 오래 있어야 어둠과 어둠 사이에서 미세하게 달라지는 어둠의 표정까지 읽을 수 있을까. 얼마나 오래 있어야 어둠과 어둠의 경계에서 희미하게 반짝이는 빛의 먼지들을 알아챌 수 있을까.
---p.223 박지수 「이옥토, 라이트 파우더」 중에서